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10:13)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Everyday, people who encounter miracles,,,

**산상수훈·마태5-7장

믿음이 부족한 자들이 하는 염려 (마태 6장 25-30절)

Andy1954 2024. 8. 24. 03:07

본문 마태 6장 25∼30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

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

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1620년 영국의 청교도들이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건너갔습니다. 

배를 타고 가는 도중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최종적으로 미국 땅에 도착한

사람은 남자가 78명 여자가 24명 합계 102명이었습니다. 나중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뉴욕의

맨하탄에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102층으로 지어진 것은 너무나도 잘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살아남은 102명도 대부분 도시 출신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농사짓는 방법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생이 심했겠습니까? 그들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어 이 어려움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옵소서” 라고 금식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또다시 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다시금 금식기도를 해야 될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모인 사람가운데 한사람이 뜻밖에도 이러한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힘들

때마다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한번쯤 우리의 생각을 바꿔보는게 어떨까 생각

합니다. 물론 영국에서 살 때보다도 형편이 힘들고 어려워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할 조건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신앙의 자유와 정치의 자유도 있습니다. 또 우리의 앞에는 광활한 대지가 펼쳐져

있습니다. 얼마든지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금식을 선포하지 말고 차라리 감사를

선포하십시다. 감사의 주간을 정하고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더많은 더큰 더깊은 감사를

하나님께 드려보면 어떻겠습니까?” 그의 말에 모두가 깊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대신에 감사주간을 선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하나님

께 깊은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그들이 감사주일을 지키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6절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염려하지 말고 감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염려에서 벗어날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감사입니다. 

우리가 감사할때 모든 염려에서 출애굽 할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영국의 작가 '다니엘 디포' 가 쓴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주인공이 탔던 배가 파손이 되는 바람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다 죽었습니다. 오직 그만이 홀로 살아

남아서 무인도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려 28년 동안 살았습니다.

어떻게 무인도에서 홀로 28년 동안이나 살 수가 있겠습니까? 28년이나 버틸수 있는 정신력이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한마디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기에 그것이 가능했다는 사실

입니다. “하필이면 내게 이런 불행한 일이 생겼다는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죽었지만 그래도 나는 죽지 않고 살아 남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감사했습니다. 

 

아무도없는 무인도였습니다. 그러나 마음껏 따먹을수 있는 과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습니다. 

어디에서도 옷을 구할수 없었으나 옷을 입지 않고도 살아갈수 있을만큼 날씨가 따뜻하다는 사실에

감사했습니다. 그에게는 총 한 자루 외에는 변변한 무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섬 안에는 자기를

해칠만한 짐승이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또한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무인도에 홀로 남은 사람이 아니라 감사할 조건을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라는 귀한 사실을 깨달았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오늘 본문은 '염려하지 말라' 는 교훈으로 잘 알려져 있는 말씀입니다. 

“염려하지 말라.”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하면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염려하지 않아도 될 여러 가지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조건들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지난 날의 형식적인 감사 습관적인 감사

억지로 드리는 감사가 반복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감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어떠한지 세 가지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째로, 우리에게는 '에벤에셀의 은혜' 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호흡하고 있는것도 건강한 몸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도 전적으로 다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순간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해

주신 에벤에셀의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25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오늘 말씀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앞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사람이 두주인을 섬기지 못할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여기며 저를 경히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재물을 섬깁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이 재물을 섬기는 세상 사람들처럼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염려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입니다. 

요즘은 세상은 모든 것이 풍부해서 먹고 마실 것 입을 것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만 해도 사정이 달랐습니다. 이스라엘의 우기는 겨울철인데 우기인 겨울철에

비가 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산에는 눈이 쌓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름 농사철이 되어도 개울에 물이 흐르지 않아 농사짓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때로는 마실 물 찾기도 어렵고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하니까 형편이 어려울수 밖에 없습니다. 

형편이 그렇다보니 먹을것 마실것 입을것을 염려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러한 것들에대해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25절 하반부 말씀입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하나님은 우리에게 음식보다도 더 중한 목숨을 지켜주셨으며 의복보다도

더 중요한 몸과 건강을 지켜주셨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먹을 음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몸을 유지할수 있는것 또한 하나님이 우리의 몸을 따뜻하게 할수 있는

의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가 그러했습니다. 창고에 곡식이 가득 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영혼을 도로 불러가 버리셨습니다. 그러니 곡식이 창고에 가득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아무리 비싸고 좋은 옷이 많이 있다한들 건강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병원에 가보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입원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한 벌의 환자복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과 건강을 지켜주셨습니다. 이 한 가지만 생각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간혹 밤에 잠이 오지 않아서 힘들때가 있습니다. 왜 밤에 잠이 오지

않습니까? 커피를 많이 마셨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사실 커피때문이라기 보다는 신경이 쓰이는

문제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문제를 잊고 푹 잤으면 좋겠는데 머리에 맴돌면서 떠나지를

않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계속해서 그 생각에 빨려 들기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엎치락

뒤치락 하게 됩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합니까? 어떤 사람은 이럴 때 잠을 청하기 위해서 숫자를 세기도 합니다. 

“하나, 둘, 셋, 넷…” 계속해서 숫자를 세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잠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이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숫자를 세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잊으려고 했던 그 문제에 다시금 빨려 들어가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때는 한 번 염려를 감사로 바꾸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두운 생각을 밝은 생각으로 바꾸어보는 것입니다. 예컨대 아들 때문에 걱정이 되십니까? 

그래도 딸아이는 건강하고 착하고 예쁘게 잘 자라고 있음을 생각하면서 감사해 보십시오. 

돈 때문에 걱정이 되십니까? 과거에 더 어려운 때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서 그 어려움을 이길

있도록 도와주셨음을 생각하면서 감사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번에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길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 속에 고요와 평안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달콤한 잠에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에벤에셀의 은혜' 로 지금까지 우리를 지켜주셨습니다. 

우리의 목숨을 위해서 필요한 음식을 허락해 주셨으며  건강을 위해서 입을 옷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에벤에셀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할 줄 아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에게는 '임마누엘의 은혜' 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임마누엘되시는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고아처럼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불꽂같이 지켜

주시고 눈동자와 같이 보호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 두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산상설교 가운데 한 부분으로 예수님은 지금 산 위에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아마도 공중에는 새들이 날고 있었을 것이며 들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새들을 가리키면서 공중의 새를 보라고 말씀하셨으며 들에 피어있는 꽃들을 가리키면서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지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공중의 새에 대한 예를 들어주셨습니다. 26절 말씀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않고 거두지도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않습니다. 이와 같이 공중의 새는

농사를 짓지 않지만 결코 염려하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즐겁게 노래를 부르면서 잘 살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26절 하반부에 보니까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언제나 섭리하시

면서 돌보고 계십니다. 새들이 자라는데 필요한 풀을 키워주시고 먹이가 되는 곤충이나 벌레를 길러

주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새들이 살아갈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26절 끝부분에 보니까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라고 했습니다. 

누가 12장 24절에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으나 거기서는 “공중의 새”가 “까마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까마귀는 어떤 새입니까?  레위기 11장에 보면 까마귀는 가증히 여기도록 되어 있는

새입니다. 부정한 새입니다 그 보잘 것 없고 가증히 여기는 새 한 마리까지도 하나님은 잊지 않고

먹이십니다. 하물며 우리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렇다면 공중의 새를 먹이시는 하나님이 그 자녀들인 우리를 왜 먹이지 않으시겠습니까? 

 

예수님의 공중의 새에 이어서 들의 백합화를 예로 들어서 설명하셨습니다. 

28절 말씀입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예수님 당시만 하더라도 옷 한 벌 해 입기가 정말 어려운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는 사람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요즘은 어떻습니까? 

한 두 번 입고 나서 집안에 걸어놓은 옷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옷이 너무 흔합니다. 흔하다 못해 

차고 넘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면서 살아간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들의 백합화는 “수고도 아니하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들의 백합화는 꽃의 색깔을 무엇으로 하며 모양을 어떻게 할 것인가 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들의 백합화는 “길쌈”도 하지 않습니다. 덜컹 덜컹 소리내면서 옷감을 짜는 일도 없습니다. 

옷감이 남는다고 해서 가위로 옷감을 잘라내는 법도 없고 옷감이 모자란다고 해서 실로 기우는 일도

없습니다. 그 자체로 완벽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29절에서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역대 왕들 가운데서 가장

많은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왕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었겠습니까?

그러나 솔로몬이 입은 아름다운 옷들도 들의 백합화의 아름다움에는 견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입은 옷은 아무리 잘 만든다 할지라도 바느질한 흔적이 있습니다. 

또 몇 번 입고 나면 구겨지기도 하고 색깔은 변하게 됩니다. 그러나 꽃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30절 말씀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들의 백합화는 하루살이 들풀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할지라도 그 다음날이 되면

시들어버리고 맙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그런 마른 들풀들을 거두어다가 떡을 굽는 땔감으로

이용했습니다. 이처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하루살이 들풀조차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

시고 아름답게 입히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루살이 인생이 결코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들입니다.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아버지와 더불어서 영원토록 살아갈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예수님의 메세지는 무엇입니까?

공중의 새를 보면서 들의 백합화를 바라보면서 염려에 빠져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보다 못한 공중의 새를 먹이시며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는데 하물며 그 사랑 받는 자녀들인

우리를 왜 돌보지 않으시겠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30절에서 “믿음이 적은 자들아.” 

이렇게 책망하고 계십니다. 왜 우리가 염려합니까?  오늘도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셔서 눈동자와

같이 보호해 주신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믿음과 염려는 반비례합니다. 믿음이 깊어지면 염려는 얕아집니다. 

그러나 믿음이 얕아지면 염려는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믿음과 감사는 정비례합니다. 

믿음이 커지면감사도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적어지면 감사도 적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감사가 부족합니까? 세상 염려로 가득차 있습니까? 한마디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눈동자처럼 지켜주시고 돌보아주신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감사하실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믿음은 깊어질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에게는 '여호와이레의 은혜' 가 있습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은 지금까지 우리를 인도해 주셨으며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27절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여기에서의 는 우리의 신장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원문상에는 우리의 수명 곧 '생명의 길이' 를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에는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생명을

일각이나 더 하겠느냐.”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모든것을 섭리하시며 우리의 앞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한 목자가 되셔서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우리를 푸른

초장의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염려대신 감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일 일을 염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소망이 없기 때문에 늘 세상 염려속에 싸여서

살아갑니다. 

 

베드로는 벧전5장 7절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이렇게 기록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돌보심”이라는 말은 책임진다는 뜻입니다. 

영어로 하면 “take care” 로 돌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앞날을 돌보아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예비하시고 

앞서 가시면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벤에셀의 은혜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임마누엘의 은혜하나님은 오늘도 함께 하시면서 눈동자처럼 지켜주고 계십니다. 

여호와이레의 은혜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발걸음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고 누림으로 마음 속에 있는 모든 근심 걱정 염려가

사라지고 우리 영혼속에 감사와 찬양으로 가득 채워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