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10:13)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Everyday, people who encounter miracles,,,

**산상수훈·마태5-7장

신앙의 ABC, (마태 7장 28-29절)

Andy1954 2023. 4. 13. 11:52

 마태 7장 28∼29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어떤 시골 교회에 연로하신 목사님 한분이 계셨습니다. 

그 목사님은, 얼굴에 주름이 많고, 머리는 백발이셨습니다. 

어느 주일날, 목사님은 성도들에게, 열심히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반응이 시원치 않았습니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또 어떤 사람은 괜스레 주보를 이리 저리, 뒤척거리는 사람도 있는가하면,. 

또 연거푸 자기의 손목시계만 들여다보는등, 대부분 딴청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설교하는 목사님이, 얼마나 맥이 빠지겠습니까? 

그런데 맨 앞줄에 앉은 할머니는, 예외였습니다. 

할머니는, 목사님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계속해서, 눈물을 훔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할머니 모습에, 힘을 얻어 설교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예배가 끝난후, 목사님은 할머니 손을 잡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머니, 오늘 설교시간에, 많은 은혜를 받으셨나봐요? 어떤 내용이, 은혜스러웠습니까?"

그러자 할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설교 내용은, 제가 잘 모르겠구요. 실은 제가 애써 키우던 염소가,

며칠 전에 그만 죽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얼굴에 있는, 흰수염을 보니까, 

자꾸만, 그 염소가 생각이 나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자꾸나왔습니다.

그러면서 그 할머니는 또다시, 눈 언저리가 촉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할머니는 목사님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엉뚱한 반응을 보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무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태복음 5, 6, 7장에 걸친, 예수님의 산상설교가 다 끝났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무리들의 반응이 어떠한지 28절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28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래니."

그들의 반응은, 한 마디로 놀랬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29절 말씀에, 그들이 놀란 이유를, 두 가지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첫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권위(세)가 있었다는 것과, 

둘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놀랐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해주셨으며,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믿음과 철저한 순종을, 

보여주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야 그들이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무리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껏 놀라는, 반응을 보였을 뿐입니다.

마태 13장 53절 이하에 보면, 한 번은 예수님이 고향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 있는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때도 사람들은, 지금의 무리와 같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놀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과 자매들도,

우리가 다 잘 아는 사람이 아니냐?" 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배척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듣고 놀란다고 해서, 그 자체로서 아름답고 바람직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을 다 들은 무리들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다음에 나오는, 마태 8장 1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처음에는 무리들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듣고 놀라서, 예수님의 뒤를, 많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요한 6장 66절 말씀을 보게되면,  결국 그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예수님의 곁을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의 곁을 떠나는 모습을 보시면서, 제자를 향하여,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때 시몬 베드로가 나서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이제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다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말씀에 대한 순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권위가 있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한, 보여야 할 우리의 반응을 살펴봅니다.

이 시간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시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더욱더 분명하고 확고하게,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예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권위(세)가 있었습니다.

29절 상반부 말씀입니다.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예수님의 가르치심에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은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6가지로 실례를 들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당시의 서기관들은 옛 사람, 곧 자기들에게 유전을 전해준, 장로들의 권위를 의존해서,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르침을 베풀 때, "옛 사람에게 말한바," 이러한 표현을 썼습니다.

이렇듯 불완전한 사람의 권위에 의존해서,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표현은 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백성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의 신적인 권위로, 권세 있는 가르치심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 1장 1절에 나오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라는,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분도, 또 선지자들에게, 예언의 말씀을 주신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말씀 그 자체이실뿐만 아니라, 말씀이신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서기관들처럼, 불완전한 인간의 권위에 의존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의 신적인 권위로서, 절대적인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영생)을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영원한 벌(영벌)을 주십니다. 

이러한 권세를 가지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자는, 예수님이

반석이 되어 주십니다. 그러면 심판 날, 하나님의 심판대에서도, 어엿이 설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반석이 되시고, 피난처가 되셔서, 든든히 세워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듣고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심판 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심판 날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우리는 히브리서 9장 27절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 두 가지 문제, 곧 '죽음과 심판의 문제'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진 분이 계십니다. 

오직 한 분,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잠시 하늘 보좌를 떠나 우리 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값을 다 지불하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의 죄를 다 씻어 주셨습니다. 

깨끗하고 정결하게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심판에서, 생명으로 옮겨 졌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는, 심판 날 자기의 죄값을,

자기 자신이 치러야 됩니다. 

이와 같은 은혜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며, 날마다 감사와

존귀와 찬미를, 주님에게 돌려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인쇄술이 발달되기 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손으로, 일일이 그것을 다 써야만 했습니다. 

그 일을 감당했던 사람들이, 바로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손으로, 베끼는 일을 하다보니까, 성경 지식에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다른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일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에는 큰 차이점이 있었급니다. 

우선 우리가 조금 전에 살펴본 대로, 권세 면에서 천지차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의 신적인 권위로, 가르치심을 주셨습니다. 

반면에 서기관들은, 옛사람들의 권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가르침의 내용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서기관들의 가르침에 있어서, 가장 큰 잘못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성경의 근본적인 정신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서기관들은 사람들에게, 악한 자를 대적하라고 잘못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온통 미움과 복수심을, 조장시켜 놓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의 근본원리가, 사랑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도리어 사랑으로 대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오른편 뺨을 치느냐? 왼편 뺨도 돌려대어라. 

누가 속옷을 달라고 하느냐? 겉옷까지 주어라. 

지로 오 리를 가고자 하는 자에게는, 십 리까지 가주어라."

그뿐만이 아닙니다, 서기관들은 이웃 사랑에 대해서도, 왜곡해서 가르쳤습니다. 

백성들에게 이웃만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라고 잘못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의 마음 속에, 미움과 증오로 가득 차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가르치셨습니까? 

"이웃뿐만 아니라,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의 내용은, 한 마디로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정신은 사랑임을 알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은 말씀에, 어떠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서기관들처럼 머리로만, 아는 지식적인 반응을 보여서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무리들처럼, 그저 "좋은 말씀이다, 은혜로운 말씀이다, 

놀라운 말씀이다"라는 감성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도, 만족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의 가르치심대로,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우리가 보여야할 반응을 살펴봅니다.

흔히들 교육에는, 교육의 ABC라는, 세 가지의 차원이 있다고 합니다. 

A는 Add입니다. 지식을 더함으로서, 몰랐던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B는 Broaden입니다. 시야를 넓히고, 이해를 넓혀주는 것입니다. 

C는 Change입니다. 잘못된 관점을 바로 잡아주고, 잘못된 삶의 태도를, 올바른 삶의 태도로,

바꾸어주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무리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그들은 기껏 놀라는

정도의 반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A와 B의 단계에 머물고 만 것입니다. 

삶이 바뀌어지는, C의 단계에까지, 그들은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과 좁은 길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가르치심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전해주기 위해서였습니까? 

새로운 지식을 통해서, 그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실제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을 걸어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야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넓은 문과 넓은 길의 삶에서, 이제는 좁은 문과 좁은 길의 삶으로, 

변화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받은 무리들은 기껏해야, 놀라는 정도의,

감성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끝맺음을 하고 만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주일 그 교회에서는 새가족 초청 전교인 전도주일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분들이 많이 왔습니다. 

그 교회의 어떤 여집사님도, 믿지 않는 남편을, 간신히 이끌고 교회에 왔습니다. 

그날 설교가 끝난 뒤에, 목사님은 새로 온 분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기로 작정하시는 분은, 잠시 그 자리에서

일어나,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여러분을 위해서, 특별히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어섰습니다. 그런데 그 여집사님의 남편은, 일어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여집사님은, 남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조용히 속삭였습니다.

"어서 일어나세요. 당신도 일어나서 예수님을 믿겠다고 작정하세요."

그러나 그의 남편은, 한사코 일어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여집사님은 남편에게 서운한 듯이 물었습니다.

"여보, 왜 일어나지 않았어요? 당신이,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해 주기를 바랬어요."

그때 남편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동안 당신은, 교회를 다니면서, 신자로 살아왔고, 나는 교회를 다니지 않으면서,

불신자로 살았소. 그러나 그동안의 생활을 보면, 당신의 삶이나 나의 삶이나, 별 차이가

없었던 같아요? 내가 화를 낼 때, 당신도 화를 냈지요? 

내가 큰 소리 치면, 당신은 언제나 나보다, 더 큰 소리 치지 않았소? 

내가 일요일 야외에 나갈 때, 당신도 언제나 나를 따라서 나섰고? 

당신과 나의 생활이 똑같은데, 새로 믿겠다고 작정해야될 이유가 무엇이오? 

나는 믿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일어서지 않은 것이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날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들도 서기관들처럼 그저 머리로만 아는, 지식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습니까? 

"좋은 말씀이다, 오늘 좋은 말씀을 들었다"라는, 감성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실천적인 반응입니다. 말씀에 순종하기를 바라십니다. 

사랑을 실천하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을 통해서, 삶의 변화가 있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올바른 반응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이 은혜로, 말씀에 순종하며, 사랑을 실천하며,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사는,

주님의 참제자들이, 되실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