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10:13)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Everyday, people who encounter miracles,,,

**행함.야고보서

위로부터 난 지혜 (약 3:13-18)

Andy1954 2022. 6. 25. 08:31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늘, 마음으로는 원하지만, 육체가 약하다고 핑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믿음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나약하고,

무기력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우리의 영혼을, 능히 거듭나게 하는 능력을 가진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과 삶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것을, 능히 변화시킬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보여준, 믿음의 능력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아무리 악하고, 못된 사람이라도, 주님께서, 그 안에 믿음을 주시면, 그 사람의 생각과 삶이,

완전히 바뀐 것을 볼수 있습니다.

살인자가, 천사와 같은 사람으로 바뀌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사람이 됩니다.

남의 것을 빼앗던 강도가, 이제는 남을 위해서 헌신하며, 섬기며, 사는 사람이 됩니다.

평생 동안을, 자신의 고집 속에서, 살아왔던 사람도, 예수를 믿고 영접함으로,

자신의 주장과 고집을 내려놓을 뿐만 아니라,

또한, 조상 대대로 믿어왔던, 우상을 버리는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믿음의 능력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 사람을 온전히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능력의 역사가, 우리에게도,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를 기록한, 야고보 사도도, 이 믿음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주님을 믿기 전에는, 예수는 자기와 함께 자라온, 형에 불과했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자기 형을,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구주로 믿고부터는,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그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달라졌습니다. 그의 세계관이 달라졌습니다.

그의 모든 것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믿음의 능력을 체험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요, 헛된 믿음이라,고 단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먼저, 우리의 "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것이, 혀인데,믿는 사람의 혀는,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혀마저도 제어하며 다스리는 것이,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먼저, 말하는 습관이나 방법부터, 바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때, 바로 혀의 기능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헐뜻고, 파괴하던 혀가, 다른 사람을 세워주며, 위로하는 혀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야고보 사도는, 우리의 지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지식도 있어야 하겠지만, 지식을 우리의 삶에, 잘 활용하는 능력이, 바로 지혜입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부모님들은, 우리의 자녀들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똑똑하고, 지혜로워, 공부 잘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좀 더 좋은 직장에서, 대접받으며, 살아가게 되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남보다 많은 것들을 가르칠려고 합니다.

학교수업으로는, 뭔가 부족한것 같아서, 많은 사교육들을 시킵니다.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외국으로 조기 유학을 보내는가 하면, 

학원비가 아무리 비싸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내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러한 것들이, 우리 자녀의 경쟁력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4장 7절 말씀을 보면,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잠언 8장 11절 말씀에서는,

"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무릇 원하는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음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야고보서 1장 5절 말씀에도,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고 하였습니다.

지혜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도, 제자들을 세상 가운데로 보내시면서,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분명,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혜로와야 합니다. 어리석거나, 어리숙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두 종류의 지혜가 있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세상적인 지혜가 있고, 위로부터 난 지혜가 있습니다.

우리의 입에서도, 찬송이 나는 입과 저주가 나는 입이 있는 것처럼,

지혜 역시, 세상적인 지혜와, 위로부터 나는 하늘에 속한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혀가, 파괴적이요, 악독이 가득했던 것처럼, 세상에 속한 지혜 역시,

파괴적이고, 독이 가득합니다.

오늘 본문 15절에 보면, 이 세상적인 지혜를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 보면, 얼마나 똑똑한 사람이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질 수도 있고, 더 높은 위치에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혜가, 하늘에 속한 지혜가 아니라면, 그 지혜는, 자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한,

정욕적인 지혜이고, 다른 사람들을 파괴하는, 마귀적인 지혜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세상적인 지혜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14절에 보면, 그 지혜에는,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데, 거기에 시기와 다툼이 있다면, 그것은 하늘에 속한 지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기"라는 것은, 내가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남이 나보다 잘 되거나, 높아지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생각이, 세상에 속한 지혜인 이유는, 주님의 말씀과 정면으로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마태 23장 12절에서,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려면, 우리 자신을 부인하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였습니다.

"시기" 라는 것은 분명, 자신이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분명히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에, 시기하는 마음으로 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세상에 속한

지혜(생각)인줄 아시고, 멈추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핑게를대며, 시기심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주님의 일이라도, 우리 안에 시기심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의 생각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지혜는 "다툼"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다툼은, 시기와 함께, 붙어 있는 것입니다. 시기심이 있기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툼으로 말미암아,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분쟁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때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데, 그 몸이 나뉘이는 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자 하는데, 다툼이 일어나고, 분쟁이 일어난다면,

그 일은, 위로부터 난 지혜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일보다, 하나됨이 먼저입니다. ㅏ하나됨을 먼저 회복한 이후에,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4장 3절에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그리스도의 몸을, 나뉘이게 하는 것보다, 더 악한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적인 지혜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인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지혜에는, 거짓이 들어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데, 그 안에 속임이 들어 있습니까?

그것은 세상적인 지혜입니다. 마귀적이고, 정욕적인, 지혜입니다.

거짓은, 마귀에게 속한 것입니다. 마귀의 닉네임이, 속이는 자입니다. 거짓의 아비입니다.

이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지혜로 말미암은 일들의 결과는, 요란함과 악함입니다.

그것이 세상에서 보여주고 있는, 모습들입니다.

그러한 것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맞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합니다. 일보다, 사람이 더 귀한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사람을 파괴시키고, 희생시켜야 한다면, 그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늘 이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일에 대한 욕심이, 자칫 세상적인 지혜로, 일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진 일들은, 가치가 없습니다.

뭔가 이룬 것 같지만, 나중엔, 아무 쓸모도 없고, 남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위로부터 난, 하늘의 신령한 지혜는, 어떤 것입니까?

17-1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위로부터 난, 지혜의 모습은, 첫째 성결합니다. 성결은, 성도의 능력이요,

교회의 능력입니다.

제 아무리, 그 방법이 좋고, 기가 막히다 하더라도, 성결하지 못하면,

그것은, 위로부터 난 지혜가 아닙니다.

이것은 교회가,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도 그렇고, 성도가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제시한다 하여도, 그것을 따라가면, 안되는 것입니다.

어떤 유혹이 있어도, 이 성결함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위로부터 난 지혜에는, "화평"이 있습니다.

세상적인 지혜의 모습에는, 다툼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인 것입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교회를 하나로 만드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에 화평이 따르는 것은, 자기가 부인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죽기 때문입니다.

다툼이 일어날려고 할 때, 하나됨이 깨질려고 할 때에,

내가 부인되고, 죽어지기 때문에, 화평함이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8의 말씀을 보면,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위로부터 난 지혜입니다.

그리고 위로부터 난 지혜는, "관용" 입니다.

관용은, 죄를 눈감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우리의 허물대로 대하신다면, 누가 주님 앞에 온전히 설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죄를 분명히 알게 하시고, 그 죄에서 떠나기를 원하시지만,

죄인된 우리를, 품어 주십니다. 그 사랑으로,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벧전 4장 8절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로부터 난 지혜는 "양순" 합니다.

良順(어질양, 순한 순)은, 겸손하며, 수용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못된 기질 가운데, 튀는 기질이 있습니다.

전체의 의견과 내 의견 사이에, 좀 괴리가 있어도,

구태여, 자신의 의견을 부각시켜, 분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의 의견에, 브레이크를 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러한 태도가, 그 회의를 발전시킨다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전체의 의견이라고, 무조건 따라가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습관처럼,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분명히 위로부터 난 지혜가 아닙니다.

자신을 죽이고, 전체를 따라가는 것도, 지혜인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자기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3절을 보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교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로부터 난 지혜는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합니다.

긍휼은, 막연하게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먹을 것이 없는 자에게, 배부르게 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빵을 떼어서 나누어주는 것이, 긍휼인 것입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에는, 이 긍휼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긍휼로 말미암는, 선한 열매가 가득합니다. 마음이나 입술로하는 긍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과나 열매가 보여지는, 긍휼인 것입니다.

그래서, 위로부터 난 지혜로 살아가는 자에게는, 선한 열매가, 늘 가득한 것입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주변의 사람들을에게도, 풍성함을 느끼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로부터 난 지혜는 "편벽과 거짓"이 없습니다.

편벽이라는 것은, 무엇을 차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편벽이 없다는 것은, 공정하다는 것입니다.  또는 흔들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김에 있어서, 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위로부터 난 지혜에는, 거짓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로부터 난 지혜의 결과는, "화평함과 의의 열매" 입니다.

세상적인 지혜의 결과과 "요란함과 악함" 이었다고 한다면,

위로부터 난 지혜의 결과는, 화평함과 의의 열매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 말씀을 보면,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인 지혜로 말미암는 것들을 심으면,

요란함과 악함과, 허무함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위로부터 난 지혜로 말미암는 것들을 심을 때에는, 화평함과 의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은, 자신들이 꽤나 똑똑한 줄 압니다.

자기의 똑똑함 때문에, 많은 것을 얻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얻는 것 같으나, 실상은, 많은 것을 잃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야말로, 참으로, 어리석은 자인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에, 유혹되지 마십시오. 우리의 죄성은, 항상 그것을 부추깁니다.

삼가, 우리 자신의 생각과 삶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위로부터 난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때론, 내가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어리석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무능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난 지혜로 살아가는 자들은, 의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고후 6장 9-10절 말씀을 보면, 위로부터 난 지혜로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이 나옵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살아 있는 자요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는 자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자요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자요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들입니다. 

위로부터 나는 지혜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나하시는, 하나님께, 이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배우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날마다 풍성한 의의 열매를 거두며, 주님의 거룩하심을 본받아, 복된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 천국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