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10:13)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Everyday, people who encounter miracles,,,

** 생수의 강

미래 지향적인 교회 (빌립보서 3장 12-14절)

Andy1954 2024. 6. 4. 12:13

오늘 본문을 기록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도였으며 성숙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서 사도는 자기가 이미 얻었다고도 온전히 이루었다고도 생각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뒤에 있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만을

향해서 끝까지 좇아가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도 바울은 미래지향적인 신앙을 가졌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 가졌던 미래지향적인, 신앙의 요소를 세가지로 나누어 

함께 살펴보면서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도 미래 지향적인 모습을 갖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바울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겸손하게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아직까지 부족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푯대를 향하여 좇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으며, 훌륭한 일들을 많이 해왔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는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바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오직 예수님 한 분만 바라보면서 살아왔습니다. 그의 삶의 표어는 이러했습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을 것이다."

 

그는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수없이 매를 맞았고 감옥에도 여러번 갇혔습니다. 

또 이런 고생 저런고생도 수없이 겪었습니다. 때로는 타고 가던 배가 파선을 해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때가 있었습니다. 그는 주리며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핍박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숨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

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반면에 바울에게는 값진 체험도 많았습니다. 

 

우리가 잘아는 대로 고린도후서 12장을 보면 그는 셋째 하늘, 곧 낙원에도 이끌려 올라간  신비한

체험을 했습니다. 하늘 나라의 영화로운 광경을 자기의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병 고치는 능력도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많은 병자를 고치기도 했습니다. 

또한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도 쫓아내 주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죽은 청년 유두고를 기도해서 다시 살려주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서 많은 사람들이 멸망의 길에서 구원의 길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디모데, 디도, 누가, 빌레몬, 오네시모, 루디아 등 귀한 일군들도 길러내었습니다. 

그가 세운 교회들도 여러 곳에 많았습니다. 또한, 그는 신약성경의 거의 절반에 이르는 책들을

기술했습니다. 

 

거기다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서 빌립보 서신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순교 직전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그만하면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만하면 얼마든지 자랑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아직도 자기는, 불완전한 존재요, 미완성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의 푯대는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바라보니까, 너무나도 뒤쳐져 있는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도 푯대를 향해서 계속해서

전진해야 할 만큼 자기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만하면 됐지 뭐." 그러면서 작은 성취에 자만해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더 이상 창조적인 발전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아직도 멀었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만이 노력하게 되고 그결과 성장과 발전이 기대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장로가 되기전에는 권사가 되기전에는 매우 겸손합니다. 봉사도 열심히 합니다. 

그러다가 장로가 되고 나면 권사가 되고 나면 사람이 갑자기 달라집니다. 

"사람이 달라져도 어떻게 저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의아심이 들 정도입니다. 

목에 힘이 들어가서 뻣뻣합니다. 어깨에도 힘이 들어가서 걸음걸이가 달라집니다. 

 

섬기려는 자세가 아니고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자세를 취합니다. 더더욱 가관인 것은 완전히

안하무인의 행세를 하려고 듭니다. 마치 자기가 교회의 주인이나 되는 것처럼 그저 아무데나

들쑤시고 아무한테나 야단을 치려고 합니다. 이런분은 교회 직분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장로가 되었으니까 권사가 되었으니까, "이만하면 다 된 것이다"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토록 훌륭한 일을 했지만 "나는 아직도 멀었다"라는 겸손한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면서 자기의 부족을 알아서 날마다 자신을

채찍질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만하면 되었다"라고 자만하지 말고, "나는 아직도 멀었어"라는 겸손한 마음으로, 교회를

섬겨야 할 것입니다. 교회적으로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만하면 되었다."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현실에 안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새로운 꿈과 비전을 품고서,

교회의 장막터를 더욱더 넓혀 나가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바울은 과거에 집착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한 일 " One thing, 즉 한 가지 일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앞도 바라보고 뒤도 바라보는,

두가지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앞만 바라보면서 전진하는, 일에만 집중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의 지난 날에 대해서는 깨끗하게 잊어버렸습니다. 

 

달리기 시합을하는 사람이 뒤를 돌아본다면 그만큼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사실 바울의 과거는 매우 화려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화려했던 과거 경력을 빌립보서 3장 4-6절에서 7가지로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

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이것뿐 이겠습니까? 우리가 잘아는 대로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습니다. 

그는 당대 제일가는 가마리엘 문하에서 수학을 했습니다. 그는 히브리문화 헬라문화에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난 뒤에는 자신의 화려한 과거의 경력들을

어떻게 여겼다고 했습니까? 빌립보서 3장7절 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그는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을 모두 해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설정한 푯대를 향해서 좇아가는데 방해가 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빌립보서 3장 8절 입니다. "또한 모든것을 해로 여김은 내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바울은 8절에서는 과거의 자신의 화려한 경력들을 더럽고 냄새나는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두번 다시 쳐다보기도 싫은 것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기의 생각 속에서,

그러한 것들을 지워버리고 말았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 가졌던 세상적인 기질 또 잘못된 습성 등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씻어버려야 할것입니다. 과거 세상에서 부리던 혈기 거친말들 아직도 내뱉는

사람이 있다면 아직 과거에 머물러 있는 사람입니다. 과거를 떨쳐버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9장 6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이 시간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울처럼 뒤에 있는것은 깨끗하게 잊어버릴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도 바울처럼 잘했던 것도 잊어버리십시다. 

잘못했던 것도 잊어버리십시다. 실수했던 것 부끄러운 기억 수치스러운 과거 등 이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잊어버릴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에이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패배한 남군을 관대하게

대했습니다. 그는 연설을 할 때마다 남군들을 사랑하고 용서하자고 외쳤습니다. 

하루는 어떤 할머니가 링컨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나서는 거칠게 항의했습니다. 

그 할머니는 사랑하는 아들을 전쟁터에서 잃은 분이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원수를 그냥 놓아준다

는 말입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원수는 없애야 합니다" 그때 링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맞습니다. 원수는 반드시 없애야 합니다. 저도 그 말에 백 번 동감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원수를 우리의 친구로 우리의 동지로 만들어서 영원히 없애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눈앞에 있는 원수는 물론 죽여서 없앨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품은 원한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원한은 대대로 계속해서 이어질

것입니다. 링컨 대통령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치심대로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함으로서 마음 속에 품은 원한까지도 완전히 없애려고 했던 것입니다.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기초했던 토마스 제퍼슨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과거의 역사보다, 미래의 꿈을 더 좋아한다."

태양을 등지고 사는 사람은, 늘 눈앞에 그림자만 바라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태양을 향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밝은 빛 가운데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 교회도 과거의 역사와 전통에 집착하는 과거지향적인 교회가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바라보면서 새로운 꿈을 펼쳐나가는 미래 지향적인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바울은 푯대를 향해서 좇아나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에도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앞에 있는 푯대를 행해서 계속해서 전진하고 좇아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늘 미래지향적인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목표로 삼은 푯대는 무엇이었습니까? 12절 하반부입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예수님은 바울을 붙들어주셨습니다. 이제 바울은 예수님의 손을 붙들고 예수님께 잡힌바 된

그것을 목표로 삼아서 예수님의 뒤를 부지런히 좇았습니다. 

 

우리가 잘아는 대로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던길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또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제 바울은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목숨이 다하기까지 죽도록 충성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올바른 푯대를 정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예컨대 여기에 활 쏘는 사람이 서 있다고 생각을 해봅시다. 

그는 앞에 있는 과녁을 바라보면서 화살을 장전한후 있는 힘을 다해서 활시위를 당겼습니다. 

그러면 주변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그 화살이 바르게 잘 날아가서과녁에 명중되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라 해도 뚜렷한 목표 없이 활 시위를 당긴다면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히기 전에는 바로 그러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스스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처했습니다. 

그는 자기 의에 가득 차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생각에 어긋나면 도저히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는 완벽주의자 였습니다. 그는 소신이 너무나도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법에 위배되는 줄 알면서도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그의 열심은 대단했습니다. 그의 열심은 아무도 말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무조건 쓰레기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다 쓸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위한 일이라고 엄청난 착각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 다메섹에 숨어있는, 기독교인들을 모조리 박멸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그러다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에게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그제야 바울은 자기가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의 뜻과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꺾어버렸습니다. 이제는 오직 예수 그리스의

종이 되어서, 사나 죽으나 예수 그리스도만을 존귀케 하는 삶으로 바뀐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을때 푯대를 잘못 정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의 푯대는 바르게 바뀌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교회를 핍박하고 교회는 허는일에 앞장서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하면서 교회를 바르게 세워 나가는 사람으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는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앞장섰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여 우리의 푯대가 잘못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푯대가 잘못되면 자기 열심으로 오히려 교회를 세우는것이 아니고 교회를 허는것이 될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푯대는 무엇입니까? 

세상적인 것 육신적인 것에만 우리의 마음이 가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적인 수고는 바벨탑을 쌓는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상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할 때 우리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실 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태 10장 42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소자중 하나에게 냉수 한그릇이라도 주는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냉수 한 그릇은 보잘 것 없습니다. 

그 보잘것 없는 것조차도 하나님은 잊지 않고 상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며 헌신하는 우리의 수고를 왜 하나님이

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반드시 귀한 상을 주실 것입니다.

교회를 섬기는 우리의 마음자세가 어떠해야 할지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나간 과거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 잊어버립시다. 또 현실에 안주해 있지도 맙시다. 

더나은 내일을 바라보면서 좀더 크고 원대한 꿈과 비전을 가진 미래지향적인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더욱 힘써 섬기고 평안한

가운데 든든히 세워 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나가며 또 교회의 장막터가 크게 넓어지는 귀한 역사가 우리를 통해서,

더욱더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