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10:13)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Everyday, people who encounter miracles,,,

**행함.야고보서

시험 중에 기뻐하십시오(Rejoice in Suffering) (야고보서 1장 1-4절)

Andy1954 2024. 10. 3. 09:32

오늘은 야고보서 말씀을 함께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야고보서는 로마서 말씀과는 아주 다른 분위기의 말씀입니다. 어쩌면 정 반대의 입장을 취하고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로마서의 주제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였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27절에 보면,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또한 4장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을 거듭해서 강조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서의 말씀을 보시면 전혀 다릅니다.

야고보서 2장 20-2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

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 바 이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로마서에서는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그렇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것이 없다고 하였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하였는데,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드리는 그믿음을 통해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의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의 이삭을 제물로드린 그이야기의 결론을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고 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한 성경 안에서 이렇게 서로 다른 주장을 할 수 있을까요?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고 가르치는 카톨릭 교회의 비복음적인 가르침에

반발해서 로마서의 핵심 교리인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말씀을 가지고 일어섰습니다.

그런 루터의 눈에 야고보서의 주장은 말도 안되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루터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인 '복음의 핵심'을 가지고 카톨릭과 싸울때에 카톨릭 학자들은

주로 야고보서 말씀을 가지고 반박하고 나섰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루터는 야고보서에 대해서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전혀 가치가 없는 서신서라는 것입니다.

오늘 루터가 지푸라기 서신서라고 평가하였던 그 야고보서 말씀을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이 말씀이 우리에게 요청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66권은 모두 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루터가 비록 그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으로 인해 (너무 행함만 강조되고 있던 시대, 그래서 복음의

진수를 놓치고 있던 시대에 - 그 복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야고보서 말씀을 평가절하 하였지만,

야고보서 말씀 역시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쓰여진 진리의 말씀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16-17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이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하며 모든 선한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야고보서 역시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야고보서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야고보서에는 많은 실천적인 교훈의 말씀들이 있습니다.

마치 다시 구약의 율법 시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로마서의 핵심 교리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무시하거나 반대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로마서 12장이후부터 나왔던 말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는 말씀의 연장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믿음은, 결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은 또한 보여지고 볼수 있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그 믿음이 진짜 믿음이라면 살아

있는 믿음이라면 내 삶은 반드시 그 믿음대로 나타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와 로마서는 서로 다른 말씀이 아니라, 강조점이 서로 다른 데에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로마서 말씀이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율법이아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어짐을 강조하였다면,

야고보서는 이제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진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17세기 영국의 목사였던 토마스 맨톤 목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안락에 치중하고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우리들은 마치 예수님에

대한 메마르고 열매 없는, 약간의 지식만 가지면 다 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우리들을 위해서 모든 일들이 이루어졌으므로 우리들에 의해서 되어야 할

일들은 아무것도 없다고 간주합니다.'

토마스 맨톤 목사님은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방종과 태만의 구실로 삼는 것을 개탄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어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우리

신앙생활의 전부가 아니라 '출발점'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가 감당할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 남은것은

그 자녀답게 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방종과 태만 불성실함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대한 오해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내가 구원받아 천국가는 것은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제 예수

믿고 세상에서 좀 나태하게 살아가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게 살아가도 상관이 없다는식의 태도인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을

욕되게 하는 생각인지 모릅니다. 성도의 마땅한 삶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이 야고보서의 말씀을 통해서 나를 깨우는 하나님의 나팔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내 심령을 향해 탄식하며 부르짖는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서론적인 부분들을 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야고보서 말씀을 누가 기록했는가 살펴보겠습니다. 1절에 보면 자신의 이름이 야고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야고보가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야고보가 한두명이 아닙니다.

먼저 예수님의 제자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는 일찍 순교

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헤롯이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때는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얼마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아직 신약성경이 기록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가 야고보서를 기록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그런데 누가 6장 15절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 중에 또 한사람의 야고보가 나옵니다.

그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입니다. 그는, 마가 15장 40절을 보면 작은 야고보라고 불리우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야고보는 간단하게 소개는 되었지만, 그가 초대교회에서 지도자로 활동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도 희박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각할 수 있는 야고보는 바로 예수님의 친 동생 야고보입니다.

마태 13장 55절 말씀을 보면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야고보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 예수님을 믿었던 예수님의 형제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62년에 순교하기까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활동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갈1:19, 2:9, 행12:17, 15:13-21, 21:18)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바로 이 야고보 예수님의 친동생을 기록자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아버지는 같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이시며, 반면에 동생 야고보는

요셉의 아들인 것입니다. 배다른 형제가 아니라 씨다른 형제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의 기록자를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야고보가 자신을 소개할때에 특이한 사항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야고보가 자신을 소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 야고보' 라고 한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 라고 소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형 예수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어린시절을 보내었고 또한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를 것 없는 평범한 한 인간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 예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되게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형 예수를 주라고 호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그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2장1절에서는 예수님을 '영광의 주'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처음에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에 활동하실 때에는 자기형이 미친것이 아닌가 의심하며 염려

하던 야고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뒤로 그예수가 단지 자기 형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알게

된것입니다. 그예수가 자기의 주이심을 알게된 것입니다. 자기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를만난 사람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면서 우리의 주가 되십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은 누구나가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편지를 받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1절에 보니까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한다'고 인사합니다.

즉, 이편지를 받는사람은 흩어져있는 열두지파라는 이야기입니다. 당시에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기 저기로 흩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 가운데는 복음을 받아 들이고 예수를 주로

고백한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흩어진 유대인 가운데 예수 믿는자들이 바로 이야고보서의 수신자

인 것입니다.


열두 지파라는 것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아브라함의 진짜 씨가 누군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피를 받았다고 해서 아브라함의 씨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가 아브라함의 씨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육신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아브라함의 씨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과 동일한 믿음 가운데 있는 자가 아브라함의 자녀인 것입니다.

오늘날 믿음의 성도들은 흩어진 열두 지파입니다. 이 흩어져 있다는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여서 세상과 단절되어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흩어져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세상의 빛이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마지막 명령 역시 예루살렘은 물론이거니와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가라는 것이

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가 스스로 그렇게 가지 않자 엄청난 핍박을 통해서 그 교회를

완전히 사방 팔방으로 흩어 놓으셨습니다.

그럼 왜 흩어 놓으실까요?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을 '디아스포라' 라고 합니다.

그런데 디아스포라는  '흩어진 씨'라는 뜻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심으신 씨입니다.

또는 누룩과 같은 존재입니다. 마태 13장 33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은 천국을 누룩으로 비유하기도

하셨습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사도행전 24장 5절 말씀을 보면 사람들은 바울을 염병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보니 이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온 땅에 충만하라고 하였습니다. 번성하라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세상에 심겨진 씨앗이라고 한다면 누룩과 같은 존재라고 한다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 충만해져야 합니다. 복음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예수를 나의 주라고 고백하는 자들이 충만해 져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모이고 흩어지는데 있습니다. 모이기를 힘쓰고 모여서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이루며

서로 연락하고 상합하여자라가야 하며 교회에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교회는 또한 흩어지는 교회여야 합니다.

모였다가 사방으로 흩어진 성도들이 곳곳에서 누룩의 사명을 다해야 하며 염병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어져야 하는것입니다. 누룩이 흩어져서 새로운 반죽 덩어리에 들어가면 그덩어리를 

누룩으로 만드는 것이 누룩의 성질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들끼리 모여서 잘 먹고 잘 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과 유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명을 스스로 하지 않았을 때에 주님은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을 허락하셔서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사방으로 흩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흩어진 성도들이 흩어진 그곳에서 교회를 세우고 또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흩으신 것은 세상 가운데서 조롱당하고 세상과 짝하여 살라고 흩으신것이

아닙니다.우리 안에 주신 그사랑 근은혜 그복음이 전해지게 하기 위해서 흩으신 것입니다. 

세상에 심으신 '씨'의 사명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누룩'의 사명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두려워하는 '염병'과 같은 존재가 되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서 말씀은 장성한 자들이 먹을 수 있는 단단한 식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5장12절-6장2절 말씀에 보면 우리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만 머물러 있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아직도 젖을 떼지 못했느냐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제는 그만 젖을 떼고

단단한 식물을 먹으라고 권면합니다. 장성한 자의 분량까지 자라가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과 삶이 더욱 온전한데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 속에 있는 믿음의 증거들이 충만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안에 살아 있는 믿음의 역사가

늘 나타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