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10:13)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Everyday, people who encounter miracles,,,

**행함.야고보서

믿는 자의 혀 (약 3:1-12)

Andy1954 2022. 6. 23. 09:36

우리의 믿음은,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그 놀라운 믿음이, 우리 안에 거하고 있는데,

우리에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단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가장 먼저, 우리의 언어 생활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1장 19절 말씀에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라' 고 하였습니다.

1장 26절 말씀에서는,

'누구든지, 자기 혀를 재갈먹이지 않으면, 그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하였으며,

그리고, 2장 12절 말씀에서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을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바꾸기 힘든 것 중에 하나가,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말처럼, 쉽게 남을 파괴시키는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미국의 한 잡지에, 이런 글이 쓰인 적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나'는, 무엇을 가리키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힘과 기술을 가지고 있다.

나는, 죽이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다.

나는, 가정과 교회와 국가를, 파괴하고, 수 많은 사람의 인생을, 파괴하였다,

나는, 바람의 날개를 타고, 여행한다.

아무리 순결한 사람도, 내게는 무력하며 , 아무리 정갈한 사람도, 내게는 무력하다.

나는, 진리와 정의와 사랑을, 경멸한다.

나는, 나의 희생자를 전 역사와 전 세계에, 갖고 있으며, 헤아릴수 없을 만큼, 많은 노예를 거느린다.

나는, 결코 망각하지 않으며,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말하는 '나'는 누구일까요? 정답은 '중상모략' 이라고 합니다.

이 중상모략은, 바로, 우리의 혀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처럼 혀의 위력은, 대단한 것입니다.

혀를 잘못 놀리므로 인해서, 입는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에서, 혀라고 하는 것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보통, 혀를 말할때에, '세 치 혀'라고 말을 합니다. 세 치면, 약 10센치미터 정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처럼 작지만, 그 위력은, 우리 몸의 그 어느 곳보다도, 대단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고보 사도는, 믿는 자들의 행함의 문제를 다루면서,

가장 먼저, 이 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앞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먼저, 2절 말씀에 보면, '우리가, 다 말에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모든 사람이 다, 말에 실수가 많다는 것입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말의 실수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까닦에, 우리는 한편으로는, 위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빌미로 해서

온전하지 못한 언어생활을, 변명하려 하거나, 합리화시키려고 해서는, 곤란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말의 실수가 다 있으니, 말에 실수를 하더라도, 너무 상심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성도는,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에,

그 믿음의 능력이, 우리의 혀까지도, 다스려야 한다,는 말씀을, 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의 능력이, 우리의 혀까지도, 지배하고, 

우리의 혀를, 길들이는데 까지, 나아가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런 권면의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유대사회에 있어서, 선생이 된다고 하는 것은, 가장 존경받는 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유대사회에서는, 선생을 '랍비'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랍비라는 말의 의미는, '큰 사람' 또는 '위대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최고의 꿈은, 선생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지금, 그런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선생된 랍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고, 존경하고, 따라야 하지만,

반면에, 책임도 그마 만큼 커져서, 더 큰 심판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큰 일을 맡기신 만큼, 그 책임도 크다는 것입니다.

선생이 되면, 자연히 말을 많이 하게 되고, 말을 많이 하다보면,

그 만큼 말의 실수도, 많을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선생이, 더 큰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은, 아마도, 말의 실수로 인한, 심판을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의 실수를, 더 적게 하기 위해서라도,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말의 실수가 무섭다는 것입니다.

선생의 자리가 귀한 것이지만, 그것을 포기할 정도로, 말의 위력이,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2절 말씀에 보면,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으로,

온 몸을, 굴레 씌울 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혀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것들도, 능히 다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언어 생활에서, 온전하면, 다른 생활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3절에서 말씀하는 말은, 말하는 말(言)이 아니라, 타는 말(馬)입니다.

그 입에 재갈을 먹여, 온 몸을 어거하는 것으로 보아서,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말과 같은 것, 같습니다.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말을, 길들이는데, 쓰는 방법이,

그 몸을 묶어서,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입에 재갈을 물려서, 길들인다는 것입니다.

그 입만 잡으면, 온 몸을 잡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소가 훨씬, 더 이해하기 쉬울 것 같습니다.

소를 길들일 때에, 입은 아니지만, 코에 구멍을 뚫어서, 코뚜레를 걸어 놓습니다.

그러면 크고, 힘이 센 소도, 길들일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을, 길들이기 이전에, 우리의 혀를, 길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야고보는 배의 경우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큰배도, 자그마한 키로, 그 배를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수 천 톤급 배도, 그 키(운전대)는 고작, 자동차 운전대만 합니다.

그것을 손으로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그처럼 큰 배를, 좌지우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우리의 생각과 삶을, 지배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언어의 영향력이,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아는, 프로 권투 선수 무하메드 알리가, 시합에 임하기 전에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고 늘 떠별였는데,

그 말이, 상대 선수에게, 상당한 위협감을 주어, 시합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호를 외치는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 인 것입니다.

혀의 위력이, 이처럼 대단한 것입니다.

우리 몸에서, 세 치밖에 안되는, 작은 부분이지만,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혀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혀를, 길들여야 하는 이유는, 혀가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혀는 작기 때문에, 종종, 작은 불로,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불의 위력은,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해마다 산불로 인해서, 엄청난 재산과 인명이,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엄청난 산불도, 그 시작은, 담뱃불 하나에서 시작되거나, 성냥불 하나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처럼 혀가 작지만,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누구를 때려서, 상처를 입히거나,

또는 남의 것을 빼앗거나, 도적질해서 ,피해를 입히는 것보다,

우리의 말로 인해서, 상처를 입히고,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이, 훨씬 더 많은 것입니다.

잠언 26장18-20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8) 횃불을 던지며, 살을 쏘아서, 사람을 죽이는, 미친 사람이 있나니

(19) 자기 이웃을 속이고, 말하기를 '내가 희롱하였노라' 하는 자도 그러하니라

(20)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장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

횃불을 던지고 화살을 쏘아서, 사람을 죽이는, 미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누굽니까? 이웃을 속이는 자요, 남의 말을 하는 자입니다.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듯이, 말장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쉰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위대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사상을 이야기하고, 평범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사건을 이야기하고,

좁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사람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여러분은 모이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 즉, 복음을 서로 이야기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위대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모여서, 그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눈다면, 그러면 여러분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모여서, 다른 사람이야기 하기를 좋아한다면,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주 좁은 마음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말 한마디로, 다른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잠언 18장 21절 말씀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6절 말씀에서도,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이 얼마나 엄청난 말씀입니까?

혀가 불과 같은데, 온 몸을 더럽히고, 우리의 삶 전체를, 불사를 수 있는데,

그 불의 위력이, 지옥불과 같다는 것입니다.

혀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지옥불과 비교할 정도입니다.

또, 8절에 보면,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이 말(혀)로 인해, 폐해가 심각하면,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하고 있겠습니까?

선지자 이사야가, 주의 성전에 들어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에, 가장 먼저,

부정함을 깨달은 것도, 바로 혀로 인한 범죄였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보는 순간, 이사야 6장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우리는, 히브리서 10장 39절 말씀대로,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로서 가장 먼저,

변화되어야 할 부분은, 바로, 우리의 입술인 것입니다. 우리의 말인 것입니다.

더욱이 이 혀는, 쉽게 길들여지지 않습니다. 7절 말씀을 보면,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요즘, TV에서 동물에 대한, 프로를 많이 방송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별의 별 것들을, 애완동물로 키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강아지나, 고양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악어를, 애완동물로 키우는가 하면, 뱀을 애완동물로 키우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한번 물리면 죽는, 독거미를 애완동물로 키우기도 합니다.

이제는 그 무엇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무섭고, 징그러운 것들도, 길들여지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 벌레까지도, 다 길들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길들여지지 않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의 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동감이 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문제가 더욱, 심각한 것입니다.

그 위력은 대단한데, 길들여지지 않고, 통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떡하자는 것입니까? 그냥 그런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고후 5장 17절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의 혀가, 파괴적이고 길들여지기 어려운 것이라 할지라도, 이제 우리의 혀는,

과거의 그 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혀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혀는, 하나님께 나아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호를 부르며,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선포하는 혀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혀입니다.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의 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언어생활은,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우리의 혀가 달라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우리의 입술은, 이미 단물을 내는 샘입니다.

우리는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서, 포도나무 가지가 되었습니다.

포도 열매를 맺어야 할, 포도나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입술에서 쓴 물이나, 짠물이 나오는 것은, 합당치 않은 것이며,

우리에게서, 감람나무 열매가 맺혀지는 것, 또한, 합당치 않은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3장 13-14절에서, 죄 아래 있는 사람들의 특성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하나님께서, 선하게 창조하신 그혀가, 우리의 죄악으로,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것의 본래의 기능을, 회복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혀를, 제대로만 사용하면, 그 작은 혀로, 놀라운 일들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라고 하였습니다.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혀로, 낙심한 영혼을, 일으켜 세워줄 수가 있고,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할 수도 있습니다.

어긋난 길로 가는 영혼을, 바른 길로 이끌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있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입술로, 복음을 전할 수가 있습니다 .

수많은 영혼이, 이 입술로 선포된 복음을 통해서,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우리의 지체 중에, 그 무엇보다도, 귀하게 쓰일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다른 그 무엇보다도, 내 안에 있는 믿음으로, 정복되어야 할 부분이,

바로, 우리의 혀인 것입니다. 이 싸움을, 우리가 어떻게 싸워나가야 하겠습니까?

먼저,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시편 141편 3절에 보면, 다윗은,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아무도, 혀를 길들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내 속에서, 성령이 나를 사로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또, 시편 19편 14절 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이것은 내가, 그렇게 하겠노라는 것입니다.

내 입의 말이, 주님 앞에, 열납되도록 힘쓰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이, 주님의 능력으로, 길들여 지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그 혀의 능력을, 귀하고 복된 일에, 사용하기를 원합니다.

성도들의 주고 받는  말이, 언제나 아름답고, 서로에게 힘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주님께 드려지는, 우리 입술의 말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