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10:13)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Everyday, people who encounter miracles,,,

** 생수의 강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베드로전서 5장 2-6절)(All of you, clothe yourselves with humility toward one another.

Andy1954 2024. 11. 21. 01:13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라는 재목으로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먼저 교회 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자세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본문 말씀에서 참된 지도력은 '겸손과 섬김'에 있음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원래 장로(Elder)란 구약시대부터 시작된 호칭으로, 처음에는 주로 나이가 많은 연장자들을 부르는 호칭으로 사용되었으나, 점차적으로 직분을 나타내는 호칭으로 바뀌게 되어, 후에는 신앙공동체 안에서 제사장 다음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유능하고 노련한 지도자를 뜻하게 되었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루살렘교회가 장로제도를 사용하였으며, 사도행전 14장23절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는 전도 여행을 하면서, 각 교회에 장로들을 세웠음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디도서에 보면 장로는 지혜와 경험을 겸비한 연장자라는 뜻 외에, 교회에서 전반적인 것을 관리하는 영적지도자로써 교인들을 양육하고 돌보며 인도하는 일을 감당하고 있슴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장로나 감독은 그 자격과 맡은 직책은 서로 비슷하지만, 장로란 직능보다는 신분적인 측면이 강조되는 명칭이고, 감독은 성도의 교육을 담당하고 교훈과 권면을 베푸는 직능을 강조하는 호칭이라 할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교회 장로를 양 무리의 목자,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원래 양무리는 하나님의 것이고, 장로직임은 하나님의 은혜로 맏겨진 것이기 때문에, 장로들은 지배를 하거나 다스리는 자세로 양무리를 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겸손한 마음과 신성한 모습으로 모범을 보이며 양을 양육하고 돌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양들의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이 큰 목자요 선한목자이시고, 장로들은 목자장이신 예수님의 대리자 이기때문에, 선한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처럼 양들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를 따라 양들을 푸른 초장과 맑은 물가로 인도하여 영적 양식을 공급할 뿐만 아니라 양을 지키고 구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고난과 희생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직임을 잘 감당하면 재림의 때에 그리스도로부터 합당한 상급으로 영원히 쇠하지 아니하는 영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같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는 억지로 하지 말고, 순종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자원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더러운 이를 탐하지 말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곳이지, 인간의 다스림을 받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 통치의 권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서 보여주신 사랑과 희생, 그리고 복종과 섬김에서 나오는 것이지 군림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평신도가 쉽게 접근할 수없고, 만날 수 없을 만큼 되어야, 권위있고 실력과 능력있는 목사로 인정되는 참으로 기이하고 안타까운 모습이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한국의 대형교회 담임목사 한번 만나려면 여간 쉽지가 않다는 항간의 소문,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데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거느리고 있는 집단이 대형화되거나 세력화되면 자연히 권위가 붙게 되고, 그런 권위를 가지게 되면 자칫 굴종을 바라는 교만한 마음을 갖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다 그렇다할지라도 교회의 권위, 교회 지도자의 권위는 예수 십자가에서 나오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시는 것은 사랑과 희생, 그리고 복종과 섬김입니다.

주후 4세기경, 콘스탄틴 황제의 모친 헬레나(Hellena) 는 예수님이 탄생하신 유대땅 베들레헴에 탄생교회를 세웠습니다. 돌로 단단히 지은 이 예배당의 내부는 모자이크로 아름답게 수놓은 성화가 있고, 강단 밑에는 바로 예수께서 탄생하신 곳이라고 대리석에 별표를 그려 표시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역사적인 교회가 들어가는 문은 하나밖에 없으며, 그나마 매우 작고 낮아서 들어가는 사람이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통과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성지순례를 위해 이 교회에 들르는 사람들은 이토록 불편하게 만들어진 문을 보며 그 이유를 묻습니다. 그러자 안내자는 설명하기를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곳에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나 겸손해야 합니다. 그 겸손을 강조하기 위하여 들어가는 문을 작고 낮게 만든 것입니다. 누구나 이 교회에 들어가려면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구부려, 겸손한 자세를 취해야만 들어 갈 수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겸손의 표상으로 이 세상에 오신 주님 앞에서 겸손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가 계신 곳으로 들어갈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천국은 겸손한 자만이 들어가는 곳이요, 기도와 겸손으로 들어가야 하는 곳입니다. 어거스틴(Augustine)은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하늘과 땅을 만드는 법을 배우라, 기적을 행하는 법을 배우라, 병든 자를 고치는 법을 배우라, 악마를 물리치는 법을 배우라. 죽은 자를 살려내는 법을 배우라 하는 등 그렇게 말씀하지 않고, 마태복음 11장 29-30절에서와 같이, 오직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라고 말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겸손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해 어느 교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겸손을 보려하지 말고, 자기의 잘못만을 살펴라. 그러면 겸손은 저절로 배워지게 될 것이다." 여기 자기의 잘못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의 존재를 알아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 인간은 한 줌의 먼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보잘것없는 하찮은 존재임을 항상 기억하여 겸손함을 잃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2-15절을 보면, 무엇보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겸손을 배우도록 몸소 그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겸손은 실제 행동으로 옮겨질 때 겸손의 참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람의 행동과 마음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실제로 남 앞에 자기 몸을 낮추어 굽히게 되면 마음속에서도 그만큼 겸손이 우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겸손은 실천을 통해서만 얻어지고 그리고 그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겸손의 실천은 비단 나이 어린 사람이나 초보자나 지위가 낮은 사람만이 아니라, 연륜에 상관없이 누구든지 지속적으로 한 평생 배워나가야 할 가장 중요한 삶의 자세가 아닐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약점은 많이 배울수록, 많이 가질수록, 지위가 높을수록, 경험과 연륜이 깊을수록 교만해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좀처럼 자기를 낮추어 남을 섬기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 빌립보서 2장 6-8절은 우리에게 먼저 그 예수의 마음을 배우고 품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회 지도력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귀결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시지만,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 속성을 그대로 지니고 계신 분이십니다.그런데도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 그리고 하나님의 권위와 지위를 모두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게 된다면, 현재 처해있는 그 어떤 어려움이나 고통도, 그 십자가의 길을 막을수 없는 것입니다. 죽음까지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순종이, 참된 순종이며 참된 겸손이 되는 것입니다. 겸손함을 배우려면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지위와 자존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도 옛날에 대기업 부장이었는데, 아니 사장, 교수였는데, 하는 지난 날들의 생각들을 몽땅 버려야 합니다. 또한, 내가 지금 그래도 목사, 장로인데, 아니 사장, 교수, 박사인데 어떻게 내가 감히 쓰레기를 치우고 걸레질을 하며 청소나 할 수 있겠는가, 아니 내가 지체 높으신 분의 부인인데 어떻게 설거지나 할 수 있겠는가, 대개 이런 식으로 섬기는 일 따위는 애초부터 회피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존귀한 하나님의 지위를 버리면서까지 우리를 섬기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던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보잘것없는 세상의 지위와 자존심, 미련없이 아낌없이 버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열왕기하 5장을 보면, 나아만(Naaman)은 아람 군대장관으로 크고 존귀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병(leprosy) 환자 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 붙잡혀온 작은 계집종으로부터 이스라엘 나라에 엘리사(Elisha)라고 하는 선지자에게 가면 나병을 고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많은 금은보화를 가득 싣고 엘리사를 찾아갔습니다.그런데 엘리사를 찾아갔지만 엘리사는 그 크고 존귀한 장군을 맞이하러 문밖에 나와보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종을 시켜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는 말만 전했습니다.

이에 나아만 장군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아람의 군대장관이 여기까지 왔으면 예를 갖추어 나와 영접하고 문둥병을 고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 아니냐, 내 나라에 다메섹강이 이 요단강보다 더 깨끗하지 않더냐, 어디 요단강같은 강이 없어서 찾아온 줄 아느냐" 그러면서 분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종들이 만류하며 이르기를, "여기까지 왔는데 엘리사의 말대로 한번 요단강에 가서 씻어나 보시지요." 자존심 상하지만 눈 딱 감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잠그고 나니 그야말로 씻은 듯이 나아 어린아이 살결같이 되었습니다. 만약 자신의 지위와 자존심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면 그는 영영 나병환자로 인생을 마쳐야 했을 것입니다.

사무엘상 21장을 보게되면, 다윗(David)은 살기 위해서 별 짓을 다했던 것을 볼수 있습니다. 사울왕의 끝없는 추격을 받아 생명의 위험을 느낀 다윗은, 할 수 없이 이웃나라 가드로 도피했습니다. 그러나 가드왕은 이미 이스라엘의 다윗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던 터였습니다. 바로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는 사울보다 다윗이 훨씬 뛰어난 장수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빼어난 장수가 제발로 굴러 들어왔으니 어찌 가만 두겠습니까? 이를 눈치챈 다윗은 갑자기 행동을 바꿔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수염에 침을 흘리면서 마치 미친사람 행세를 했습니다. 그러자 가드 왕 아기스가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도 보거니와 저 다윗이 미치지 아니했느냐, 이 나라에 미치광이가 부족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그래서 결국 그곳을 나와 생명을 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다윗이 도망자의 신분을 망각하고 찬란했던 지난날의 경력에 연연하여 체면치레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사무엘하 6장에서는 다윗은 하나님을 기뻐할 때, 모든 체면을 다 버리고 춤을 추며 하나님 앞에 즐거워했던 것을 볼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궤(the Ark of God)가 다윗성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 백성과 더불어 나팔을 불며 즐거워하며 춤을 출 때, 자기 몸을 드러나도록 신명나게 즐거워하며 춤을 추었습니다. 왕이라 해서 점잖 떨며 체면치레하려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라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같은 존재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수치를 당해도, 체면손상을 불사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끝까지 섬기는 모습으로 사실수 있기를 바랍니다.

노예는 자기 주장이나 의견이 없습니다. 오직 있다면 주인의 명령과 주인의 뜻만 있을 뿐입니다. 노예가 주인의 뜻대로 잘 했다고 해서 노예에 대한 주인의 칭찬도 없습니다. 누가복음 17장 7-10절에,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종의 자세가 나와 있습니다. 어느 집에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는데, 그 종이 자기 할 일을 다 마치고 저녁 늦게 집에 돌아왔다고 해서 그 주인이 '자, 수고했다. 내가 준비한 저녁식사를 함께 먹자'하겠습니까?

도리어 주인은 '자 빨리 저녁 준비해라 그리고 식사 중 옆에 서서 시중들거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킨대로 다 했다고 해서 주인이 종에게 수고했다며 '감사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종 이나 노예는 주인의 이러한 명령을 다 행한 후에도 오직 할 말이 있다면 "나는 무익한 종이라 내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 훌륭한 예술품이라고 알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가 있습니다. 그 그림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자 그 그림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로 인해 늘 붐비고 있었습니다. 어떤 유명한 화가도 그 초상화를 보기 위해 코펜하겐까지 왔습니다. 그는 그 그림을 면밀히 조사해 보았으나 그림의 기법이나 색채감이 별로 특별하지 않아 실망하였습니다.

그가 함께 온 친구에게 그의 소감을 이야기하자 친구는 "여보게, 그것은 자네가 잘못 본 걸세. 그 그림은 마주 서서 보는 것이 아닐세. 어떻게 우리가 구세주인 그리스도의 얼굴을 마주 보겠나? 무릎을 꿇고 앉아서 다시 보게. 그러면 그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알게 될 걸세."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화가는 다시 들어가서 경건한 마음으로 무릎을 끓고 그 그림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말할 수 없는 자비와 사랑의 모습이 그의 마음에 새겨지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감동된 화가는 언제까지나 무릎을 꿇고 그 그림을 황홀한 모습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신앙생활은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이 세상에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먼저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을 때, 예수님의 겸손을 배울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안에서 겸손을 해질 때, 현재 우리 앞에 놓여있는 고난과 고통을 은혜로 감당할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그리스도의 때, 즉 예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거룩한 자리에 참여하고, 시들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날마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