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일부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로마서 10장 9절 말씀과 같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기에 구원받은 성도가 되었습니다.
성도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면 구원받은 성도라 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고전 15장 12절의 말씀과 같이, 자신들의 몸이 부활하리라는 사실을 믿지 못한데
있었습니다. 이유는 당시에 팽배했던 헬라철학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헬라철학의 중심지인 아덴에서 복음을 전한 적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곳의 철학자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도행전 17장 32~33절 말씀처럼 조롱하며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곳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헬라 철학은 사람을 영과 육으로 구분하는 이원론을 주장하면서 영은 선하지만 육은 악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몸의 부활 곧 자신들의 악한 육이 부활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고린도는 아덴에서 가까워서 자연히 아덴의 헬라 철학이 고린도에도 깊은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은 믿었지만, 자신들의 몸이 다시
산다는 것을 믿기가 선뜻 내키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은 몸의 부활을 잘못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육체가 그대로 부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변화된 몸으로 신령한 몸으로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부활장인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자세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 몸의 부활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면 우리 몸도 부활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세 가지로 증언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부활의 믿음과 부활의 소망이 더욱 확고해지기를 축원합니다.
첫째로, 교회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구원받은 성도인데, 이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도 이땅에 교회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1절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형제들아'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호칭은 매우 친밀감 있고 애정 어린 표현입니다.
사도행전 8장을 보면 바울은 고린도에서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열매로 고린도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지금 바울은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바울은 과거에 그가 고린도에 있었을 때 전했던, 복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전한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돌이켜보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전한 복음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3절과 4절의 말씀처럼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즉, 복음의 본질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왜 우리에게 기쁘고 복된 소식이 됩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다시 사신 것처럼 우리들도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그들은 복음 가운데 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신앙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2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그러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복음 가운데 서서 복음을 굳게 지켰으며, 또
받은 복음을 계속해서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변에는 잘못 믿거나 헛되이 믿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믿는 듯 하다가 나중에, 믿음을 져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구원을 받았다가 구원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요일 2장 19절 말씀처럼 그들은 애당초 부터,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알곡이 아니라 쭉정이였습니다. 겉으로는 믿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처음부터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복음을 받고 굳게 지키고 참되게 믿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이처럼 구원을 받았으나, 본래 어떠한 사람들이었습니까?
고전 6장 9~11절 말씀을 보면 그들은 불의한 자, 음행하는 자, 우상 숭배하는 자, 간음하는 자,
탐색하는 자, 남색하는 자, 도적, 탐욕을 부리는 자, 술 취하는 자, 모욕하는 자, 속여 빼앗는 자들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로서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그들의 삶을 바꾸어놓았습니까? 바로 살아 계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셔서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셨던 것입니다.
그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살아 계셔서 역사하셨기 때문에 구원받을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역사를 살펴보면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탄의 궤계가 끊이지 않았음을
알수있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인간들의 구원을 방해하려는 사탄의 얄팍한 술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난 이 천 년 동안 교회는 오히려 더 부흥하면서 오늘날까지 존재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믿음의 선진들이 전하여 준 복음을 굳게 지키며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언하는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을 받아 복음 가운데 서서 복음을 굳게 지키고 복음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구원받은 성도입니다. 이제는 구원받은 성도로서의 삶을 통해서 살아계신 예수님을
모든 사람에게 증언할수 있게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성경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합니다.
복음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이미 말씀하고 있는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내셨으며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성경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바울에 의해서 복음이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저 복음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받은 것을"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1-12절 말씀을 보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복음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서 직접 받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고전 11장 23절 말씀에서 바울은 성만찬을 말씀하면서 자신이 예수님에게서 그 말씀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아무튼 바울은 자신이 받은 복음을 먼저 고린도에서 전했습니다.
복음의 본질을 밝히는 것이 어떤 가르침보다도 더 중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역사적인 사건이며 사실(fact)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우리의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이로인해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게 되었으며, 이것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목적이며 십자가의 참된 의미라 할수 있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장사 지낸 바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잠시 정신을 읽고 기절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숨을 거두셨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완전한 사망의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신 것은 성경대로 된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는 예수님이 대속의 죽임을 당하실 것을 자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죽임을 당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이사야 53장 9절에서는 예수님이 죽으신후 장사 지내게 될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예수님이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의 무덤에 장사 지내게 되실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잘 아는대로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님보다 칠백 년이나 앞서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 이사야는 성경에서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실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성경대로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셨습니다.
계속해서 4절 말씀 보겠습니다. "....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예수님의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의 복음이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예수님의 부활을 이미 다 말씀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성경대로 예수님은 죽으신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27절에서 베드로가 또 사도행전 13장 35절에서는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기 위해,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라는 시편 16편 10절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마가 12장 10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 죽임을 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실 것을,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라는 시편 118편 22절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태 12장 40절에서,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이때도 예수님은 성경을 들어서 자신이 죽은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임을 밝히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부활은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대로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소중히
여기며 성경을 삶의 원리로 삼고 성경대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로, 증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합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으며 또한 성경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시 사신 예수님을 목격한 많은 증인들이 이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너무나도 확실한 역사적 사건이 아닐수 없습니다.
이어서, 본문 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우선 오늘 본문을 보면, “보이신다”라는 말씀이 자주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뒤에는 아무나 예수님을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나타내시며 자신을 보이셔야만 예수님을 알아볼 수가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도, 예수님이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기 전에는
알아 보지 못했으며,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 역시도, 예수님이 그의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고 난 뒤에야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5절에서는, 예수님은 먼저 베드로에게 보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번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 였으나,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심히 통곡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상심에 빠진 베드로를 위로하시려고 먼저 그에게 보이셨을 것입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보이셨습니다.
이 때는 가룟 유다가 빠지고, 또 도마도 처음에는 없었기 때문에 아마도 열 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열둘이라고 표현한 것은 열둘이 예수님의 제자들 곧 사도들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숫자
였기 때문입니다.
6절 말씀입니다.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마태 28장 10절과 16절 말씀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은 갈릴리에 있는 산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제자들을 만나셨는데, 그때에 예수님은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을
것입니다. 열두 제자가 양질의 증인이라면 오백여 형제는 다수의 증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약 25년 정도 지나서 고린도전서가 기록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오백여 형제 중에 잠든 사람 곧 죽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수는 살아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확인해볼 수도 있었습니다.
고전 15장7절을 보면,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이때의 야고보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도 아니고,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도 아닙니다.
이들은 둘 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 속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가리키는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 7장5절 말씀처럼, 처음에 야고보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동생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 야고보는 예수님을 믿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또 야고보서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동생 야고보에게 보이신 후에, 또다시 모든 사도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 3절의 말씀대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십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고전 15장 8절을 보면, "맨 나중에 만삭 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마지막으로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에게도 보이셨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원래 바울은 그리스도를 비방하며, 교회를 박해하던 자였습니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그는 대제사장의 공문을 들고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에게 보이셨습니다.
그후로 바울은 예수님에게 잡힌 바 되어, 순교하기 까지 주님의 종으로 충성을 다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만삭 되지 못하여 난 자”라고 칭했습니다.
해산달을 다 채우지 못하고 났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기와 같이 부족한
사람에게 보이신 것은 전적으로 은혜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바로 뒤에 있는 고전 15장 10절에서, 바울은 이같이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에게
보이신 것도, 또한 사도로서 수고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펴본 대로, 예수님의 부활은 확실합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수많은 증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한 것처럼 우리들의 부활도 확실합니다.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의 몸도 부활할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장'인 고린도전서 15장을 끝내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고전 15장 58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돼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줄 앎이라"
우리는 부활 신앙 위에 견실하게 서서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의 거짓된 가르침에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럴때에 우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수고를 칭찬하시며 예수님을 위하여 행한 대로 상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신앙 위에 굳게 서서 날마다 주님을 위해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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