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10:13)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Everyday, people who encounter miracles,,,

**산상수훈·마태5-7장

눈속의 들보와 티 (마태 7장 1-5절)

Andy1954 2024. 8. 29. 03:36

본문 마태 7장 1∼5절 말씀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후에야 밝히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여러해 전에 '가이드포스트' 라는 그리 크지않은 잡지에 어느 아파트에사는 한부인의 이런 체험담

이 실린적이 있습니다. 그 부인은 이따금씩 응접실에 앉아서 커피도 마시고 또는 신문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부인이 사는 아파트는 작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서 건너편

에 있는 아파트와 마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건너편 아파트의 응접실이 육안으로도

보이곤 했습니다. 그리고 본의아니게 건너편 아파트에 사는 부인이 응접실에서 책을 읽거나 뜨개

질을 하는 모습이 이따끔씩 눈에 띄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커피 잔을 들고서 응접실의 소파에 앉았습니다. 

자연히 눈길은 건너편에 있는 아파트로 쏠렸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건너편 아파트에 있는 부인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습니다. 그러자 그 부인은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창문이라도 좀 깨끗하게 닦고 책을 읽든지 뜨개질을 하지, 지저분하게 저게 뭐야? 

곱상하게 생기신 분이 집안 일은 엉망이구먼" 그로부터 몇일이 지난 따뜻한 봄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집안 구석구석을 쓸고 닦으면서 대청소를 했습니다. 

그리고 창문도 깨끗하게 잘 닦았습니다. 그 부인은 청소를 다마치고 난 뒤에 커피 한 잔을 들고 

응접실 소파에 기대어 앉았습니다. 이번에도 그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건너편 집의 응접실로

쏠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건너편 아파트에 사는 부인이 응접실에서 뜨개질을 하고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잘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 부인의 머리에는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

갔습니다. "아, 내가 얼마 전에 저 부인이 집 창문을 제대로 닦지 않아서 잘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

거렸는데 이제 보니까, 내가 우리 집 창문을 제대로 닦지 않아서 그랬었구나. 그러면서 부인은

자신의 경솔함과 남을 판단한것을 깊이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그일이 계기가 되어서 다른 사람을

함부로 비판하거나 판단하지 않기로 다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여 이 부인의 이야기가 우리 자신의 이야기는 아닌지요? 우리 자신의

창문을 제대로 닦지 못하면서 성급하게 다른 사람이 창문을 닦지 않았다고 비난할 때가 있었

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모든 것을 환하게 다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판단

하시는 일에 매우 신중하셨습니다.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을 심판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먼저 어떻게 하셨습니까? 

창세기 11장 5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하나님이 친히 내려오셔서 성읍과 탑을 쌓는 모습을 살펴보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기 전에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창세기 18장 21절을

보게되면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한 것이 어떠하신지 보시기 위하여 내려오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매우 신중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예수님

에게로 끌고가 정죄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 8장 11절에서 그여인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셨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면서 사랑으로 품어주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까지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을 위한 죄사함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정죄하는 자리에 서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며 사랑으로 따뜻하게 품어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 일깨워주시는 교훈입니다.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비판은 하나님의 일이시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비판할 권리가 없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더 큰 허물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도 없습니다.  

셋째로, 우리에게는 자기성찰의 의무가 있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이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우리 마음속에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같은 비판의 태도가 있다면 이시간 성령께서 물리쳐 주시고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사랑과 긍휼로 덮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우리에게는 비판할 권리가 없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예수님은 비판을 금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남을 비판할 권리가 없기때문입니다. 

비판하는 자는 비판을 받기 마련입니다. 비판하는 자는 누구에게서 비판을 받습니까? 

하나님에게서 받게 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비판"이라고 조금 약하게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헬라어의 원어는 단순히 충고나 책망의 차원이 아니고 심판하며 정죄하는 매우 강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심판자가 아니기 때문에 누구도 판단할 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우리 모두는 심판을 받아야 할 대상들입니다. 

그러니 누가 누구를 감히 비판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바로

이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누가복음 18장11절에 나오는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십시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기도를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깍아내리고 비판하느라고 정신이 없었

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부족과 허물을 하나님께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로우심을 

구하는 일에는 전연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깔아뭉갠다고 해서 그만큼 우리가 의로워지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 는 오히려 세리보다 못

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심판자라도 되는 것처럼 자기들의 잣대로 

다른 사람을 함부로 비판하고 정죄했으니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2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예수님은 마태 5장 7절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 때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하심을 받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2장 13절의 말씀처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심은 그대로 우리 자신이 언젠가는 그대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구약성경 에스더에 나오는 하만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는 모르드개를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모르드개를 모함했습니다, 그리고 모르드개를 죽이기 위해서 높이가 50 규빗이나 되는

장대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하만 자신이 그 장대에 매달려 죽어야만 했습니다. 

말하자면 하만은 자기가 비판했던 그 비판으로 자기가 비판을 받은 것입니다.

자기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자기가 헤아림을 받았습니다. 하만은 자기가 모르드개에게

행하려 했던 방식 그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만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도를 해본 사람은 잘 알것입니다. 우리가 한 사람을 전도해서 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얼마나 힘듭니까? 그런데 다른 사람을 함부로 비판해서 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그 사람이 교회를 떠나게 되면 그 엄청난 죄 값을 누가 치르겠습니까? 

예수님은 누가 17장 2절에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찐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교회를 무너뜨리고 성도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은 다 마귀의 궤계 때문입니다. 

서로 비판하면서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줄때 사단 마귀만 좋아합니다. 남을 비판하고 정죄

하는 자는 사단, 마귀의 시험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길이 없게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남을 판단하는 자리에 서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비판할 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비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3∼4절 말씀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목수 일을 하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이런 비유적인 말씀을 들려주신것 같습니다. 

망치질이나 톱질을 하다보면 이따금씩 눈 속에 티가 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또 집을 지을 때는 통나무를 들보로 사용합니다. 들보에 비하면 티는 아주 작은 것입니다. 

반대로 티에 비하면 들보는 엄청나게 큰 것입니다. 큰 허물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작은 허물을

가진 사람을 탓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허물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어찌 다른 사람의 허물을 탓할 수 있겠습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한 여인을 예수님에게로 끌고 왔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그 여인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토록이나 기세 등등했던 그들이 다 돌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하나 둘씩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감히 돌을 던질수 있겠습니까? 실상은 똑같은 죄인들이요 더 큰 허물을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명들을 주셨습니다. 

모든 계명들의 근본(들보)이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위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옆으로는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바로 이 근본(들보)이 되는 사랑을 무시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전연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들이 정해놓은 유전의 작은것 하나라도 어기면 가차없이 비판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보시기에는 그들이 얼마나 가증스러 웠겠습니까?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모습을 4절에서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우리말에도 "가랑잎이 솔잎보고 바스락거린다고 책망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솔잎이 더 시끄럽습니까? 가랑잎이 더 시끄럽습니까? 좀 더 저속한 표현도 있습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무엇이 더 더러운 것입니까? 

 

우리에게는 원칙적으로 다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나름대로 허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 사이에 이런 대화가 있다고 합니다. 

그 두 사람은 서로 간에 허물없이 지내던 그런 사이였습니다. 

하루는 이성계가 무학대사를 좀 놀리고 싶어서 무학대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사 이제 보니까, 대사의 얼굴은 돼지 상이군요." 그러자 무학대사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이렇게

응수했습니다. "전하, 전하의 얼굴은 부처님 상이시군요." 그 소리를 듣고 이성계는 의아스럽게

여기면서 물었습니다. "아니, 대사. 나는 대사를 돼지같이 생겼다고 말했는데, 어떻게 대사는 나를

부처처럼 생겼다고 말하시오?" 그러자 무학대사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야 뻔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가 생긴 대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기 때문

입니다." 자기가 돼지처럼 생겼으니까 다른 사람도 돼지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부처같이 생겼으면 다른 사람도 부처같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가 보입니까? 

실상은 내 눈 속에 들보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이 자꾸 보이면 내게 더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것입니다. 또 누군가가 내게 와서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까?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바르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

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않고 경건하게 신앙생활 한다면 아무도 내게와서 

남의 허물을 전해주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자리에 서서도 안되고 

비판을 듣는 자리에 앉아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에게는 자기성찰의 의무가 있습니다.

계속해서 5절 말씀입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종종 "외식하는 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외식하는자의 '대명사' 였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큰 들보가 박혀 있는 영적 소경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스스로를 의롭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의 잣대로 다른 사람

들을 비판하고 정죄했습니다.

 

본문 5절에 보니까 "먼저""그 후에야"라는 두 단어가 대조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해야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는 것입니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낸다는 것은 자기 성찰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바르게 서지 않고서 어떻게 다른 사람을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이탈리아에 가면 주후 12세기에 세워진 8층 높이의  기울어진 탑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피사의 사탑' 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탑은 세울 때부터 한쪽 기반이

내려앉아 지금도 탑 전체가 수직면에서 5.5도 정도 기울어진 채로 서 있습니다. 

만약 이 피사의 사탑이 삐딱하게 기울어진 시각을 가지고 주변을 바라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기만 똑바로 서있고 세상 전체가 다 삐뚤어졌다고 고집하지 않겠습니까? 

실상은 그 정반대입니다. 자기가 삐뚤어진 것입니다. 

자신의 비딱하게 기울어진 시각으로 바라보면 다 비뚤어진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 옛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바로 이러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들의 눈 속에는 들보가 박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심판자라도 되는

것처럼 자기들의 잣대로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 5장 20절에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는 결코 천국 백성이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는 천국에 들어갈수가 없습니까?

그들의 의는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깔고 뭉개는 '의'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죽이는 '의'이기도 합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어 그를

살려주는 의가 아니라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보고 비판하고 정죄함으로 형제를 죽이는 의입니다. 

그러니 그런 의를 가지고 어떻게 천국 백성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옷입고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어떠합니까?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는 의입니다. 내가 희생하면서 형제를 살려주고

도와주고 세워주는 의입니다. 형제가 눈 속의 티를 긍휼과 사랑의 마음으로 빼내줌으로서 형제를

살려주는 의입니다. 이런 의를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8장24절 이하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아볼로라는 유대인이 있었는데 그는 학문의 도시 알렉산드리아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매우 학문이 깊고 성경에도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은 그가 에베소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에베소 회당에서 열심으로 예수님에 대해 설교를 했습니다. 

그곳에 마침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아볼로의 설교를 들어보니까 

그의 설교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사도 바울과 함께 하면서 복음에 대해서 이미 많은 것을 듣고

알고 있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볼로가 설교하는 것을 들어보니까 그는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알뿐 복음의 진수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아볼로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설교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과시하고 우쭐대고 싶은 심정에서 

사람들 앞에서 아볼로의 설교를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들이 그렇게 했더라면 아볼로의

마음에는 큰 상처가 생기고 말았을 것입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조용히 아볼로를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는 겸손한 태도로 자기들이 사도 바울에게서 들은 복음의 핵심에 대해서 자세하게

풀어 설명해 주었습니다. 아볼로는 기쁜 마음으로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그 뒤로 아볼로는 어디를 가든지 성경으로서 예수님은 그리스도라고 힘써 증거함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적인 유익을 끼치는 훌륭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에게 있었던 사랑과 겸손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첫째로, 우리에게는 비판할 권리가 없습니다. 비판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비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에게는 비판할 자격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더 큰 허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함부로 비판하지 않습니다. 

셋째로, 우리에게는 자기성찰의 의무가 있습니다. 먼저 내 눈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야 합니다. 

그 뒤에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빼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길때 우리도 긍휼히 여김을 받을수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긍휼하심을 받는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