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태 7장 12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우리나라 YMCA운동의 선구자였던 월남 이상재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던 중 일경에 의해서 체포를
당했습니다.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줄기차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급기야 그를 고문
하던 일경이 지치고 말았습니다. 일경은 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독립만세를 부르지 말라고 매질을 하는데, 매를 맞으면서도 자꾸만 독립만세를 외치면, 어떻게
하겠다는거야?" 그때 이상재 선생의 답변은 이러했습니다.
"지금 내속에는 목구멍까지 독립만세로 꽉 차있소. 그러니 자꾸 건드리면 독립만세 밖에 나올것이
없습니다, 듣기 싫으면 더이상 나를 건드리지를 마시오."
백범 김구 선생도 독립운동을 하던 중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죄수의 신분으로 감옥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으면서 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는 「나의 소원」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하나님, 제 목숨이 다하기 전에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어서 우리 정부가 세워지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제 손으로 우리 정부의 뜰을 한번 쓸어보고 우리 정부의 유리창을 한번 닦아볼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민족은 애써 독립을 구하고 힘써 독립을 찾았으며 독립을 위해 하늘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의 간구에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기쁨을 안겨주셨습니다.
3년 뒤인 1948년 5월 31일 우리나라에서 국회가 처음으로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그 당시 임시의장을 맡았던 이승만 박사는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 민주국회 제 1차 회의를 열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사상을 떠나서 누구나 오늘 이 순간이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자랑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 일어나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텐데 이윤영 의원이 나와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윤영 의원은 목사님이었습니다. 국회의원 모두가 일어선 가운데 그는 단상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가운데 첫 머리에 나오는 일부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복을 주셔서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늘 역사의 첫걸음을
걷는 우리의 환희와 감격에 넘치는 이 민족적 기쁨을 다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올리나이다".
우리나라 국회 공식기록 제 1면에는 이승만 박사가 전 국회의원들에게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자는 내용과 이윤영 의원이 하나님께 드린 감사의 기도가 적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때의 기쁨과 감격과는 달리 지금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매우 혼란스러운 가운데 있으며 국민들의 마음은 갈라져 있습니다.
경제는 고용의 불안과 무분별한 포퓰리즘으로 한치 앞을 내다볼수 없습니다.
이러한 혼란과 불안으로 인하여 가정이 무너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모습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왜, 우리나라가 이런 위기적인 상황 속에 놓여 있어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유를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 바르게 사용하지 못하고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 사로 잡혀서 잘못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런 위기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먼저 내 몫만을 챙기고자 하는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배려해 줄줄 아는 따뜻한 마음
베푸는 마음 온유한 마음을 가지는데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일깨워주시는 교훈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황금률(the Golden Rule)로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세 문장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입니다. 둘째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입니다.
셋째로,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크신 은혜를 베풀어 주시어서 성경의 근본이요 핵심이며 요약인 황금률의
정신을 잘 지키면서 살아갈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째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대접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특별히 내가 잘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기를 바랍니다.
반면에 나의 잘못과 허물은 덮어주고 용서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에게나 약점도 있고 강점도 있으며 또 단점과 장점도 있습니다.
내게 부족한 것도 있고 또 내가 잘하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대접받는게 수월한 일은 아닙니다.
미국의 유명한 작가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가 쓴 글 가운데 "세계의 수도" (the Capital
of the World) 라는 스페인의 어느 가정 이야기를 다룬 책이 있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몹시도 나무랐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꾸지람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을 찾기 위해서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 보았지만 찾지 못했
습니다. 그래서 마드리드 신문에 큰 광고를 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파코야, 내가 너의 모든 잘못을 용서한다. 나는 너를 진정으로 사랑한다. 그러니 내일
12시 마드리드 신문사 앞에서 만나자." 그런데 "파코"라는 이름은 스페인에서 아주 흔한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날 12시에 아버지는 마드리드 신문사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랬더니 파코라는 이름을 가진 청소년들이 800명이 넘게 그 자리에 모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잘못을 용서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기 마련입니다.
또한 자신의 허물을 들추지 않고 덮어주기를 바라는 심정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의 허물을 들추어내고 다닌다면 얼마나 속이 상하겠습니까?
옛날에 한 재상이 있었는데 하루는 그 재상이 친구들을 불러서 술잔치를 벌였습니다.
그 재상에게는 그가 특별히 총애하는 매우 아리따운 기생이 있었습니다.
남자라면 그 기생의 손을 잡아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정도로 매혹적이고 예쁘게 생긴 여인
이었습니다. 한참 술잔치가 벌어졌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바람이 세차게 불더니 등불이 꺼져
버렸습니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캄캄했습니다.
그런데 그 틈을 타서 누군가가 그 기생의 손목을 덥석 잡았습니다. 그 기생은 깜짝 놀라서 자기의
다른 손으로 자기의 손목을 잡은 사람의 갓끈을 끊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누군가가 제 손목을 쥐었습니다. 제가 그 사람의 갓끈을 지금 끊어놓았습니다. 그러니 어서 빨리
불을 켜십시오" 그때 제상은 "불을 켜지 말아라. 자, 우리 모두 자기의 갓끈을 끊도록 하십시다."
그래서 각자가 자신의 갓끈을 끊고 난 뒤에 비로소 불을 켰습니다.
얼마나 현명하고 덕망 있는 재상입니까? 만일 그기생의 손목을 잡은 사람이 알려지게 되면 얼마나
난처하겠습니까?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 것입니다. 문제가 복잡해 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는 마음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지 못하고 들추어내는 마음은 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허물을 덮어주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유머 가운데 "얄미운 여자" 라는 시리즈가 있습니다.
10대에 얄미운 여자 ∼ 얼굴이 예쁜데 공부도 잘하는 여자,
20대에 얄미운 여자 ∼ 똑같이 성형수술을 했는데 티가 안 나는 여자,
30대에 얄미운 여자 ∼ 실컷 놀고도 시집은 잘 가는 여자,
40대에 얄미운 여자 ∼ 엄마로서 이곳 저곳 쏘다녀도 자녀들이 공부만 잘 하는 여자,
50대에 얄미운 여자 ∼ 실컷 먹는데도 아랫배가 안 나오는 여자,
60대에 얄미운 여자 ∼ 남편이 돈 많이 벌어놓고 죽어버린 여자."
다른 사람이 잘 되면 같이 좋아해 주어야지, 왜 얄밉습니까?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이 칭찬하는데
인색하다는 것입니다. 칭찬한다고 돈이 듭니까? 왜 칭찬하는데 인색하십니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습니다.
'캔 블렌차드'라는 사람이 미국에 있는 관광명소인 씨월드에 구경을 갔습니다.
커다란 범고래가 조련사의 신호에 따라서 멋진 쇼를 펼칩니다. 범고래는 무게가 3톤이 넘습니다.
또 사납기로 소문난 고래입니다. 그런데 조련사의 신호에 따라서 엄청난 무게의 범고래가 물 위로
뛰어오르고 풍덩 빠지는 연기를 펼쳤습니다. 나중에 쇼가 끝나고 난 뒤에 그는 조련사를 찾아가서
범고래를 어떻게 그렇게도 잘 훈련시켰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조련사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고래도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잘한다, 잘한다. 칭찬해 주면 더 잘합니다."
그는 거기에서 힌트를 얻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을 보면 "고래 반응"이라는 말과 "뒤통수치기 반응"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고래 반응"은 어떤 사람이 무엇을 잘할 때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무엇인가 잘못했다 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질책하지 않고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도록 유도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뒤통수치기 반응"은 반대입니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잘할 때는 무관심합니다.
그러다가도 무엇인가 잘못하고 실수하면 뒤통수를 치면서 질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고래 반응을 원합니까? 뒤통수치기 반응을 원합니까?
뒤통수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서로의 관계가 화목해질 수 없습니다.
누구나 다 고래 반응을 원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한 점을 인정해 주고 칭찬해 줄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 7장 1∼5절에서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비판을 받기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상대방이 잘못한 것이 있을지라도 그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해 줄줄 아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또 마태 7장 7∼11절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구할 때마다 항상 좋은것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선대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은 덮어주며 용서해 줄줄 알고 다른 사람의 잘한 점은 인정하고 칭찬해 줄줄아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입니다.
남에게서 대접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남을 대접하는 마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20장 35절에 보면, 예수님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신 말씀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대접을 받고자하는 마음보다는 대접하는 마음이 훨씬 더 아름답고 복된마음
입니다.
1919년 4월이었습니다. 3·1 운동 직후여서 나라가 매우 어수선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강제로 폐쇄를 당했습니다. 당시 수원에서 약 50리 떨어진 제암리에 있는 제암리 교회
도 역시 폐쇄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곳 주재소 서장이 교회에 전갈을 보내 왔습니다.
다음 주일부터는 예배를 드려도 좋다는 전갈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교인들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그동안 닫혔던 문이 열리고 깨끗하게 청소도 했습니다.
주일이 되었습니다. 약 30명의 교인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찬송가 364장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같은 고생이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일본 헌병들이 들이닥쳐서 교회 문을 밖에서 걸어 잠그고 못질을 했습니다.
그리고 목조건물로 된 예배당에 석유를 뿌렸습니다. 불을 질렀습니다.
삽시간에 교회가 불길에 휩쓸렸습니다. 깜짝 놀란 교인들은 유리창을 열고서 어린 아이들을 밖으로
내던졌습니다. 일본 헌병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아이들을 총으로 쏘아서 죽였습니다.
목사님과 교인들은 계속해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141장이었습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계속해서 찬송을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지붕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안에서 예배를 드리던 모든 교인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불에 타 죽었습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나서 한일국교가 정상화되어 처음으로 몇분의 일본 목사님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비극의 현장을 둘러보았습니다.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자기 나라로 되돌아갔습니다.
1년 동안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비극의 현장에 대해서 보고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의 기독교인들이라도 이 빚을 갚아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일천만 엔을 모금했습니다. 그 돈으로 제암리에 기념 교회를 세웠습니다.
1971년 9월 헌당예배가 드려졌습니다. 한국 교회의 여러 목사님들, 도지사, 시장, 그리고 지방의
유지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예배가 다 끝나고 마지막 축도송을 부를 때였습니다.
그곳에 참석한 일본 목사님들은 통곡하면서 앞으로 나아가 그곳에 있는 한국 목사님들을 얼싸
안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들이 저지른 끔찍한 만행과 우리에게 진 엄청난 빚을 무엇으로 값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이 모금한 돈입니까? 그들이 세운 기념 교회입니까? 그들의 눈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것으로는 그들이 빚을 갚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빚을 탕감해 줄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피해를 당한 우리의 자비로운 용서뿐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용서할 줄 아는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복 있는 민족입니다. 우리나라는 복된 나라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남에게서 용서받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남을 용서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남에게서 인정받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남을 인정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남에게서 존경받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남을 존경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대접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바뀌어져서 대접하고자 하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합니다만 예수님 당시에는 신약이 없었습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뒤에 제자들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하듯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율법과 선지자로 구분했습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 다섯 권을 '율법'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선지자' 로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율법과 선지자는 우리 입장에서 보면
구약성경이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성경전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황금률의 정신이 무엇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까? 황금률의 정신이 곧 성경 전체의 근본이요,
핵심이요, 요약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계명을 아무리 잘 지킨다 할지라도
황금률의 정신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근본이 흔들릴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다른 계명을 아무리 잘 지킨다 할지라도 이웃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3장 10절 말씀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갈라디아서 5장 14절 말씀입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
에서 이루어졌나니."
아고보서 2장 8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우리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면 다른 계명을 다 지킨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 주신 황금률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내가 바라는 대로 다른 사람에게 해 주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대접을 받고자 하는 그대로 다른 사람을 먼저 대접해 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랑으로 승리를 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왜 주님 앞에 나와 있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에 이끌림을 받아서 주님께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이웃에 대한
사랑을 형제에 대한 사랑을 가득가득 불어넣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지 누구를 대하든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라 대접하는 마음으로
베풀며 섬기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수 있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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