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태 5장 43∼4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중국 선교의 문을 열었던 영국의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 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그가 한 번은 중국 선교의 동역자들을 구하기 위해서 잠시 귀국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서 많은
사람이 지원을 했습니다. 그래서 허드슨 테일러는 그들에게 선교사로서의 사명감이 있는지 확인
하기 위해서 이러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러분은, 왜 중국에 선교사로 가려고 하십니까?"
그들은 한 사람씩 답변을 했습니다.
"저는 중국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곳에 선교사로 가려고 합니다."
"저는 중국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합니다."
"저는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고 하신 지상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선교사로
지원했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자기의 생각을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허드슨 테일러는 그들의 답변에 뭔가 부족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지원자
가운데 한 사람이 그에게 되물었습니다. "그러면 선교사님은 왜 중국에 선교사로 가셨습니까?"
그때 허드슨 테일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저는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 대한
저의 사랑이 저를 그곳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의 말대로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과 중국 사람들을
진실로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중국 사람의 옷을 입고 중국 사람과 똑같이 행동하면서
중국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친절하거나 잘 해주는 사람은 사랑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무시하거나 악하게 대하는 사람은 미워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는 사랑해야할 이웃과 미워할 원수가 확연하게 구분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이나 악을 행하는
사람이나 누구든지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에게는 이웃과
원수의 구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우리의 이웃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변의 모든 사람을 우리의 이웃으로 삼고 누구나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웃 사랑의 원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둘째로,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오늘도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첫째로,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웃 사랑의 원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43절 말씀입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이 말씀은 구약성경 레위기 19장 18절에 기록이되어
있습니다. "원수를 갚지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이웃 사랑하기를 네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 말씀은 신약성경에도 많이 인용이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인용하셨고 사도 바울과 야고보도 역시 이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레위기 19장 18절의 말씀에서 말하는 이웃 사랑에 대한 두 가지 원리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랑의 대상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만 우리를 미워하는 원수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레위기 19장 18절은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사사로이 원수를 갚을 권한이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동포를 원망할 권리도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사랑할 책임만 주어졌습니다.
친구는 친구니까 사랑해 주어야 하고 원수는 우리를 미워하니까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성경 말씀 두 곳을 찾아 보겠습니다. 같은 내용이지만 차이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두 곳의 말씀을 읽으면서 그 차이가 무엇인지 스스로 발견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신명기 22장 1∼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네 형제의 소나 양이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 본 체 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그것들을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 네 형제가 네게서 멀거나 또는 네가 그를 알지 못하거든 그 짐승을
네 집으로 끌고 가서 네 형제가 찾기까지 네게 두었다가 그에게 돌려 줄릴찌니,
나귀도 그리하고 의복이라도 그리하고 형제가 잃어버린 어떤 것이든지 네가 얻거든 다 그리하고
못 본 체하지 말 것이며 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 그것을 일으킬찌니라."
이번에는 출애굽기 23장 4∼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찌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그것을 버려 두지 말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릴찌니라."
두곳 말씀가운데 어떤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신명기 22장 1∼4절에서는 사랑해야할 대상이 우리의 형제였습니다. 반면에 출애굽기 23장 4∼5절
에서는 같은 내용이지만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원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형제에게도 사랑을 베풀어야 하지만 우리를 원수같이 취급하는 사람에게도 역시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에는 제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랑은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나 느낌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사랑은 언제나 구체적으로 실천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말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19장 18절에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합니다.
우리의 몸이 주리고 목말라 할 때는 어떻게 하니까? 먹이고 마시웁니다.
또 몸이 추워할 때는 옷을 입힙니다. 몸이 피곤함을 느낄 때는 잠을 자거나 쉬게 합니다.
이와같이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도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25장 21절에서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웃 사랑이란 뭔가가 필요한 자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것입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행함과 진실함이 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떤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그만 강도를 만났습니다.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실컷 얻어맞아 거의 죽게 된 채로 길바닥에 내버려졌습니다.
그런데 그 옆을 제사장도 지나가고 또 잠시 뒤에는 레위 사람도 지나갔습니다.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이나 모두 유대인들입니다. 지금 자기 동족 유대인이 강도를 만나서 다
죽어 가는 채로 버려져 있는데도 그냥 못본체 하고서 피해 지나갔습니다.
어쩌면 마음 속으로는 불쌍하다는 생각은 가졌을런지 모르지만 그것은 사랑이라 말할수 없습니다.
사랑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잠시 뒤에 한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은
서로 원수같이 여길 때였습니다. 서로 미워하면서 상종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당한 유대인을 그냥 피하여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대인에게 다가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의 상처에 붓고 싸매어 주었습니다. 그는 강도 당한
유대인을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까지 데리고 와서 하룻밤 같이 유하면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제사장 레위 사람 사마리아 사람 가운데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참된 이웃이겠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사랑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준 사마리아 사람만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레위기 19장 18절 말씀은 이웃 사랑의,두 가지 원리를 말씀해 주었습니다.
첫째, 사랑의 대상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이든 악을 행하는 사람이든
우리는 구분 없이 사랑을 해야 합니다.
둘째, 사랑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웃 사랑에 대한 두 가지 원리를 모두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레위기 19장 18절의 말씀을 자기들이 편한 대로 왜곡적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리고는 백성들을 잘못 가르쳤습니다.
둘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43절입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미 여러 차례 말씀 드린대로 "너희가 들었으나." 이것은 예수님이 긍정적인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부정적인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까지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이러한 가르침을 받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러한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 5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살인에 대한 것 둘째는 간음에 대한 것 셋째는 이혼에 관한 것
넷째는 맹세에 대한 것 다섯째는 보상법에 대한 것 이었습니다.
이제 여섯번째로 예수님은 '이웃 사랑' 에 대한 것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받은 유전에 따라서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이러한 가르침은 레위기 19장 18절에 나타난 성경의
원리와 비교해 볼 때 그들은 두 가지 원리를 모두 무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레위기 19장 18절에 없는 말씀을 임의로 집어넣었으며 또 그들의 편의를 위해서 중요한
말씀을 빼버리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사랑의 원리를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이웃만 사랑하라"고 가르쳤으며 또한 그들의 가르침을 부각시키려고 성경에
없는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을 임의로 덧붙였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사랑의 대상을 자기의 이웃으로만 제한하는 과오를 범한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와서 시험적으로 질문을 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율법사는 서기관의 별명입니다.
서기관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손으로 베끼는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들은 손으로 율법을
베끼다 보니까 자연히 율법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질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 을 다른 말로 '율법사'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율법사는 예수님에게 이러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이 질문은 무엇을
의도합니까? 그는 자기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따로 있고 자기가 미워해야 할 원수가 따로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서 예수님께 질문한 것입니다.
아무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웃만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라고 잘못 가르쳤습니다.
그런 잘못된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서 자기 동족만이 사랑해야 할 이웃이라고 생각하고 이방인의
경우에는 무조건 미워해야 할 원수로 취급을 했습니다.
특별히 그들은 자기들을 억압하고 있는 로마 사람들을 아주 미워했습니다. 또한 본시는 자기들의
동족이었던 사마리아 사람들까지 미워했습니다. 그 이유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몸속에 이방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은 세리와 같이 이방인의 편에서서 일하는 사람들도 이웃의 개념에서
제외시켜 버렸으며 또한 율법을 고의적으로 범하는 창기와 같은 여자들도 사랑해야할 이웃의 개념
에서 제외시켰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들의 마음 속에 미움으로 가득하게 되었으며 증오심만 쌓였
습니다. 그러니 당시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악해지고 강퍅해 졌겠습니까?
둘째, 그들은 사랑을 구체적으로 나타내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로만 사랑했습니다. 얼마나 외식적입니까? 앞에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아마도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도 말로는 "사랑하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족인 유대인이 강도를 당했음에도 그들은 못본척 피해서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들은 레위기 19장 18절에 없는말씀을 덧붙였을 뿐만 아니고 꼭 있어야할 중요한 말씀을 고의적
으로 빼버렸습니다.
레위기 19장 18절에서는 분명히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그들은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 대신에 그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만 가르쳤습니다.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사람들에게 보이기를 좋아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서 영광 받기를 좋아했으며 잔칫집에서도 상좌에 앉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의롭게 여겼으며 자신들은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이 성전에서 했던 기도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생각을 했으며 다른 사람과 다른 것에 긍지를 느끼며 자부심을 가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다른 사람을 자신과 똑같이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고의적으로 빼버렸습니다.
그러니 이런 외식적인 의를 가지고 어떻게 천국의 백성이 될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44절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님은 모세를 통해서 우리에게 레위기 19장 18절의 말씀을 주신 분이십니다.
율법의 수여자이신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웃 사랑의 원리를 말씀해 주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대상에는 제한이 없기 때문에 우리를 선대하는 이웃도 사랑해야 하지만 우리를 원수로
취급하고 박해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할 이유를 두 가지로 일깨워 주셨습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45절 말씀입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의 구분이 없이 또한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의 구분이 없이 햇빛을
비춰주시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주십니다. 하나님은 악인에게도 불의한 사람에게도
햇빛과 비를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하나님 아버지의 너그러우심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면서 선을 행하는 사람만 사랑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은 미워하고
원수로 여긴다면 어찌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둘째, 우리는 천국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46∼47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가지고 천국의 백성이 될수 없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천국의 백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웃도 사랑해야 하지만 우리의 원수까지라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이웃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 기도, 선행, 문안, 이 세 가지로 나옵니다.
첫째, 44절 말씀 하반부의 '기도' 입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누가 우리를 박해한다고 해서 미워하거나 저주하지 말고 그를 위해서 축복하는 기도를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이 바뀌고 자신의 마음 속에 평안이 옵니다.
누가 우리를 박해하면 본능적으로는 미워하는 마음이 생길 수밖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이해하게 되고 긍휼히 여기며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였던 찰스 스펄젼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도는 긍휼의 선봉이다.("Prayer is the forerunner of mercy.")
우리가 어떤 사람을 위해서 축복하는 기도를 하게 되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우리의 마음
속에 생기게 마련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가 미운 생각이 듭니까?
그를 위해서 진정으로 축복하면서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의 마음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뀌어질 것입니다".
둘째, 45절 말씀의 '선행' 입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하나님은 악인이라도 불의한 자라도 햇빛을 비추어 주시고 때에 따라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주십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무언가 필요한 자에게 필요한 그것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말과 혀로만 하는 사랑은 없습니다.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셋째, 47절 말씀의 '문안' 입니다.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나를 미워한다고 해서 못마땅하게 여기고 못 본척 하면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합니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서 악수를 청하고 먼저 찾아가서 인사해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성경에 나타난 이웃 사랑에 대한 두 가지 원리를 말씀해 주신 뒤에
48절에서 결론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결코 온전하지 못했으며 외식적이고 자기 중심적이었습니다.
또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온전한 의를 원하고 계시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온전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온전해질 수 있습니까? 인간의 의는 아무리 쌓아도 온전해 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부자 청년에게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청년은 어렸을 때부터 성경의 모든 계명을 다 지켜왔다고 자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청년에게 "너에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의는 아무리 쌓아놓아도 하나님 앞에서는 부족한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온전해 질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하나님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시지 않으십니다. 온전한 의를 요구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온전한 의를 또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온전케 하셨습니까?
예수 믿는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의가 있습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 곧 온전한 의가 있기 때문에 천국의 백성들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의 인간적인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도 더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없는 온전한 의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이 의가 우리를 천국의 백성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중히 여기며, 이 세상의 부귀, 명예, 행복과도 바꿀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옷입고 있기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 땅에 꽃피워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행하며 베푸는 사랑으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와같은 역사가 우리삶 가운데 날마다 나타나고 보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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