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10:13)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Everyday, people who encounter miracles,,,

**산상수훈·마태5-7장

관심사, (마태 6장 31-34절)

Andy1954 2023. 4. 1. 11:54

마태 6장 31∼34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주후 10세기경, 대주교로서, 수도원의 원장으로서, 많은 존경을 받았던 '성 브루노' 라는

훌륭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 수도사로서 수련에 전념하기위해, 인적이 없는, 깊은 시골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한적한 곳을 찾아서, 작은 텐트를 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했습니다. 

어느덧 저녁이 되어, 등불을 켰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텐트 밖에서, 개구리들이 개굴개굴 울기 시작했습니다. 개구리들의 울음소리 때문에,

도무지 기도에 집중 할수 없었습니다. 그는 움막 밖으로 나와서, 개구리들을 향해서 고함을

질렀습니다. “야. 이 녀석들아, 수도사가 기도하는데, 왜 이리 시끄럽게 울어데느냐? 

너희들 때문에, 내가 기도를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좀 조용히 해라. 알아 들었느냐?”

그러자 개구리들은 마치, 알아들었다는 듯이, 일제히 잠잠해졌습니다. 

그래서 브루노는 텐트에 들어가, 다시, 하던 기도를 계속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이번에는 언덕 너머에 있는 개구리들까지도, 다 깨어나서

더 시끄럽게, 울어대는 것이었습니다. 브루노는 다시 천막 밖으로 나와서, 더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개구리들은 다시금 잠잠해졌습니다. 

그가 천막 속으로 들어가서 기도하려고 하면, 개구리들은 또 다시, 울어대기 시작했습니다. 

브루노는 나오고 들어가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급기야 너무나도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자기의 심경을 토로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좀 더 깊은 기도를 하기 위해서, 이렇게 인적이 드문 시골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저 개구리들의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제가 도저히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저 개구리들의 입을, 좀 막아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그때 그의 머리 속을 스쳐가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왜, 너 혼자서만 기도한다고 생각하느냐? 저 개구리들을, 누가 만들었는지 생각해 보아라. 

혼자서만 기도한다고 하지 말고, 저 개구리들과 더불어서, 함께 기도하며, 찬양한다고

생각하면 안되겠느냐?” 브루노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 혼자만, 기도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개구리들이 함께 기도하고, 함께 찬송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감격에 찬 음성으로, 개구리들을 향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 개구리들이여. 이제부터 우리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십시다. 마음껏 소리 높여,

하나님께 찬송하십시다.” 그랬더니 개구리들이, 그 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는 듯이,

더 큰 소리로, 개굴개굴 거리면서 울어대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이야기를 조용히, 생각해 보면, 개구리의 울음 소리가 변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개구리들의 울음소리를 듣는, 수도사의 시각과 관점, 즉, 마음가짐이 달라진 것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고질적인 문제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든지, 그저 자신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해석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기 보다는, 그저 나의 주장, 나의 고집만을

내세우면서, 그것을 관철시키려고 할 때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자신의 일을 하면서도, 마치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처럼, 착각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세우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의 의를 고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를 허물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들의 의가, 온전한 것처럼 주장을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기들의 의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마저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관심사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한 마디로 우리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간단하게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31∼32절에서는, 세상 사람들의, 관심사입니다. 

둘째로, 33절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의, 관심사입니다. 

셋째로, 34절에서는, 우리의 삶의 자세입니다.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첫째로, 세상 사람들의 관심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31∼32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여기서 이방인이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들, 곧 세상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에,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돌보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자기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그들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대해서 염려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있어야 할,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또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 사실을 마태 6장 7∼8절에서도 밝히신바 있습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이방인들은, 자기 신들에게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면서 말을 많이 합니다. 그들의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를 해결함 받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괜한 헛수고 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돌보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 된,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지시고 돌보아주십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 단순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서, 어리석게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스스로 구하며, 고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의 관심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33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예수님은, 우리의 관심사가 그의 나라와 그의 의, 곧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있어야 함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사도 바울의 삶을, 예로 들어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셋째 하늘, 곧 낙원에 이끌려 갔던 사람입니다. 

그곳에서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자기의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그때부터 오직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쳤습니다. 

그가 세 번째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 많은 사람들이 말렸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생명이 위태롭습니다.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지금 벼르고 있습니다. 그때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 바울의 관심은, 오직 한 가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죽고 사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8절에서,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생각하면, 이 세상의 것들은

너무나 보잘것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잠시 잠깐동안,

이 세상에서 받는 고난들은, 언제라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더불어서, 영원토록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아갈 자녀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심도, 하나님 나라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저 잠시 머물다 가는,

이 세상에, 우리의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관심이, 하나님의 의에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뗄래야 뗄 수가 없습니다. 

누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받은 자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음을, 마태 5장 20절에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서는, 천국백성이 될수 없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더럽고, 냄새 나는, 인간적인 의를 가지고서는,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저 옛날에, 바보 삼 형제가 살았습니다. 하루는 이들 삼 형제가,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여행 도중, 어느 동굴 입구에 이르렀습니다. 그 동굴의 입구에는, 이러한 팻말이

쓰여있었습니다. 

“이곳은 침묵의 동굴입니다. 이 안에서는 절대로 말하지 마십시오. 말하면 죽습니다.” 

그들 삼 형제는 동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첫째는 아무래도 동생들 때문에,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동생들에게, 이렇게 주의를 주었습니다.

“얘들아, 이 속에서는 말하면 죽는다. 그러니 절대로 말하지 말아라.” 그 말과 함께

첫째는 쓰러져서 죽고 말았습니다. 둘째가 그 모습을 보면서, 막내에게 주의를 주었습니다.

“너, 봤지? 말하면 저렇게 죽는거야, 그러니까 너는 말하지 말아라.” 둘째도 죽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셋째는 혼자서 중얼거렸습니다. “나는 아무런 말도 안 했어.” 

결국 셋째도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답답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무식한 사람입니다. 

무식하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경우 없이, 무슨 일이든지 하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자신의 고집까지 더하면, 이보다 골치 아픈 일은 없습니다. 

무조건, 자기만이 옳습니다. 그 옛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무조건 자기들만 옳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헐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마저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자기들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천국 문 앞에 서서,

다른 사람들조차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들은 화를 받아, 마땅한 자들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에 있어야 하고, 언제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럴때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어느 선교사님이, 중동에서, 40년 동안 복음을 전하고서, 은퇴를 하신 분이었습니다. 

어느날, 기자들은 선교사에게, 이러한 질문을 했습니다.

“선교사님, 40여년동안 모슬렘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느라,고 얼마나 애쓰셨습니까? 

그동안 선교사님을 후원한, 선교단체는 어디였습니까?”

그들의 기사에, 선교사님을 후원한 단체의 이름을, 올리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선교사님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를 후원해준 단체는, 마태 6장 33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저는 이 말씀을 붙들고, 중동지역으로 갔습니다. 

저는 지난 40년 동안,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만, 구하기 위해서 힘썼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내 모든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한 번도 굶어본 적이 없으며, 옷이 없어서, 헐벗어 본 적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 모든 필요를 아시고, 때를 따라 도우시는 은혜로, 다 채워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필요를 다 아시고 채워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의 삶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살펴봅니다. 

34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위 문장은 세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입니다. 

우리는, 오늘 일도, 염려하지 말아야 되겠지만, 내일 일 또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 말씀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돌보아주신 것처럼, 앞으로도 돌보아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돌보심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둘째 문장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둘째,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일 일은, 내일 가서 염려해도, 괜찮다는 뜻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영어성경은 이 말씀을, “For tomorrow will worry about itself,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내일 일은, 내일 그 자신이, 스스로 염려할 것이기 때문이니라.” 라는 뜻입니다.

원문에는, 내일이라는 단어가 의인화되어 있습니다. 내일 일은, 내일이 알아서 스스로

처리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기까지, 우리를 돌보아주신 에벤에셀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우리의 모든 필요한 것을 예비하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일 일을 위해서,

조금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도 돌보는 사람 없이, 홀로 살아가는 할머니 권사가 한분이 있었습니다. 

권사님은 가난했지만, 늘 밝고, 환한 얼굴로, 기쁨으로 살았습니다. 

하루는 목사님이 심방을 갔습니다. 목사님은 권사님를 보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권사님, 저는 자주 찾아뵙지는 못하지만, 예수님이 날마다 찾아와주시니까, 괜찮으시죠?

그러자 권사님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아니요. 틀린 말씀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은 아무래도, 권사님께서 귀가 어두워서, 잘 못 들으신 줄 알고,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권사님, 예수님이 날마다 이곳을 찾아와주시니까, 괜찮으시죠?”

그때 할머니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다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틀린 말씀이라니까요. 예수님은 날마다 나를 찾아와주시는 분이 아니라, 여기서

나와 함께, 살고 계신 분이시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은, 결코 내일 일을 위해서 염려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주님과 더불어, 날마다, 매순간 마다,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셋째,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입니다. 

우리의 삶이, 늘 평탄한것만은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고난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때로는 고난이 주는 유익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한 날의 괴로움” 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결코 “한 날의 염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당하든지,

염려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미국의 패러마운트 영화사는, 할리우드 최초의 영화제작 회사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십계,」 「왕중왕」같은 영화가, 바로 이 영화사에서 제작되었습니다. 

그 영화사를 이끌었던, '셰리 랜싱' 회장의, 유명한 좌우명이 있습니다.

“결과를 염려하지 말고, 일하는 과정을 즐기자.” 그는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이 잘될 것인가,

잘못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자신은 물론, 부하 직원들에게도,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도록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나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들은 일하는 과정 자체를 즐기며,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근심, 걱정, 염려가 가득 쌓여 있다면, 우리의 마음이 비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눈동자와 같이 보호해주시고, 불꽂같이 지켜주신다는, 

믿음의 확신을 가지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힘써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때에,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뿐만 아니라, 때를 따라 도우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와 복을, 날마다 풍성히 받고, 누릴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