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10:13)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Everyday, people who encounter miracles,,,

**산상수훈·마태5-7장

좁은문으로, (마태 7장 13-14절)

Andy1954 2023. 4. 8. 14:40

마태 7장 13-14절 말씀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옛날 어떤 마을에 마늘도둑이, 한 사람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어떤 집에 들어가서 마늘을 훔치다가, 그만 집 주인에게 발각이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관가로 끌려갔습니다. 

고을 원님은 그 즈음에 집집마다 마늘도둑이 들어서,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마늘도둑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야 되겠다고 생각하고서, 

아주 엄한 벌을 내리리라 작정했습니다. 

원님은 마늘도둑에게 세 가지 벌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하라고, 일렀습니다. 

첫 번째 벌은, 마늘을 훔쳤으니까, 마늘 100개를 날 것으로 먹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벌은, 곤장을 50대 맞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 벌은, 벌금으로 금전 백 냥을 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늘도둑은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선 곤장 50대를 맞으려고 하니까,

너무 아플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벌금으로, 금전 백 냥을 내려고 하니까,

너무 아까웠습니다. 그 당시에는 금전 백 냥이, 매우 큰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늘도둑은 벌로 생마늘 100개를 먹겠다고 아뢰었습니다.

처음 마늘을 한 두개 먹을 때는,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10개쯤 먹으니까, 입안도 얼얼하고, 속도 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이왕 먹기 시작한 것이니까, 끝까지 먹어야 되겠다고 작정했습니다. 

그는 마늘을 20개나 먹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온 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습니다. 

눈알도 빠져나오는 듯 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먹을 재간이 없었습니다. 

하는수 없이, 원님에게 마늘을 먹는 대신에, 곤장을 맞게 해달라고 사정했습니다. 

그의 사정이 받아들여져서, 그는 곤장을 맞기 시작했습니다. 

10대를 맞았더니, 엉덩이가 터지고, 피가 새어나오기 시작했습니다. 

15대를 맞았더니, 정신이 까물까물해지기 시작했습니다. 

20대를 맞았을 때, 그는 완전히 정신을 잃고서, 까무러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한참 뒤에 정신을 차렸습니다. 더 이상 맞다가는 죽을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원님에게 곤장을 맞는 대신에, 벌금을 내게 해달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결국 그는 애꿎게 생마늘을 20개나 먹고, 곤장을 20대나 맞고, 그리고 나서 벌금으로

금전 백 냥을 내고 난 후에,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바르게 선택을 못하고,  

잔 머리 굴리다가, 잘못 선택해서, 온갖 곤욕을 다 치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일에,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물론 선택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한 바에 대한 결과는, 우리 자신이 책임져야 합니다. 

따라서 무슨 일이든지 신중하게 생각하면서, 바르게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결론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가, 무엇이 문제인지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들의 의는 외식적이었습니다. 또 온전하지도 못하고, 부분적이었습니다. 

그들의 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고, 자기 중심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와 같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으며, 천국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더 나은 의가,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은 의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받게 되는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의를 받은 자만이, 천국의 백성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이 두 가지 의를, 비교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한쪽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 곧 인간적인 의입니다. 

다른 한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 두 가지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아울러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각자가 져야할 것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 하반부에서 세 가지 비유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데, 

13-14절에서는, 문과 길의 비유를, 15-23절에서는, 두 나무의 비유를, 그리고,

24-27절에서는, 두 집의 비유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가운데서 두 문과 두 길의 비유를,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을 걸어가는, 바르게 선택을 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도 더 나은 의가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천국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잘나서도 아니고, 어떤 공로가 있어어도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겸손함으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인간적인 의를 내세우려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첫째로, 두 문과 두 길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옛날에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였습니다만,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성벽을 쌓고,

성안에 모여서 살았습니다. 성벽에는 많은 문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가운데 있는 문은

제일 크고 웅장했습니다. 물론 그 길도 넓고 평탄합니다. 

그래서,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는, 그 문은 개선문처럼 사용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나와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군인들을 환영했습니다.

반면에, 성벽의 후미진 곳에는, 작은 문이 있었습니다. 큰 문이 다 닫히고 난 뒤에라도,

꼭 필요한 경우에는, 그 좁은 문을 통해서, 들어오고 나가기 위해서 였습니다. 

말하자면, 비상구처럼 사용되는 문입니다. 그렇다 보니까, 그 주변의 길도, 당연히

좁고 협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두가지 모습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너희는 넒은 문으로 들어가지 말아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넓은 길로 가지 말고, 좁은 길로 가라." 는 말씀의

의미를 깊이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넓은 문과 넓은 길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의를, 으시대며 자랑했습니다.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되는 것처럼, 모든 영광을, 자기들이 다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좁은 문과 좁은 길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을 가는 사람들은, 인간적인 의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을 걸어갈,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좁은 문과, 좁은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까? 

천국의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초청을 받고, 그 부르심에 응한 사람은, 공로가 없어도,

내세울 인간적인 의가 없어도, 천국 문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 10장 9절에서,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천국으로 인도하는 문은, 은혜의 문이요, 그 길은 은혜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요한 14장 6절에서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곧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해 주시는, 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만이 천국으로 인도해 주시는, 유일한 문이요, 유일한 길이십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의 말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는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좁은 문과 좁은 길에 있게된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도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인간적인 의를, 내세우려 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언제나 겸손하게,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두 종류의 사람들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3절에서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고, 넓은 길에 서 있는 사람은, 많다고 하셨습니다. 

반면에 14절을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에 서 있는 사람은, 적다고 하셨습니다. 

먼저, 문과 길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문을 먼저 통과하고 나서, 길을 계속해서 걸어가는 것입니까? 

렇지 않으면, 길을 다 지나고 난 뒤에, 마지막으로 통과하는 것이 문입니까? 

어떤 사람은, 문을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좁은 문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신앙의 결단을 의미하고, 그 뒤에 계속해서

우리가 천국을 향해서 걸어가야 할, 십자가의 길을, 좁은 길로 보는 것입니다. 

이 때는, 문이 먼저 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길이 먼저고, 문이 나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십자가의 길을 계속해서 걸어가고 난 뒤에, 마지막으로 천국을 향해서

통과해야할 관문이, 좁은 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의도는 문이 먼저냐, 길이 먼저냐, 를 따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생각해 보았습니다. 

좁은 문, 좁은 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말합니다. 

반면에 넓은 문, 넓은 길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 곧 인간적인 의를 의미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두 가지 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좁은 문과 좁은 길에 있는 사람들의 수가, 왜, 적다고 하셨습니까? 

천국이 비좁아,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요한 14장 2절에서,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온 우주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이 천국을 작게 만드셨겠습니까? 

천국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들어가도 넉넉한 장소입니다. 

그러면 천국이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까? 

그렇지도 않습니다. 벧후 3장 9절말씀을 보면,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고, 천국에 오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면 천국에 이르는 길과 문이 너무 좁아서, 한 사람씩만 통과할 수 있기 때문에, 

들어가는 수가 적은 것입니까? 그것도, 그렇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요한 6장 37절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라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오는 자는 누구라도, 좁은 문을 들어갈 수 있고,

좁은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에 걸어가는 사람의 수가 적습니까? 

14절을 보겠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찾는 사람들이, 적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스스로가, 그 문과 그 길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 문은 좁고, 그 길은 협착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복음의 편협성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고, 다른 종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은, 

너무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보다, 더 못된 행동을 할 때가 얼마나 많은줄 아냐고, 비아냥 거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누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능가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의를 받아야만 합니다. 

그 의를 받는 길은, 오직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에게,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의가 주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만이, 좁은 문과 좁은 길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종교를 가지고, 어떠한 삶을 살고 있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는,

넓은 문과 넓은 길에 서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로, 두 종류의 종말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넓은 문과 넓은 길의 종말은 무엇입니까? 13절에 기록된 대로 '멸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구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좁은 문과 좁은 길의 마지막은 무엇입니까? 14절에 기록된 대로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만,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백두산 꼭대기의 천지에, 지금 소낙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빗방울이 조금만 서쪽으로 기울어지면, 압록강을 따라서 서해로 흘러가게 됩니다. 

반대로, 그 빗방울이 조금만 동쪽으로 기울면, 두만강을 따라서 동해로 흘러가게 됩니다.

처음에는 똑같이 천지 속에 있었으나, 얼마 뒤에는, 수 만리나 서로 멀어지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로 간에 선택한 방향이 다르고, 서로 간에 가는 길이 달랐기 때문에, 

그 결과도 엄청나게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선택이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길을 가는데, 천 원짜리 한 장이 떨어져 있고, 그 옆에 만 원짜리가, 떨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두 장 가운데서, 어느 쪽을 택해서 줍겠습니까? 

점잖으신 체면때문에, 그냥 보고 지나치겠습니까? 이것저것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둘 다 주우면 됩니다.  땅 위에 떨어진 돈은, 둘 다 주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과 길의 선택은, 그렇지 않습니다. 둘 다 선택할 수 없습니다. 

한쪽을 선택하면, 다른 한쪽은 반드시 포기해야 합니다. 

여러개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의미의 choice 가 아니고, 좁은 문과 좁은 길을 선택하기

위해서, 넓은 문과 넓은 길의 삶을 단념하는 결단을 의미하는 decision 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오늘도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좁은 길로 걸어가라."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직은 그 문이 열려있고, 그 길이 열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 문이 닫혀지고, 그 길의 통행이 막힐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는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좁은 문과 좁은 길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넓은 문으로 들어가고, 넓은 길로 걸어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문이 닫혀지기 전에, 우리는 그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좁은 문과 좁은 길의 삶에대해, 산상설교를 통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심령은 가난해야 하며, 온유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남을 긍휼히 여기고,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희생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형제를 미워하거나, 마음으로라도 간음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 우리의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까지 돌려대라고 하셨습니다.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비판하지 말고, 서로 다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다른 사람을 대접해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곧 좁은 문과 좁은 길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희생과 고통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생명이 있으며, 은혜가 있습니다. 또한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마태 28장 20절에,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우리보다 앞서, 좁은 문과 좁은 길로 들어가신 예수님이,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면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시고,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3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롯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루는 아브라함이 자기 조카 롯을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서로 다투지 말자.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조카 롯을 위해서, 모든 것을 양보했습니다. 

그러나 롯은 삼촌 아브라함에게,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넓은 문과 넓은 길을 택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쪽을 택했습니다. 

그 결과가 그는 거기에서 지옥의 심연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넓은 문과 넓은 길의 종말은,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조카 롯을 위해서 모든 것을 양보했던, 아브라함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좁은 문과 좁은 길을 택한 아브라함에게, 무한한 복을 주셨습니다.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으며, 땅과 자손의 복을 주시고,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좁은 문과 좁은 길을 걸어가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그 길을 보장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좁은 문에 들어가고, 좁은 길을 걸어가는 자들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양보하며 살때, 참된 승리가 있으며, 하나님의 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이제는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 찬, 광야의 삶을 다 끝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풍요로운 은혜의 삶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우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