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태 5장 38∼4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중국의 유명한 복음 전도자였던 '워치만 니' 의 글을 읽어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젊은 시절 농사를 지으면서 살 때였습니다. 어느 해 날이 몹시도 가물었습니다.
그래서 양수기로 물을 퍼서 자기 논에 어느 정도 물을 채워 놓았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일찍
자기 논에 가보니까 물이 많이 줄어 있었습니다. 알고보니 이웃논 임자가 말도없이 논둑을 터놓아
그쪽 논으로 물을 빼내 가버린 까닭이었습니다.
몹시 화가 났지만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모른 척 하고 참았습니다.
그는 다시 양수기를 동원해서 자기 논에 물을 채워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아침 논에 나가
보았더니 또 물이 많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그냥 지나칠수 없다는 생각에 이웃 논주인을 찾아가
정중하게 항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웃 논 주인으로부터 사과를 받고 다짐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치만 니의 마음 속에 기쁨이 전혀 없었습니다.
자기가 분명히 잘못된 일을 한것도 아니고 또 이웃사람이 잘못했다고 사과도하고 앞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도 했는데 이상하게도 마음 속에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날 저녁 잠자리에 들기에 앞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한일도 아닌데 어찌 저의 마음속에 기쁨과 평강
이 없습니까?" 그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어떻게 일의 옳고 그름만을 따져서 옳은 일만 했다고 스스로 만족해 하느냐?
그보다 더 위대한 일을 생각 할 수는 없느냐?" 는 음성을 듣고 그는 깊이 생각했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 일찍이 양수기를 준비해서 먼저 이웃집 논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여러 시간 동안
물을 퍼 올려서 이웃 논에 충분하게 채워 주었습니다. 그 뒤에 양수기를 자기 논으로 옮겨서 자기
논에도 물을 채웠습니다. 나중에 그사실을 알게된 이웃 논주인은 마음에 큰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서 이웃집 논 주인과 그의 가족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악한 자를 대적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악으로는 악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럴수록 점점 더 악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고 도리어 더욱 더 꼬이고 복잡해 지고 맙니다.
반면에 말씀가운데, 선으로 악을 이기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 살펴봅니다.
첫째, 성경에 나타난 보상법의 정신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둘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셋째,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성경에 나타난 보상법의 정신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38절 말씀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An eye for an eye, and a tooth for a tooth." 너무나도 잘 알려진 말입니다.
고대 바벨론의 함무라비 법전에도 같은말이 나옵니다. 이법을 라틴어로는 전통적으로 lex talionis
곧 '탈리오의 법칙' 이라고 부릅니다.
여러 가지로 번역이 되지만 이시간에는 이것을 '보상법' 이라고 번역해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만큼 보상해 주어야 하고 내가 피해를 받은 만큼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다
는 뜻에서 그렇게 번역해본 것입니다.
그러면 보상법 즉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의 근본정신은 무엇입니까?
보상법의 정신은 하나님의 자비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옆으로는 이웃을 사랑
하는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 기록된 모든 계명의 바탕에는 사랑의 정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보상법의 근본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상법을 통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우리가 배울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보상법이 세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21장 24절과 레위기 24장 20절 그리고 신명기 19장 21절 말씀입니다.
가장 먼저 나오는 출애굽기 21장의 말씀을 찾아봅니다. 출애굽기 21장 22∼25절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임신한 여인을 쳐서 낙태하게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
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따라 낼 것이니라.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찌니라."
여기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몇 가지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는 말씀을 본래 누구에게 주셨습니까?
22절 끝부분에 보면 "재판장의 판결을 따라 낼것이니라" 고 말씀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보상법은
개개인이 이원리를 적용하도록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재판장의 판결원리로 주신 말씀입니다.
재판장이 공정한 판결을 내리기위한 원리로 주신것이 바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는 말씀
입니다. 따라서 개개인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 권한이 없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창세기 4장 23∼24절을 보면 라멕이 자기 아내들에게 뽐내면서 했던 말이 있습니다.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찐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라멕이 무슨뜻으로 이말을 했습니까? 누구든지 자기를 해하면 자기는 그에게 칠십 칠배로 되갚아
주겠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복수심이 바로 그렇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서 한마디 욕을 먹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마디만 해주면 직성이 풀립니까?
두 마디 세 마디 해야지 갚은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본심입니다.
만일 실수로 어떤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는데 그 사람이 내게 두 배 세 배로 보복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따라서 하나님은 나를 보호하시기 위해서 개인적으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도록
허용치 않으셨습니다. 반드시 재판장의 공정한 판결을 통해서만 보상이 가능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둘째, 재판장은 판결을 내릴 때 어떻게 판결을 내려야 합니까?
반드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고 판결을 내려야 합니다. 그 이상도 안 되고 그 이하도 안
됩니다. 내가 가해자라고 생각해 보십시다. 내가 실수로 다른 사람의 이를 부러뜨렸습니다.
그러면 재판장은 어떻게 판결을 내려야 되겠습니까? "이는 이로 갚으라"고 판결을 내려야 합니다.
그런데 재판장이 "이는 눈으로 갚으라"고 판결을 내리면 어떻게 됩니까?
너무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피해자라고 생각해 보십시다.
다른 사람이 내 눈을 상하게 했습니다. 그러면 재판장은 "눈은 눈으로 갚으라" 고 판결을 내려야
내가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판장이 "눈은 이로 갚으라"고 판결한다면 내가 얼마나 손해를 보겠습니까?
이처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기 위해서 이 법을 주신 것입니다.
셋째, 이 법을 통해서 우리는 이웃 사랑을 배울 수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눈을 상하게 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내 눈도 저렇게 상하게
되겠구나" 이러한 생각이 들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눈은 눈으로 갚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다른 사람의 이를 부러뜨렸습니다. 그러면 무슨 생각이 들겠습니까?
"내 이도 저렇게 부러지겠구나!" 그러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이로 갚아야 하기 때문
입니다. 따라서 이런법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몸을 내몸처럼 귀히여기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의 원리입니다.
이와 같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재판장의 판결
원리로 주셨고 재판장은 이 원리에 따라서 판결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통해서
이웃을 내 몸처럼 귀히 여기면서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같이 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는 말의 근본정신은 한 마디로 "사랑"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잘못 이해해서 잘못 가르쳤습니다.
둘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38절 말씀입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예수님은 말씀의 끝부분에서 "너희가 들었으나" 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어법은 긍정적인 차원이
아닌 부정적인 차원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지금까지는 이렇게 들어 왔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은 무엇이었습니까?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는 말씀 자체가 잘못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보상법을 있는 그대로 압축을 해놓은 것입니다.
말씀 자체는 잘못이 없습니다. 그러나 39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볼 때 그들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밝히 깨달아 알수 있습니다. 39절 말씀을 보십시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자를
대적하지 말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는 말씀에 근거해서 악한
자를 대적하라고 가르쳤는데 이것은 아주 잘못된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들은 보상법의 적용을 잘못했을 뿐만 아니라 보상법의 정신도 무시해 버렸습니다.
우선 그들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는 보상법의 적용을 잘못했습니다.
본래 보상법은 재판장의 판결의 원리로 주신 말씀이지 개인은 사사로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 권한이 없습니다. 반드시 재판을 통해서만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는 말씀을 개인에게
적용시켜 사람들에게 악한 자를 사사로이 대적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은 당시의 '열심당' 에 속한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는 유대인들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 헤롯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헤롯은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에돔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이런 헤롯이 왕이 되었으니 유대인들이 얼마나 싫어
했겠습니까? 이들 가운데 로마인들에게 복수를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이 생겼습니다.
그들에 의해서 조직된 것이 바로 '열심당' 이었습니다.
그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해 눈은 눈으로 갚고 이는 이로 갚고 폭력은
폭력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로마 군인들에 대항해서 폭력과 살인을 일삼았습니다.
그러면 로마 군인들은 당하고만 있겠습니까? 그들도 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게 되어서 서로의 마음에는 증오심만 커지게 되었으며 사회는
불안해지고 더욱 더 미움과 적대심으로 가득차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잘못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보상법의 근본정신은 한 마디로 '사랑' 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라고 주신 것이 바로 '보상법' 인 것입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근본정신을 망각해 버리고 "악한 자를 대적하라" 고 가르침으로서
개인이 복수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복수심을 조장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어디에도 원수를 미워하거나 당한대로 되갚으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오히려 신명기
32장 35절에 보면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원수를 갚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될 일은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며 원수에게도 선대
해야 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19장 18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
이니라." 또 잠언 25장 21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악한 자를 대적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입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보상법의 정신을
잊어버리고 사람들의 마음에 사랑대신 미움을 용서 대신에 복수를 심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은 그 세대를 가리켜서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여 "라고 탄식하시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39∼42절의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하거든 그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예수님은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보상법을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
하시면서 자신의 권세로서 보상법의 참된 의미를 우리에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개인적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 권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재판장에게 판결의 원리로주신 것임에도 불구하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개인들에게
악한자를 대적하라고 잘못 가르쳤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악한자를 대적할 권리가 없으며 도리어
원수라도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는 보상법의 근본정신이 사랑에 있다는 사실을
네가지 실례를 들어서 우리에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첫째, 39절 하반부입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누가 우리의 오른편 뺨을 때리면 맞붙어서 싸우지 말고 상대방이 더쉽게 때릴수 있도록 왼편 뺨도
돌려 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악한자를 대적하지 말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하라는 뜻입니다.
둘째, 40절입니다.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예수님 당시만 하더라도 옷이 매우 귀할 때였습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겉옷은 밤에 잠을 잘 때는 담요와 이불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의하면 겉옷을 전당 잡더라도 해가 지기 전에는 돌려주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겉옷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누가 재판을해서 값싼 속옷을 빼앗고자 하면 그것때문에 싸우려고 하지말고 값이 많이 나가는
겉옷까지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넓은 마음으로 빼앗기는 삶을 살지말고 주면서 살라는 뜻입니다.
셋째, 41절입니다.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당시에는 로마의 군인들은 군수물자를 운반하기 위해서 피지배국의 사람들에게 강제부역을 시킬
수 있는 법이 있었습니다. 오리에 해당되는 거리만큼은 임의로 동행케하고 그이상을 넘으면 대가
를 지불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성경에도 그 예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가시다가 결국 쓰러지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군병들은 구레네 사람 시몬으로 하여금 억지로 예수님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게
했습니다. 바로 그 법에 의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게하면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지 말고 기꺼이 십리까지 가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역시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넷째, 42절입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내가 가진 물질이라고 해서 내가 주인이 아닙니다.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누군가 도움을 필요로 하면 인색하게 거절하지 말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베풀면서 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의도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누가 내게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까지 주고 발가벗고 살라는 뜻입니까?
또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고해서 구걸하는 자에게
월급 봉투 째 다 주고 나와 내 가족은 굶주리며 살라는 것입니까?
내가 돈이 필요할때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친구에게 가서 돈을 빌리라는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깨뜨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보상법의 정신을 망각하고서 악한 자를 대적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강퍅해 있겠습니까?
누가 오른편 뺨을 치면 돌려 댈 생각을 하지 않고 상대방의 왼편 뺨을 치려고 했습니다.
속옷을 달라고 하면 그 사람의 겉옷을 빼앗으려고 했습니다. 베풀며 나누어 주기는커녕 오히려
남의 것을 빼앗아서 자신의 배를 채우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살벌하고 죄악이 가득한 세상의
모습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고 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그래서 악을 행하는 자에게도 대적하지 않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사랑을 베풉니다.
악으로는 결코 악을 이기지 못합니다. 오직 선으로만 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빼앗기지 마시고 나누어 주면서 사십시다. 억울하게 당하지 마시고 섬기면서 사십시다.
인색하게 살지 마시고 너그러이 베풀면서 살아 가십시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허물이 많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항상 너그럽게 대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사랑을 생각하면서 너그럽고 기쁜 마음으로 나누며 베풀며 섬기는
삶으로 날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므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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