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10:13)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Everyday, people who encounter miracles,,,

**산상수훈·마태5-7장

두 주인, (마 태 6장 22-24절)

Andy1954 2023. 3. 31. 03:26

마태 6장 22∼24절 말씀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유대인들의 속담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돈을 다스리면, 돈은 사람의 충실한 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돈을 섬기려고 하면, 

돈은 곧 무서운 폭군으로 변해버릴 것이다."

이 말은, 돈이 우리를 섬기도록 해야지, 우리가 돈을 섬기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돈을 다스려야지, 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돈의 노예가 되어서, 우리의 보물을 땅에 쌓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목에, 연자맷돌을

매는 것과 같습니다. 땅에 쌓은 보물은, 우리를 땅으로 끌어내립니다. 

우리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놓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늘에 쌓은 보물은, 우리를 위로

이끌어 줍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쌓은 보물과 땅에 쌓은 보물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두 눈, 즉 성한 눈과 나쁜 눈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두 주인, 하나님과 재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다 같은 맥락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사람은, 성한 눈을 가진 사람이며, 보물을 하늘에 쌓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재물을 우상시하면서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나쁜 눈을 가진 사람이며, 동시에, 

보물을 땅에 쌓는 사람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22절에서는, 성한 눈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둘째로, 23절에서는, 나쁜 눈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셋째로, 24절에서는, 두 주인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주신 말씀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만 온전히 섬기면서, 신령한 눈으로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놓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째로, 성한 눈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22절 말씀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먼저 예수님은, 우리의 눈을 가리켜서, 몸의 등불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등불이 하는 역할은 무엇입니까? 어두움을 밝히는 것입니다.

 

하루는 어느 소경이, 친구 집을 방문했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니, 밤이 깊었습니다. 

소경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소경의 손에,

등불 하나를 쥐어 주었습니다. 소경은 친구가 자기를 놀리는 줄 알고, 화를 벌컥 내었습니다. 

"아니, 자네까지 나를 놀리는건가? 소경이 무슨 등불이 필요하다고, 이 등불을 주는건가?"

친구는 정색을 하면서, 소경에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오해하지 말게나. 이것은 자네가 보라고

주는 것이 아닐세. 이것을 들고 가야지, 밤길에 맞은 편에서 오는 사람들이, 자네의 등불을 보고서

부딪히지 않고, 자네를 피해서 갈 것 아닌가? 그러니 이 등불을 들고 가게나."

소경은 친구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화를 낸 것에 대해서,사과 했습니다. 

이제 소경은, 친구가 쥐어준 등불을 들고서, 집을 향하여, 조심스럽게 밤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한참 가다가, 소경은 갑자기 "꽝" 하고, 마주 오던 사람과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소경은 화가 나서,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보시요, 당신은 눈을 감고 다니시오, 당신의 눈에는, 이 등불이 보이지도 않소?"

그 소리를 들은 상대방은, 처음에는 좀 어리둥절했으나, 곧 사태를 파악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 이제 보니, 소경이셨군요. 

그래서 등불이 꺼진 것도 알지 못하고, 그대로 들고 다니셨군요."

그렇습니다. 등불이 하는 역할은, 어두움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등불이 꺼져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두움을 밝힐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눈은, 몸의 등불입니다. 

그러나 눈이 성해야지 온 몸이 밝지,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비유적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눈이 성하다." 는 말씀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길을 가시는데, 그 길가에 태어나면서부터 소경된 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어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요한 9장 3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이 말씀을 듣고 바리새인들이 되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요한 9장 4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바리새인들의 문제점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육신의 눈은 떴으나, 신령한 눈은, 감겨져 있는, 영적인 소경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바로 눈앞에 서 있건만, 메시야 조차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들이 의롭다고, 신령하다고 착각했습니다. 

따라서 "눈이 성하다"라는 것은, 신령한 눈이 감겨져 있지 않고, 뜨여져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스데반 집사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그가 돌에 맞아 순교합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눈을 들어서,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그의 신령한 눈이 활짝 열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신령한 눈이 활짝 열렸기에,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환하게 빛났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나쁜 눈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소경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신령한 눈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령한 눈이 활짝 열려서,  우리의 모습이, 천사의 얼굴처럼, 언제나 환하게

빛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나쁜 눈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23절 말씀입니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우리의 신령한 눈이, 어두워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황금에 눈이 어두워서 그렇습니다.

중국 진나라때의 고전인 '여씨춘추' 를 읽어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장 한복판에, 금은방이 있었는데, 하루는 어떤 사내가, 넋이 나간 듯이 진열대 위에 있는, 

황금 덩어리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 황금덩어리를 들고서, 재빠르게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시장통에서, 대낮에 달아나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뛰어봤자 벼룩입니다.  그는 얼마가지 못해서 붙잡혀, 관가로 압송되었습니다.

재판관은 물었습니다. "시장에 많은 사람이 있는데, 무슨 생각으로, 그것을 들고 뛰었는고?"

그때 그 사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그 순간 저의 눈에는 황금만 보였지, 주변에 있는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로 황금 때문에, 눈이 어두워진 것입니다. 

우리말에도 , "돈에 눈이 멀었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도, 돈밖에 안보이고, 오른쪽으로 돌려도, 돈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밑을 보아도 돈이고, 위를 보아도 돈입니다. 이것이 바로, '돈에 눈이 멀었다' 는 뜻입니다.

 

그 옛날 가룟 유다가 그러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따라다녔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다 들었습니다. 또,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을 다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 넘기고 말았습니다. 

그는 돈에 눈이 뒤집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눈이 나쁩니다. 땅만 바라보면서 삽니다. 그래서 땅에 보물을 쌓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신령한 눈을 주셨습니다. 위엣 것을 보면서 사십시다. 

예수님은 23절 하반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우리는 세상의 어두움을 밝혀야 할, 세상의 빛들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는 빛조차도 어두우면, 누가 이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겠습니까? 

이 세상은 그만큼 어두워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돈만 알고, 재물만 밝힙니다. 그러나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신령한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물질보다는,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의

사랑, 정성, 진실을 더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물질 때문에, 우리의 신령한 눈이,

어두워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두 주인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24절 말씀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하신, 두 주인의 뜻은, 숫자의 문제가 아니고, 질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두 주인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24절 끝 부분에,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입니다. 이 두 주인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이들 두 주인은,

우리에게 요구하는 방향이 서로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위엣 것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재물은 우리에게,

땅을 바라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재물은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며, 땅에 보물을 쌓아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겸손하게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재물은 우리에게,

큰소리치면서 떵떵거리며 살라고 요구합니다. 

이처럼, 두 주인이 요구하는 방향이, 정반대 입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동시에 두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은, 두 주인의 본질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앞서 유대인의 속담에서, 말씀드린것 같이. 우리가 돈을 다스릴때, 우리의 충성스러운

종이 되어질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재물을 섬기고자 하면, 재물은 그 시각부터

우리의 주인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돈을 다스리며, 돈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까?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재물에서 자유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가능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온전히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물질을 다스릴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여기저기서 경제가 몹시도 어렵다고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돈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늘 깨어 경성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온전히 섬김으로서, 물질을 다스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