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10:13)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Everyday, people who encounter miracles,,,

** 생수의 강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에베소서 5장 18-21절 )

Andy1954 2023. 11. 27. 12:35

 

오늘 본문은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 가운데 일부분입니다. 

그 당시 에베소는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 서부 지역에서 가장 큰 항구 도시였습니다. 

그곳에는 '풍요의 여신'이라고 불리는, '아데미(Artemis)'를 섬기는 신전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9장28절을 보면,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분이 가득하여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아데미 신전은 고대세계의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여겨질 만큼 매우 웅장했습니다. 

당시 에베소 사람들은 이 신전에 올라가 아데미에게 풍요의 삶을 기원하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당시의 이방 종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나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사를 지내는 자들이 제사 행위와 아울러서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그들은 자기들이 믿는 신과 접촉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도행전 2장 4절 말씀을 보면,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 충만함으로 인하여 방언을 하게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12-13절 말씀을 보게되면,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방언으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새 술에 취한 것이라고 조롱했습니다. 

그 당시의 이방 신전에서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튼 그 당시의 이방인들에게는, 술에 취하는 것이 하나의 종교 행위였습니다. 

에 취하고 나면 그 뒤를 이어서 온갖 방탕한 일들이 자연스럽게 따라왔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배경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당부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하나님의 자녀들 곧 성도들은 이방인들과 다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전에 올라 새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자신을 낮추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성도들은 예배를 통하여 늘 성령의 충만을 받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는 이 말씀은 현재 명령형입니다. 어제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았더라도, 

오늘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매순간 계속해서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항시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30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또, 데살로니가 전서 5장19절에도, "성령을 소멸치 말며'

이와 같이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지 않으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근심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안에 있는 성령님의 역사는 소멸되고 맙니다. 

그 결과 우리는 성도로서 능력 있는 삶을 살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는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술에 취하는 것과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을 서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술에 취했을 때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성령의 충만을 받았을 때의 모습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술에 취하면, 술이 그 사람을 지배합니다. 

성령 충만의 원리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성령님께서 다스리시고,

지배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님이 우리의 삶을 온전히 주관하십니다. 

누가 4장1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가 1장12절에서도,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예수님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에게 이끌리셨습니다. 

이를 좀더 강하게 표현하면, 예수님은 성령에게 몰아내심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며, 성령님의 몰아내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밝히 이해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곧, 이어서 오늘 본문은 성령 충만의 결과 세 가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성령님은, 우리에게 새 노래를 심어주십니다. 

둘째, 성령님은,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게 하십니다. 

째, 성령님은, 피차 복종하게 하십니다. 

 

첫째로, 성령님은, 우리에게 새 노래를 심어주십니다.

에베소서 5장19절을 보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을 때 나타나는, 첫 번째 현상은 무엇입니까? 

산을 옮길 만큼 큰 믿음이 우리에게 생기는 것입니까? 

렇지 않으면 천사의 말로 방언을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우리에게 새 노래를 부르게 하십니다. 

말씀에 따라서 이 사실을 차례대로 살펴봅니다.

 

(1)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여기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은 성령의 충만을 받은 

사람이 부르는 “새 노래”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입술에 “새 노래”를 심어주십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심어주시는 “새 노래”가 바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시와 찬미와 노래 이 세 가지 용어를 억지로 구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 드리는 시가 곧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며 또한 이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부르는 신령한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새 노래”라는 용어가 모두 아홉 번 사용되었습니다. 

시편에 6번, 이사야서에 1번,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2번 사용되었습니다. 

“새 노래”는 언제나 구원받은 성도들에 의해서만 불려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처럼 신령치 못한 노래들 방탕한 노래들을 즐기지 맙시다. 

우리 모두 성령의 충만을 받아 성령님이 우리에게 심어주신 새 노래, 

곧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늘,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기를 바랍니다.

 

(2) “서로 화답하며” 우리는 새 노래로 서로 화답해야 합니다. 

여기서의 “서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 곧 구속함을 얻은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말하자면, 성도들은 새 노래로 서로 화답하면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새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불신자들 들으라고 새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새 노래를 부르는 것은 오직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는 찬양이 전도용으로 사용된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라고 언제나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을 노래하라는 말씀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찬양을 불신자에게 들려주어서 전도하겠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부르는 새 노래가 불신자들의 관심을 끌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찬양은 성도들 사이에 서로 화답하면서, 오로지 하나님에게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3) “너희의 마음으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 새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우리가 새 노래를 부르는 것은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충만을 받지 못한 사람이 부르는 노래는 마음으로 부르는 새 노래가 아니라

입술로만 부르는 외식하는 노래일 뿐입니다.

찬양은 마음으로 부르는 것이지 입술로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렁찬 목소리나 아름다운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가 음악적으로는 완벽할는지 몰라도,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한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면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하나님에게 드리는 찬양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드리는 거룩한 찬양을 값싼 상품으로 전락시키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이 부르는 노래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는 못합니다. 

 

아모스 5장 23절 말씀을 보면,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입술로만 부르는 노래를 결코 기뻐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새 노래를 하나님께 올려드리기를 바랍니다. 

 

(4) “주께” 물론 우리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간에 화답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아 우리의 마음으로 부르는 새 노래를 궁극적으로 받으셔야 할

분은 누구이십니까?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삼상16장 23절에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1) 상쾌하여 2) 낫고 3)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

이와 같이 다윗이 신령한 노래를 연주할 때, 사울은 삼중의 효과를 얻었습니다. 

정신적으로는 마음이 상쾌하여졌습니다. 육체적으로는 몸이 나았습니다. 

영적으로는 악신이 그에게서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찬양을 통해서 얻게 된 부수적인 효과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찬양은 우리 자신의 만족을 꾀하기 위해서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찬양의 목적은 우리 자신이 인기를 얻기 위한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기위한것도

아닙니다. 찬양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데 있습니다.

따라 우리가 혼자서 찬양을 하든지, 찬양대에서 단체로 찬양을 부르든지, 온 회중이 다함께 찬양을

드리든지 간에, 우리의 시선은 오직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르는 새 노래를 기쁘게 받으셔야 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5) “노래하며 찬송하며” 새 노래를 하나님에게 올려드리는 방법이 두 가지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첫째, “노래하며”는 이는 육성으로 노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찬송하며”라는 단어의 본래의 뜻은 악기를 이용해서 찬양하는 을 의미합니다.

대하5장 13절에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가 일제히 소리를 발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솔로몬 왕 때에,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그곳에는 육성으로 노래하는 자도 있었고, 또한 악기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성령 충만한 마음으로 드리는 노래와 찬송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도 성령의 충만을 받아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우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함으로서 예배를 드릴 때마다, 이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게 하십니다.

에베소서 5장 20절에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게 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이는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 20절은 성령 충만의 결과로 나타나는 감사의 삶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씀에 따라서 감사의 원리를 네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1) “범사에”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은 사람만이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령의 충만을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은 사람만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기 때문입니다.

욥기1장21절에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니이다

하고"  욥은 하나님이 주실 때도 감사했습니다. 

반면에 욥은 하나님이 취하여 가져가실 때도 역시 감사했습니다. 

이와 같이 욥이 범사에 감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와는 달리 성령의 충만을 받지 않은 사람은 범사에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마음이 교만해서, 자기가 항상 더 많은 것을 누려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성령의 충만을 받지 않은 사람은 범사에 불평하며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이 감사하지 않는 것은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감사할 일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

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고후4장 15절에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이와 같이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우리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하여 하신다는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그러기에 성령 충만한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성령의 충만을 받읍시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심을 깨닫고 범사에 감사합시다. 

그리해서 범사에 드려지는 우리의 감사로 하나님께 늘 영광을 돌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요한 14장 13절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에게 기도할 때도,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에게 기도하면, 예수님이 친히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것이 됩니다.

히브리서 2장 12절에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여기에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문맥상 이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하반부에서, 예수님은 그 자신이 친히 교회 중에서, 곧 성도들이 모인 곳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성령 충만한 맘으로 하나님을 찬송할 때, 예수님은 우리를 통해서 그 자신이 친히

하나님을 찬송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행하시는 중보의 역할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때도,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시게 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이 드리는 감사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3) “항상”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아울러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우리는 항상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는 때와 관련해서, 성경에는 세 종류의 감사가 등장합니다. 

 

첫째, 은혜를 받고 난 후에 비로소 드리는 감사가 있습니다.

누가 17장 15-16절에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의 문둥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이에 따라 그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에게 돌아와서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했습니다. 

이와 같이 은혜를 받고 난 후에, 비로소 감사를 드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둘째, 은혜를 받기 전에 미리 드리는 감사가 있습니다.

대하20장 21절에 "백성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

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유다 왕 여호사밧 시대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여호사밧은 전쟁에 나가기 앞서서,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하나님에게 감사의 찬송을 드리게

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먼저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구했던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들이 미리 드리는 감사를 받으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 결과 유다 백성들은 싸우지도 않고,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베푸실 은혜를 바라보며 먼저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셋째, 항상 드리는 감사가 있습니다.

다니엘 6장 10절에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니엘이 곤경에 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전에 하던 그대로 변함없이 하나님에게 감사하였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상황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은 감사를 받으셔야 할 분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의 경우에서, 은혜를 받고 난 후에 드리는 감사는 가장 기본적인 수준입니다. 

은혜를 받기 전에 미리 드리는 감사는 조금 더 영적으로 성숙한 수준입니다. 

그러나 가장 높은 수준의 감사는 항상 드리는 감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수준은 어떠합니까? 우리 모두 성령의 충만을 받읍시다. 

그리해서 우리도 다니엘과 같이, 우리의 형편이나 처지와는 상관없이 항상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여기에 하나님을 가리켜서 아버지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이시며,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이는 성령님이 그 사실을 증거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16절에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그러면 왜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려야 합니까?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드리는 감사를 받으셔야 할 분도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에베소서 1장3절에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야고보서 1장17절에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

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물론 우리가 사람들에게서 좋은 선물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쓰임을 받은 도구에 불과합니다. 

우리에게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실제로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에게 궁극적인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감사의 원리가 무엇인가를 깨달았습니다. 

첫째,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둘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셋째,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넷째,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충만을 받읍시다. 

그리해서 우리 모두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우리가 드리는 감사로 하나님에게 큰 영광을 돌리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셋째로,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피차 복종하게 하십니다.

에베소서 5장 21절에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성령 충만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첫째, 안으로는 새 노래가 넘쳐흐르게 됩니다. 둘째, 위로는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 옆으로는 피차에 복종하게 됩니다. 

그러면 피차 복종하는 삶에 대해서, 말씀에 따라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갑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떠한 본을 보여주셨습니까?

빌립보서 2장6-8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와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사람은 늘 자신을 낮추며 즐겨 다른 사람들에게 복종하는 삶을 삽니다.

(2) “피차 복종하라”

성령님은 우리 모두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성도들로 이루어진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는 지체들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12장 5절 "이와 같이 우리 많은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에베소서 4장 3절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우리 몸에는 여러 지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결코 서로 다투지 않습니다. 

언제나 피차 복종합니다. 이 원리는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는 결코 다투지 말고, 피차에 복종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3절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갈라디아서 5장 13절 "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일 각자가 이기적인 마음으로 다른 지체에게서 섬김만 받으려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 단 한 사람에게서만 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 모두가 약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피차 복종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섬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수많은 사람의 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자연히 우리 모두가 든든히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충만을 받아,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본문과 같은 내용을 담고있는 골로새서는 성령의 충만에 대해서 이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골로새서의 말씀을 통해서 성령 충만한 삶의 비결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늘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며 삽시다. 이와 같은 순종과 결단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삶을 책임지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충만을 받읍시다. 그리해서 이제부터는 날마다 새 노래로 찬양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피차에 복종함으로서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의 복된 삶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