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10:13)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Everyday, people who encounter miracles,,,

** 생수의 강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의 변화(누가복음 19장 1-10절)

Andy1954 2023. 9. 16. 07:47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꿈(Dream)이나 비젼(Vision)을 가지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러한 꿈이나 비젼은 저절로 이루어 지는것이 아니고,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몇가지 결단과 의지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옛 말에도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라는 말이 있듯이, 먼저 꿈을 이루기 위한 간절한 기대와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자기 희생과 헌신이 뒤따라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에는 거저 이루어지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소원 성취의 목적이 단순히 나의 욕심이나 욕망을 체우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되며, 이웃을 기쁘게 하며, 선을 이루고 덕을 세움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읽은 본문의 말씀은 죄인 삭개오 어떻게 자기 소원을 이루어, 의롭고 아름다운 구원 받은 삭개오로 변화 되었는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조지 허버트 미드( 미국,1863-1931,George H. Mead)' 라는 사회심리학자는 인간이 자아를 형성해 나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는 ‘의미 있는 타인(significant others)’이라고 했습니다.

이 '의미있는 타인'이라는 말은, 사람이 어떤 사람을 만나든,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와 상호교감이 자신의 자아형성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뜻입니다.

그러므로 한 평생 살아가면서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자신의 삶의 모습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물론이거니와, 죽음 이후의 문제까지도,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결정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만남에 두 가지 형태가 있다고,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페르스는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끼리의 형식적인 만남의 형태인 '피상적인 만남'이 있고. 또 하나는 인격의 교감이 있는 '실존적 만남'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철학적인 어려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오늘 분문의 주인공 삭개오가, 예수를 만나기 전에 있었던 많은 피상적 만남과 예수님과의 실존적 만남과의 비교를 통해, 그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고 변화했는지 조명해 보기를 원하기 때문 입니다.


먼저, 2절을 보면,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삭개오(Zacchaeus) 무슨 의미를 갖고 있을까요? 

삭개오의 뜻은  '순결하다, 의롭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좋은 이름인것 같습니다.
전도서 7장 1절에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기름은 기쁨 번영 상징하며, 때로는 명성을 뜻하는 비유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만, 이런것 못지않게 이름도 좋은 의미를 갖게끔 잘 지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에서는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베풀면서 이름을 지어준다고 합니다.

그때 위대한 신앙의 선조들의 이름을 따서 붙여 주는데, 그 이유는 자라면서 그 이름의 인물을 사모하고 본을 받도록 하려는 교육적인 배려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와같이 삭개오란 이름은 매우 의미있고, 좋은 뜻을 가진 이름임에 틀림없으나, 그의 실제 삶의 모습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삭개오의 삶을 조명해 보기에 앞서, 우리의 신앙생활의 모습을 뒤돌아 보기를 원합니다.

주일마다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며, 남 보기에는 열심히 봉사하며 섬기며, 경건한 삶을 사는 것 같지만, 만약에 실제적인 삶의 행태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삭개오의 삶의 모습과 유사하거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면,

이 시간 주신 말씀을 통해, 그 당시 많은 사람들로 부터 비난 받고, 멸시 받던, 죄인 삭개오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그의 소원을 이루며, 은혜의 주인공이 될수 있었는지 살펴보면서, 우리들도 이제는 헛된 경건의 모양을 붙들고 그것이 대단한 믿음인양 자랑하지 말고, 거룩하고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으로 새롭게 변화되어, 삶속에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고 보여지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입니다.

 

첫째, 삭개오는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는 기대와 열망이 있었습니다.

1절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기필코 그 분을 만나 보아야 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전도서 3장을 보게되면,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16절에서는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세월은 주어진 기회나 시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기회는 항상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시간이나 기회를 소중하게 여기고 잘 활용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문이 닫힌 후에는, 또 열려지지 않으므로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수 없기 때문 입니다.

3절말씀을 보면,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그 당시 구세주로 오신 우리 예수님은 '죄인과 세리의 친구다'라고 소문이 있었기 때문에, 세리장이었던 삭개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이 남 달리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도데체 어떠한 분 이신가? 예수님에 대한 강렬한 기대와 열망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몹시도 보고자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사모하며, 간절한 기대와 열망이 있는 자에게 만족을 주신다,고 시편 107편 9절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둘째, 삭개오는 환경의 악조건을 극복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삭개오의 키가 작고, 너무 많은 사람들 때문에, 그렇게 보기를 열망하던 예수님을 볼수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3절에 보니까, “키가작고, 사람이 많아” 여기 라는 말은 원문으로 ‘헬리키아’인데 ‘나이’로도 번역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어린아이의 나이를 가르킵니다.

즉 삭개오의 키는, 어린 어린이와 같이 작았다는 말입니다. 키 작은 사람의 설움이 얼마나 큰지, 키 작은 사람만이 압니다. 그래서 키가 작은 사람은 무슨 일을 할때, 처음부터 아얘 포기하든지, 아니면 반대로 누구보다 모질고 독한 마음을 가지고 극복하려고 애씁니다.

역사를 살펴보며, 나폴레온이나 등소평은 아주 키가 작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비록 단신의 체구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다른 의지와 노력으로 역사에 남는 훌륭한 인물이 되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삭개오도 마찬가지 입니다. 비록 그의 키가 어린아이와 같이 작았지만, 성경에 구원받은 인물로 기록되는 영광을 갖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키가 작다 것은 선천적으로 여건이 불리한 점을 가르키고 있다면, 반면에 사람이 많아서 불리했던 것은 후천적인 환경의 열악함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삭개오는 모든 환경의 악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세상적인 명예와 체면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보겠다는 열정 하나만으로, 돌무화과나무(뽕나무)에 올라 갔습니다.

삭개오가 이와같이 열정을 가지고, 환경을 극복하며, 노력했을 때, 5절에 보니까,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라고 예수님이 친히 그의 이름을 불러주시며, 그의 집에 머무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할레루야,

시편 50편15절을 보면, "환란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우리가 그 무언가 성취하려고 하면, 때론 많은 환란과 어려운 환경이 이를 방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면, 역사속의 어느 인물 못지 않게 위대한 결과를 만들어 낼수 있음을 우리는 배울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삭개오는 철저한 희생과 헌신이 있었습니다.

8절을 보면, 삭개오가 주님을 만났을 때, 그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행함이 있는 믿음 입니다. 참된 구원은 이처럼 실생활의 변화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도,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말고, '진실함과 행함'으로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철저한 자기 희생과 헌신이 없이는 불가능 한 것입니다.

여러분, 헌신과 희생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나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는것이요, 상대방을 존중하고 자신이 할수 있는 최선을 다해 섬기며, 수고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뽕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를 부르시며, 그의 집에 머물겠다고 말씀하실 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수군 거리며, 비난하고 있지만, 주님은 사랑과 은혜를 죄인 삭개오에게 베풀고 계십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과 은혜로 삭개오는, 그의 죄를 용서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가, 9절에서는 재산을 포기하고, 진심으로 회개한 삭개오에게, 이제는 구원의 복과 아울러,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녀가되는 은혜도 허락되었음을 볼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세리장 삭개오는 세상 속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것을 가졌으나, 진정한 자기 인생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예수님과의 '인격적이고, 실존적인 만남'을 통해서, 구원과 생활의 변화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다 해결됩니다.

주님과의 만남은, 우리의 인격과 삶을 새롭게 변화 시킵니다, 왜냐하면 주님 안에서만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의 생명이 결합하는, 신적 생명(divine life)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삭개오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남으로, 세상에서 자랑하던 헛된 경건의 모양을 내려놓고, 새롭게 변화되어, 영육간에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고 보여지는, 은혜와 믿음의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