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10:13)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Everyday, people who encounter miracles,,,

**산상수훈·마태5-7장

'금식'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함 (마태 6장 16-18절)

Andy1954 2024. 8. 17. 12:16

본문 마태복음 6장 16∼18절 말씀입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오늘은 금식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이미 살펴본 바대로 마태복음 6장 전반부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힘써야 할 의가

세 가지로 기록되어 있는데 첫째가 구제 둘째가 기도 셋째가 오늘 살펴볼 금식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불의는 멀리 해야 되지만 의는 늘 가까이하고 힘써야 할 것입니다. 

구제는 이웃을 향해서 행해야 할 의이고,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서 행해야 할 의라고 할수

있으며, 오늘 살펴보고자 하는 금식은 먹는 것을 절제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우리 자신을

향해서 힘써야 할 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남극에 가면 펭귄들이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르기  위해서 모여드는 작은 섬이 있습니다. 

따뜻한 봄이 되면 수많은 펭귄들이 알을 낳기 위해서 그 작은 섬에 모여듭니다. 

수만 마리의 펭귄들이 한꺼번에 모여들기 때문에 그섬에는 발디딜 틈도 없을정도로 빽빽합니다. 

펭귄의 암컷은 보통 한두 개 정도의 알을 낳습니다. 그러면 암컷과 수컷이 번갈아 가면서 알을

품습니다. 그렇게 해서 새끼가 알에서 나오게되면 어미 펭귄들은 새끼를 그곳에 두고서 먼바다

로 먹이를 찾아 나섭니다. 

어미 펭귄들은 새끼가 좋아하는 작은 물고기 오징어 새우 등으로 잔뜩 배를 채워서 새끼가 있는

작은 섬으로 되돌아옵니다. 돌아오기까지는 보통 보름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보름동안에

새끼 펭귄들은 섬에 남아서 추위와 배고픔을 견뎌내면서 엄마펭귄 아빠펭귄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마침내 보름정도 지난 뒤 펭귄들이 배를 가득 채워 가지고 섬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러면 어미 펭귄은 자기 새끼를 찾아가 뱃속에 가득 채워온 먹이를 토해내서 자기 새끼들에게

먹여 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수만 마리가 되는 펭귄들 가운데서 어떻게 자기 새끼를 찾아내느냐는

것입니다. 펭귄들은 겉으로 보기에 다 똑같아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미 펭귄들은 절대로

혼동하는 법이 없이 자기 새끼를 정확하게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어미 펭귄들은 새끼를 찾을 때 모양으로 찾는 것이 아니고 울음소리를 듣고 찾는다고 합니다. 

어미 펭귄들은 새끼의 울음소리를 기억하고 새끼들도 어미 펭귄의 목소리를 기억합니다. 

 

어미 펭귄들이 먹이를 뱃속에 가득 채워 섬으로 되돌아올 때 새끼를 찾는 소리와 또 어미를 찾는

소리로 얼마나 시끄럽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미펭귄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서 정확하게 

자기 새끼의 소리를 분간해내고 또 새끼펭귄들은 자기 어미의 소리를 다 분간해낸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가 영적인 견지에서 보면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세상의 유혹하는 소리들이 늘 끊임없이 귓가에 들려옵니다. 

그러나 정신을 바짝 차리고서 마음의 초점을 하나님에게 맞추면 그러한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세상 일로 얼마나 분주합니까?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있으면 분주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일을 찾아서

그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아버지께로 향하게 하기 위해서 때때로 우리는 육신의

욕구를 절제하며 복종시켜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마저도 단념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살펴보고자 하는 금식입니다. 

 

이미 우리가 잘 아는대로 주기도문 안에, 모두 6개의 간구가 들어있습니다. 

그가운데 네번째 간구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서 일용할 양식을 거부

하는 금식에 대해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왜 한편으로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시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금식에 대해

가르치심을 주고계십니까? 그것은 금식이 주는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금식과 관련해서 세 가지를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행했던 잘못된 금식에 대해서 알아보고, 이어서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들이 행해야 할 바른 금식에 대해서 살펴본후에, 마지막으로 금식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금식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성경을 읽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금식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40일간 금식을 했고 다윗도 금식을 했으며 다니엘과 엘리야도 금식을 했습니다. 

이처럼 개인적으로 한 금식이 있는 반면 많은 사람이 더불어서 함께 금식한 경우도 있습니다. 

 

사무엘상 7장 6절을 보면 선지자 사무엘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여서 종일 금식

했습니다. 또 요나서 3장 5절을 보게되면 니느웨 백성들이 요나 선지자의 외침을 듣고 회개

하면서 금식했습니다. 

또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가지고 아하수에로 왕 앞에 나아

가기 위해서 유다 백성들과 더불어 사흘을 밤낮으로 금식했음이 에스더 4장 1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경우는 하나님이 금식하라고 명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금식하는 자들이 자발적으로 금식을 한 경우입니다. 

레위기 16장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1년에 단 하루 대속죄일 에만 금식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날만큼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스스로를 괴롭게 하면서 온종일 금식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대속죄일의 규례를 문자 그대로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단 번에 제물로 드림으로서 대속죄일의 모든

규례를 이미 다 성취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더이상 구약시대처럼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지 않는 원리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어떤 일이 있을 때 자발적으로 금식을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을 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어떤 바리새인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했던 내용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그는 자신이 이레에 두 번 곧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을 택해서 금식했겠습니까? 명목상의 이유는 이러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을 금식하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모세가 금식을 하기 위해서 시내산에 올라간 날이 바로 목요일이고 시내산에서

내려온 날이 바로 월요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모세의 제자이기 때문에 모세가 40일

동안 금식한 것을 기념해서 자기들도 그 두 날 곧 목요일과 월요일로 정해서 금식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이유는 다른데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월요일과 목요일은 전통적으로

장이 서는 날이었습니다. 그날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장터에 모였습니다. 

농사꾼들도 모이고 장사꾼들도 모이고 또 물건을 사고 파는 사람들과 구경꾼으로 왁자지껄

했습니다. 그러니 자기들이 금식하는 것을 보이기가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일부러 월요일과 목요일을 택해 금식을 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외식적인 모습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16절에서 그들의 외식적인 모습을 두 가지로 지적하셨습니다.

첫째, 그들은 슬픈 기색을 내었습니다. 자기들의 옷 가운데 제일 헌 옷을 골라 입었습니다. 

그들은 일부러 옷을 잡아 찢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재를 뿌렸습니다. 

몸에는 더러운 먼지를 뒤집어썼습니다. 슬픈 모습을 가장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둘째, 그들은 자신의 얼굴을 흉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일부러 금식한 티를 내려고 멀쩡한

얼굴에 재를 발라서 얼굴이 상해 보이도록 창백해 보이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금식할 때 왜 슬픈 기색을 하고 얼굴을 흉하게 했습니까?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렇게 했습니다. 금식은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 것이지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금식의 목적은 금식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에게로 향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그런데 금식을 한다고 하면서 마음은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같은 외식적인 금식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16절 하반부 말씀입니다.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습니다.  더 이상 받을 상이 없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속여서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인정은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로부터 자기 상을 이미 다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서 받는 인기는 쉽게 사라져 버립니다.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이틀씩이나 힘들게 금식하고서도 받은 상이라 고는 

쉽게 잊혀지고 사라져버리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인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라고 질책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내리실 화 뿐인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들이 행해야 할 바른 금식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7절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할 때 힘들고 슬픈 기색을 나타내기 위해서 일부러 머리를 헝클

었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재를 뿌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들이 금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할 때 얼굴을 흉하게 보이도록 얼굴에 재를 발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들이 금식할 때 우리의 얼굴을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어서 18절말씀을 보겠습니다.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계신 네아버지께 보이게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금식의 상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금식은 보지 않으시며 도리어 고개를 돌려버리십니다. 

그러나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 금식은 하나님이 반드시 보십니다. 

마태복음 6장 1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무슨 를 행하든지 간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해야지 사람을 바라봐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제를 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기도할 때는 회당과 큰 거리가 아닌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 하라고 하셨습니다. 

금식을 할 때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제든 기도든 금식이든 티를 내지 말고 다른 사람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하나님만 아시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일생을 아프리카의 복음화를위해 아프리카 선교사로 헌신했던 영국의 리빙스턴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의 밀림 속에서 수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한 번도 자기가 주님을 위해서 헌신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은혜요 특권이라고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마음은 언제나 기뻐했으며 감사가 넘쳤다고 합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깊은 밀림속을 지나 어떤 부락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자가 나타나 눈깜빡할 사이에 그의 한쪽 팔을 물어 뜯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동행하던

그의 하인이 급히 달려와서 구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살점이 떨어져나간  팔에서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와중에도 그는 평강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아마도 나는 나의 모든 사명이

다하기까지 죽지 않을 모양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명자는 죽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이 바로 이때 생겨났다고 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사자에게 물어 뜯겨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선혈이 낭자하는 상황이  

얼마나 놀라고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생각하면서 평정을 유지할 수있는 마음의 여유는 정말로 아름다운 신앙인의 모습이 아닐수

없습니다. 

 

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욕구가운데 가장 참기 어려운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식욕입니다.

금식으로 인하여 엄청난 배고픔의 고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연 내색하지 않고 도리어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은채 밝고 명랑한 평상시의 모습을 유지할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참된

금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된 금식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18절 말씀 하반부를 보겠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사람을 보고 한 금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는 금식은 하나님이 보시고 좋은것으로

갚아주십니다. 

 

우리의 자녀가 밥을 먹지 않고 필요한 뭔가를 간절하게 요구하면 어떤 부모가 모른 척 하고있겠

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능력이 많으신 전능하신 분 이시며 또한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사랑의 아버지 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가 금식하면서 매달리는데 

우리를 외면하시고 모른체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주신 

이십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보시고 반드시 갚아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있어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금식하십니까? 사람은 몰라주어도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금식에 대해 잊지 않으시고 가장 좋은 것으로 가장 적절한 시간에 풍성하게 갚아

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오늘날 금식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7절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너는 금식할 때에" 예수님은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가 금식할 때가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면 언제 우리가 금식을 해야 합니까? 마태 9장 14∼15절을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하루는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물었습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그때 예수님의 답변이 9장15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있을 동안에

슬퍼할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무슨 말입니까?

이 말씀을 오늘날 우리의 삶에 적용하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늘 예수과 더불어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예수님이 멀리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때는 영적인 각성을 위해서 금식을

해야합니다. 왜 예수님으로 충만하지 못하고 예수님 밖에 머무는 것같은 느낌이 옵니까? 

그것은 우리가 육신의 일에 너무나 얽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등 날마다 육적인 일에만 얽매

이다 보면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영적인 일에 소홀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러한 때에 우리의 영을 맑게 하기 위해서 아니면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해지기 위해서 

금식과 같은 방법으로 육신의 욕구를 절제하며 물리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하루는 어떤 부인이 병원에 찾아가서 의사 선생님에게 이렇게 하소연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살이 너무 쪄서 고민입니다. 살을 좀 빼고 싶은데 좋은 방법이 있으면 좀 가르쳐

주십시오." 의사는 그 부인을 여러모로 진단하고 난 뒤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부인의 살을 빼는데는 식이요법이 제일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제가

알려드리는 대로만 식사를 하도록 하십시오. 

하루 세끼를 현미밥 반 그릇에 야채만 넣고 끓인 국을 드십시오. 그리고 거기에 곁들여서

매 끼마다 사과 반개를 함께 드시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수개월 내로 살이 빠질 것입니다.

 

그러자 그 부인은 그 정도야 별거 아니라는 듯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병원을 나가려다 말고 무엇인가 궁금한 점이 있다는 듯이 의사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방금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식전에 먹어야 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식후에 먹어야 합니까?" 물론 우스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먹는 것을 참거나 절제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육체의 종노릇하면서 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삶속에서 모든일에 절제하면서

살아가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돈을 헤프게 쓰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면 돈쓰는 금식을 해야 합니다. 

또 입지도 않을 사치스러운 옷을 자꾸 사는 사람은 옷사는 금식을 해야 합니다. 

잠이 많아서 새벽기도회에 잘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은 잠자는 금식을 배워야 합니다. 

TV 앞에만 가면 몇 시간씩 드라마를 보시는 분이 있으시다면 그 사람은 TV시청 금식하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더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앞에서 말을 절제하지 못해 다른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사람은 필히 수다금식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왜 우리에게 금식에 대한 교훈을 주셨겠습니까? 

금식을 함으로서 다른 사람앞에서 과시하고 뽐내라고 주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육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영적인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이 되라고 금식에 대한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제된 삶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므로

주님 앞에 서는 날 "잘했다" 라고 칭찬을 들을뿐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

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