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태 5장 31∼3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 2장 16절을 보시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
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은 이혼하는 것을 미워하신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마태 19장 6절에서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결혼은 우리가 임의로 맺은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신성합니다. 그런데 이혼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것을 사람이 임의로 나누는 것
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결혼이 신성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우리의 아내 우리의 남편을 더욱더 지극히 사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성경에 나타난 결혼의 원리에 대해서 살펴
봅니다. 둘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셋째,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이와 같이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는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특별히 부부 사이나 또는 가족들 사이에 더욱더 사랑이 깊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첫째로, 성경에 나타난 결혼의 원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구약성경 첫 머리에 나오는 창세기 1장과 2장을 보면 결혼의 기원에 관한 설명이 나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 가지의 중요한 결혼의 원리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 결혼은 신성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친히 짝지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독처하는 것을 보시고 좋지 않게 여기시고 그래서 아담을 위해 돕는 배필로 하와를
만드시고 그 두 사람을 하나님은 짝지어서 부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결혼은 하나님이 맺어주신 것임으로 결혼은 신성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결혼은 독점적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명의 남자와 여러 명의 여자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남자와 한 여자만을 만드시고 그 두 사람을 짝지어서 부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한 번 살아보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갈라서고 다시 다른 사람을 택해서 살 수 있는 여지를 처음
부터 만들어 놓지 않으셨습니다. 남자는 자기 아내만을 사랑하고 여자도 자기의 남편만을 사랑하라
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결혼은 부부 사이에 독점적인 관계가 맺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 결혼은 영속적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연합해서 둘이 한몸을 이루는것이 바로 결혼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연합해서 하나가 된다는 증거가 바로 자녀입니다. 그래서 부부는 몸도 하나고 감정도
하나고 생각도 하나고 모든 것이 하나인 것입니다.
이렇게 연합해서 하나가 된 부부가 이혼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자기의 몸을 둘로 쪼개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부부는 인위적으로 분리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아내와 남편이 서로간에 변함없이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둘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31절 말씀입니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이혼을 너무나도 쉽게 생각했습니다. 이혼을 하면서도 수치스럽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으며 또한 죄의식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혼을 하나의 용기있는 행동이나
미덕이 되는 것처럼 간주했습니다. 심지어는 원치 않는 아내를 내보내는 것이 종교적인 의무로
까지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그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의 영향
이었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그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친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나쁜 아내는 남자에게 있어서는 문둥병과 같다. 어떻게 문둥병을 치료할 수 있는가?
아내와 이혼하는 것이 문둥병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또 어떤 서기관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만일 어떤 남자에게 나쁜 아내가 있으면 그와 이혼하는 것이 종교적 의무이다.
( If a man has a bad wife, it is a religious duty to divorce her.)
그러면 "나쁜 아내" 곧 "버려야 할 아내"는 누구인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대로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할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람들 앞에서 남편에게
무안을 주었을 경우도 이혼의 사유에 해당이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아내가 음식을 만들다가 요리를 태웠거나 음식에 소금을 너무 많이 넣어서 음식의 맛이
제대로 나지 않을 경우도 이혼의 사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더니 나중에는 별의별 사유를 다 만들어서 아내를 내버렸습니다. 그저 아내가 싫으면 특별한
사유 없이도 무조건 내보낼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쓰여진 이혼증서를 보면 이혼 당사자들의 이름과 두 증인의 이름을 기록하도록 되어 있었
습니다. 그리고 이혼증서를 받은 여자는 다른 남자와 결혼해도 좋다는 내용만 기록되어 있을 뿐
입니다.
본문 31절을 보겠습니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증서를 줄것이라 하였으나."
여기에 이혼사유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단 한 가지 조건만 있을 뿐입니다.
이혼증서만 써주면 남자는 언제라도 거리낌없이 자기 아내를 내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혼은 전혀 수치스럽거나 죄의식을 느낄 필요도 없고 오히려 용기있는 행동이요 종교적인 의무로
까지 간주되어 왔습니다. 이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구약의 율법을 아전인수격으로 잘못 해석
한 결과였습니다.
성경에서 이혼증서라는 말이 신명기 24장 1절에 처음으로 나옵니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 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이혼할 수 있는 한 가지 사유가 있었는데 아내에게서 수치 되는 일이 발견될 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것을 음행이라고 분명하게 못을 박았습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점점 확대해서 해석하더니 나중에는 이것조차도 아예
빼버렸습니다. 그저 살기 싫으면 무조건 아내를 내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신명기 24장 1절의 중반부 말씀입니다.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런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비록 아내에게 수치 되는 일이 발견될지라도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면
얼마든지 관용의 마음으로 아내의 허물을 덮어주고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내를 내버리는 것이 무슨 용기있는 행동이요 종교적인 의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은 가급적이면 이혼하지 말고 같이 살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 아내가 기쁘지 않아서 부득이 내보내야 할 경우에는 단서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이혼증서를 써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신명기 24장 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당시에는 여자에게 경제력이
없어서 혼자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이혼증서가 주어진 목적은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신명기 24장 3∼4절의 말씀을 봅니다.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찌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찌니라."
남자는 일단 자기 아내를 내보낼 경우 다시 그 여자를 자기 집으로 들여오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재결합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율법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이혼을 쉽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보내기 전에 신중하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이 본래 뜻하고 있는 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가르쳤던 것처럼 이혼을 조장하고
있는것은 결코 아닙니다. 가급적이면 이혼하지 못하도록 막고자 하는것이 율법의 본래 취지입니다.
그리고 이혼증서도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악용해서 남자들의 정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전락을 시키고
만 것입니다. 이와같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은 당시 사람들을 성적 방종의 상태로
몰아넣고 있었으며 도덕적으로 문란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단적인 예가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동네에 사는 여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자그마치 남자들로부터 다섯 번씩이나 이혼을 당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지긋지긋 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그 시대 사람들을 가리켜서 여러 번씩이나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여" 라고 질책하시면서 탄식하셨던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32절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님은 지금 자신의 권세로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신 분입니다.
율법의 수여자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권세로서 신명기 24장 1∼4절에 기록되어 있는 율법의
참뜻을 지금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율법에 의하면 간음한 사람은 남녀를 불문하고 돌로 쳐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록 음행을 저질렀다 할지라도 죽지 않고 살아
남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이혼입니다.
그러니까 이혼도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아내가 음행하지 않았는데 정당한 이유 없이 아내를 내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위적으로는 헤어졌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원래의 혼인 관계는 원칙상 그대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마음에 품은 음욕을 간음이라고 보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혼을 간음이라고 보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
에게 말씀하시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이혼은 많은 간음을 초래하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린 여인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그 여인을 향해서 요한 8장 11절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예수님은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덮지 못할 죄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그 여인을 향해서 결론적으로 요한 8장 11절의 하반부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어쩔 수 없이 지난날에 쓰라린 경험을 했어도
또 다시 같은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도는 무엇입니까?
"내 배우자가 음행을 저질렀으니까 이제는 안심하고 갈라서도 되겠구나. 성경에 위배되는 일이
아니구나." 그것을 지금 의도하고 계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구약의 호세아서를 보면 호세아의 아내 고멜이 얼마나 음란한 여인이었습니까?
음행을 저질렀습니다. 남편과 아이들을 내버리고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갈라서라."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내라 할지라도 용서하고 데리고 와서
함께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한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이 말씀을 통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의를 깨뜨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고 가르침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온통 음란한 상태로
몰아넣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은 율법을 잘지킨다고 스스로 의롭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그런 외식적인 의를 가지고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천국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의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야만 천국의 시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강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이혼을 너무나도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혼하는 가장 큰이유는 성격차이가 32%로 제일
많고 다음은 시댁과의 관계가 18%를 세번째가 배우자의 성적인 부정이 17%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경제적인 이유라든지 기타 의견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혼은 하나님이 친히 짝지어 주신 신성한 것입니다. 우리가 임의로 맺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가장 좋은 배필을 우리에게 허락하셨다는 이
믿음을 우리가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아내만을 남편만을 사랑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결혼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임의로 나눌 수도 없지만 임의로
맺으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결혼하지 않은 미혼분들도 내 임의로 맺으려고 한다면 문제가
생길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든지 이방 여자들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으나 이삭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리브가를 짝지어 주시기까지 무려 40년을 믿음으로 기다렸습니다.
이 믿음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서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사도 바울처럼 여생을 혼자 살기로 작정하신 분들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에서 이것은 특별한 사람에게 주신 특별한 은사임을 밝혔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특별한 은사를 주셨다고 생각하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
으로 삼으시고 예수님을 더욱더 사랑하시고 예수님을 위해서 더욱더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혼은 신성하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고 늘 우리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우리의 아내 우리의 남편을 더욱더 사랑하고 가족 간의 사랑이 더욱
더 돈독해 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의 가정이 늘 화목하고 주님 주시는 평강으로 충만하시기를
다시 한번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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