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10:13)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Everyday, people who encounter miracles,,,

** 생수의 강

베들레헴에서 나신 예수님(누가 2장 1-7절 )

Andy1954 2023. 12. 5. 14:22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담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인류 역사에서, 최대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점으로, B.C.와 A.D.로 구분이 되고 있습니다.

B.C.는 “Before Christ”의 약어로서, “그리스도 이전” 곧 주전(主前)을 뜻합니다. 

그리고 A.D.는 본시 라틴어 “Anno Domini”를 줄인 말입니다. 

그 본래의 뜻은 “the year of our Lord,” 곧 “우리 주의 해”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통은, 주후(主後)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성탄에 대한 이야기는 신약 성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 성탄을 예언하는 말씀이, 적어도 350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성탄은 구약 성경에서 예언되었고, 신약 성경에서 성취가 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구약의 선지자 미가는, 메시야가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임을 예언했습니다. 

그는 예수님보다 700여 년이나 앞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을 오래 전에 예언했습니다. 

미가서 5장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창세기 35장 19절에 의하면 베들레헴의 본시 이름은, 에브랏 곧 에브라다였습니다. 

장차 이곳,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탄생할 것입니다. 

그는 메시야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근본은 상고부터이며, 태초부터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예언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해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배경을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 26절 이하를 보면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찾아갔을 때, 마리아는 

어디에 살고 있었습니까? '갈릴리 나사렛' 이란 동네였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가 잉태했던 곳은 갈릴리 나사렛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분명히,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예언의 성취를 위해서, 영원하신 섭리 가운데 한 가지 특별한 사건을 

예비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인구 조사' 였습니다. 

로마의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 가 내린 명에 따라서 로마의 지배하에 있는 모든 사람은 

호적을 해야만 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이 명령에 따라서, 갈릴리의 나사렛을 떠나 유대

베들레헴으로 왔던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역사적인 배경과 관련해서,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세계적인 상황(the world setting, 1-2절).

둘째, 국가적인 상황(the national setting, 3-5절).

셋째, 개인적인 상황(the personal setting, 6-7절).

 

먼저, 1-2절 말씀을 통해 세계적인 상황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절,  (1) 이 때에 (2) 가이사 아구스도가 (3)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절,  (4)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5) 첫번 한 것이라

 

(1) 이 때에,  이는 어느 때를, 가리키는 말입니까? 

오늘 본문 앞에 있는 누가복음 1장에 기록된 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누가 1장 5절을 보면, “유대 왕 헤롯 때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헤롯을 유대의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헤롯은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에돔 사람 곧, 이두매 사람이었습니다. 

헤롯은 동방 박사들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유대인의 왕으로 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왕위가 위태로울까봐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두 살 아래의 사내아이들을 다 죽였습니다. 

 

바로 이 헤롯이 유대의 왕으로 있을 때 천사 가브리엘은, 제사장 '사가랴' 에게 가서 그에게서 아들이

태어날 것임을 일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섯째 되는 달에 천사 가브리엘은, 갈릴리 나사렛의 처녀

마리아에게 가서, 그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잉태될 것임을 알렸습니다.   

 

천사의 말 대로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은 아들을 잉태했습니다. 

마침내, 엘리사벳은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선구자였던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의 출생은 곧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있을 것을 예견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제는 때가 차서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모든 상황을 주권적으로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2) 가이사 아구스도(Caesar Augustus)

“가이사”라는 말이나 “아구스도”라는 말은 둘 다 인명이 아닙니다. 

우선 “가이사”라는 말은, 로마의 황제를, 가리키는 칭호입니다. 

우리 나라의 최고 통치권자를 가리켜서 대통령이라고 부르듯이, 로마의 최고 통치권자를 

가리켜서 “가이사”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다음에 쓰여진 “아구스도”는 형용사로 그 뜻은 “매우 존귀한” (highly honored) 란 뜻입니다. 

본래 이 '아구스도'란 단어는 신들에게 쓰여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전 27년 로마의 원로원은, 그 당시 황제인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의 공로를, 

높이 받드는 의미에서 그에게 “아구스도”라는 칭호를 부여했습니다.

그러니까 “가이사 아구스도”라는 말의 원 뜻은, “매우 존귀한 황제”가 될 것입니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 63 B.C.~14 A.D.)는, 주전 31년부터 주후 14년까지 

45년 동안 로마를 통치했습니다.

그는 탁월한 능력으로 천하를 점령하고, 강대한 로마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현명한 정책을 펼침으로서 소위 말하는 “로마의 평화” (the Pax Romana)를

이룩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원로원에서 신들에게 붙이는 칭호인 “아구스도”라는 형용사를 부여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신으로 숭배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비문에는 그를 “세상의 구세주”(the savior of the world)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3) 인구 조사(Census)  

가이사 아구스도는 천하를 제패한 후에 황제로서 명령을 내렸습니다. 

“천하로 다 호적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는 요즘말로 하면 인구 조사입니다. 

호적에는 그 사람의 이름, 직업, 재산, 그리고 가족 사항을 기록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인구 조사는 14년마다 한번씩 이루어졌습니다. 그 목적은 두 가지였습니다. 

징병과 세금 징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경우는 로마군으로 징집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인구 조사는 순전히 세금 징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방 나라인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일을 좋아했을 리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인구 조사를 위해서 각자가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던 일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며칠 동안 집도 비워야 했습니다. 

그러니 여간 불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 37/38~100경, Antiq. XVIII, 26 ii. 1)에 의하면, 주후 6년

팔레스타인에 대대적인 인구 조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 갈릴리에서는 그 인구 조사에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폭동은 곧 진압되었습니다. 이는 성경에도 나옵니다. 

사도행전 5장 37절에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4) 수리아 총독 구레뇨(Quirinius, governor of Syria)

그 당시 성지 이스라엘은 크게 보아 수리아의 관할 구역에 속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수리아의 총독은 구레뇨였습니다. 

그는 두 번에 걸쳐서 수리아의 총독이 되었습니다.

먼저는 주전 6년~4년이었고, 나중은 주후 6년~9년이었습니다. 

그는 주후 6년 팔레스타인에 있었던 대대적인 인구 조사를 책임졌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탄생하시고 난 뒤에 이루어졌던 인구 조사였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인구 조사는 그 14년 이전인 주전 8년에 있었던 것입니다.

 

(5) 첫 번 한 것이라

가이사 아구스도는 주전 8년에 인구 조사에 관한 영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실시되었던 인구 조사였던 관계로 시행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리아 지역에서는 구레뇨가 총독이 될 때까지는 제대로 이루어지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주전 6년 구레뇨가 수리아의 총독이 되면서, 수리아 지역의 인구 조사는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유대를 다스리고 있던 헤롯왕에게 전달되어 시행되는 데에 또한 

1~2년이 소요되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 연대를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레뇨가 수리아의 첫 번 총독이 된 주전 6년 이후에 탄생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 인구 조사가 1~2년 안에 이루어졌다고 보면, 예수님은 주전 4년 이전에 탄생하신

것으로 여겨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교훈을 받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며 세상을 다스리시고 움직이시는 분은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가이사 아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쓰임을 받은 하나의 도구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이용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바사 왕 고레스를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도록, 가이사 아구스도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같이 하나님은 그 뜻하신 섭리를 이루시기 위해 인류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힘있게 의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하늘 나라 생명책에 호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시며 우리를 보호해주실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은 우리의 발걸음을 형통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국가적인 상황에 대해서 살펴봅니다(The National Setting).

3절 (1)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절 (2)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3)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절 (4)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5)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1) 각각 고향으로 돌아감

그 당시 로마인들은 각자가 살고 있던 바로 그 장소에서 호적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렇게 손쉬운 호적 제도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호적 제도에 따라, 각자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호적을 했습니다.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이전에 어떠한 선례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마 헤롯왕은 유대인들의 방식대로 지파별로, 족속별로, 집별로 인구 조사를 행했을 것입니다.

본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족보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했을 때, 그들은 제비를 뽑아 지파별로 땅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땅을 자신들의 기업으로 삼아 자손대대 이어갔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각자의 고향에 가면, 언제라도 그곳의 서기관에 의해서 기록된 상세한 

족보를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연유에 따라서 유대인들은 인구 조사를 할 때에도,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지파별로, 족속별로, 집별로 행했던 것입니다.

 

(2) 다윗의 집 족속이었던 요셉

유대인들은 지파와 족속과 집에 따라 각자의 뿌리를 밝혔습니다. 

이들 세 가지 가운데서 가장 넓게 확대된 것이 “지파”이었고, 그 다음이 “족속”이었으며, 

가장 세분화되어서 축소된 것이 “집”이었습니다.

여호수아 7장 16-18절을 보면, "이에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그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가 뽑혔고,

유다 족속을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세라 족속이 뽑혔고,

세라 족속의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삽디가 뽑혔고,

삽디의 가족(집)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더라"

 

마태복음 1장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요셉의 족보였습니다. 

우리는 이 족보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요셉은 분명 다윗의 자손이었습니다.

따라서 요셉은 자신의 본적지인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 가서 호적을 해야만 했습니다. 

때는 겨울철로 비가 내릴 때였습니다. 게다가 요셉의 아내 마리아는 해산할 기한이 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이 먼길을 떠나야 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마도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에 따라서, 수리아의 총독 구레뇨는 자기 구역 안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호적을 끝마쳐야 할 기한을 확실하게 못박았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셉은 힘든 상황이었지만, 어쩔 수없이 먼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수리아의 총독 구레뇨는 이 인구 조사로 말미암아 가이사 아구스도의 상당한 신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이 인구 조사가 성공적으로 잘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는 임기가 끝나고 나서, 뒤에 다시 한번 더 수리아의 총독으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3)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

다윗은 이새의 아들이었습니다. 이새는 베들레헴 사람이라고 불렸습니다. 

따라서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이 분명합니다. 실제로 그가 양떼를 돌보던 곳이 

바로 베들레헴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베들레헴은 다윗 성이라고 불려졌습니다.

삼상16장 1절에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니라"

삼상17장 15절에 "다윗은 사울에게로 왕래하며 베들레헴에서 그 아비의 양을 칠 때에"

삼상20장 6절에 ...."너는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성 베들레헴으로 급히 가기를 내게 허하라 

간청하였사오니...."

 

(4) 정혼한 마리아의 동행

요셉은 호적하기 위하여 자기 혼자 베들레헴으로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마리아를 가리켜서 요셉과 정혼한 사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태 1장 24절을 보면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천사의 분부에 따라서, 요셉은 자기 아내 마리아를 데리고 왔습니다. 

이는 분명히 정혼을 끝내고 결혼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아직도 요셉과 마리아가 정혼 기간에 있는 것처럼 언급을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마태 1장 25절에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그들은 동거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그들이 동침하지 않았음을 밝혔습니다. 

이 사실을 누가는 오늘 본문에서 다른 말로 표현을 했습니다. 비록 그들이 법적으로는 결혼을 했지만,

아직도 그들은 자기들이 정혼 관계에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5) 만삭의 몸인 마리아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직선 거리만 해도 130km에 이릅니다. 

만일 요단강을 건너서 베뢰아 지방으로 돌아간다면, 그 거리는 훨씬 더 되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베들레헴은 해발 600m 고지입니다. 그래서 “호적하러 올라가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마리아는 지금 만삭의 몸이었습니다. 

그러한 몸으로 먼길을 여행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요셉은 마리아를 데리고 갔습니까? 

마리아도 다윗의 자손이었기에, 베들레헴으로 가서 호적을 해야만 했었습니까?

오늘 본문은 마리아가 동행한 것이 의무적인지 자발적인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그 당시 로마법에 의하며, 여자도 세금을 내기는 하지만 자신이 호적을 하러 갈 필요는

없었다고 합니다. 얼마든지 그 가정의 호주가 그의 가족을 대신해서 할 수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설사 마리아가 호적하는 것이 의무적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요셉은 마리아가 나사렛에 

혼자 남아서 아들을 낳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천사의 말에 따라서, 요셉은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변의 사람들은 마리아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요셉은 마리아를 주변의 비난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생각해봅시다. 

만일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만일 수리아의 총독 구레뇨가 기일을 정하여주지

않았더라면, 만일 헤롯왕이 각자의 처소에서 호적을 할 수 있도록 했더라면, 예수님은 베들레헴이

아닌 나사렛에서 탄생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이라는 미가 선지자의 예언은 응하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인 권위를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도 분명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 12장 6-7절에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우연은 없습니다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움직입니다. 

따라서 요셉과 마리아가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유대 베들레헴으로 왔던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든 일을 당하셨습니까? 처해 있는 여건이 너무 어렵습니까? 

그럴지라도 좌절하거나 두려워하지 맙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세세한 것까지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습니다.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모든 일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의 손길을 바라봅시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정녕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날마다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개인적인 상황에 대해서 살펴봅니다(The Personal Setting).

6절 (1) 거기 있을 그 때에 (2) 해산할 날이 차서

7절 (3) 맏아들을 낳아 (4) 강보로 싸서 (5) 구유에 뉘었으니 (6)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1) 거기 있을 그 때에

이제 요셉과 마리아는 드디어 베들레헴에 도착했습니다. 

마리아가 만삭의 몸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여행길을 재촉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가급적 천천히 움직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아마도 나사렛을 출발한 지 닷새 정도는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과 마리아가 해산할 때까지 베들레헴에서 얼마 동안 머물렀는지 알수 없습니다. 

호적할 사람들이 많아서, 자기들의 순번이 될 때까지 기다렸을 수도 있습니다. 

호적은 끝이 났지만,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찼기 때문에 그곳에 그대로 머물렀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때 그들이 갈릴리 나사렛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유대 베들레헴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함으로서 하나님이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대로, 그리스도는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이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 집니다. 

문제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 위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우리가 붙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2) 해산할 날이 차서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성령님으로 잉태되셨습니다. 

이것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수 없는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방법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는 일반 사람과 똑같이 마리아의 태중에서 10개월을 자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태어나셨으며 난지 팔 일이 되어 할례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그 지혜도 자라시며, 그 키도 자라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탄생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지시고, 우리와 똑같은 성장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을 다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어떠한 형편에서라도 능히 도우시며, 모든 고통 가운데서 능히 구원해 내십니다.

히브리서 2장 17-18절에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그러므로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혼자서 괴로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에게 아뢰며,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합시다. 예수님은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시험을 능히 이겨내게 하실 것입니다.

 

(3) 맏아들을 낳아

마리아는 “외아들”을 낳은 것이 아니라, “맏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후에, 계속해서 자녀들을 낳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주교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후, 동정녀의 상태를 그대로 지켰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마태 13장 55-56절에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

누가 8장 19절에 "예수의 모친과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를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요2서 12절에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거기 여러 날 계시지 아니하시니라"

이같이 예수님의 형제들과 누이들에 대해서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일관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후에 자녀를 낳지 않고 끝까지 동정을 지켰다는 천주교의 주장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내용일 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누가는 마리아가 그 뒤에 자녀들을 낳았다는 그 한가지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맏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겠습니까?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누가의 또 다른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본시 “맏아들”은 그 가정의 기업을 그대로 이어받을 자입니다. 

요셉은 목수 일로 생계를 꾸려나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요셉을 남편으로 맞이한 마리아도

역시 가난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요셉과 마리아는 자신들의 맏아들 예수님에게 물려줄 재산은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둘 다 “다윗의 자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맏아들이었기 때문에,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누가 1장 32-33절에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맏아들이셨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다윗의 위를 이어

받으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야곱의 집에 무궁토록 왕노릇 하시게 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강조하려고 누가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맏아들이라고 표현을 했던 것입니다.

 

(4) 강보로 싸서

강보는 갓난아기를 둘러싸는 천을 뜻합니다. 태아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는 따뜻합니다.

그러다가 세상으로 나오게 되면 추위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갓난아기의 체온을 보호하기

위해서 강보로 둘러쌉니다. 게다가 태아는 어머니 뱃속에서 웅크리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니의 몸밖으로 나오면, 자연히 온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몸에 상처가 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갓난아기의 안전을 위해서 당분간 강보로 둘러싸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갓 태어나신 예수님을 강보로 쌌습니다. 

예수님이라고 해서 아예 왕복을 입고 탄생하신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머리에 후광이 둘러 비치는 모습으로 탄생하신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도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모양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알몸으로 태어나셨습니다. 키도 얼마 안되고, 몸무게도 얼마 나가지 않는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태어나시자 말자, 다른 아이들처럼 강보에 싸이셨습니다.

 

(5) 구유에 뉘었으니

구유는 가축의 꼴을 담는 그릇을 의미합니다. 아기 예수님은 구유에 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이셨다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을 것이라고 추정을 합니다. 베들레헴에 가면, 예수 탄생 교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을 기념해서 그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탄생하신 장소는 동굴로 되어있습니다. 

아마도 그 당시에는 동굴이 가축을 기르는 마구간으로 이용되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그 당시 사용하던 구유는 갓난아기를 누이기에는 적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임시로 강보에 싼 아기 예수님을 구유에 뉘었습니다. 

그러면 왜 아기 예수님은 마구간의 구유에 뉘일 수밖에 없었습니까?

 

(6)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구유에 눕도록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외지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호적하기 위해서 베들레헴으로 찾아왔을 것입니다. 

작은 동네인 베들레헴의 숙박 시설이 많이 있을리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숙박 시설이 동이 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숙박 시설에는 으레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당시의 숙박 시설에는 으레 마구간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나귀나 노새와 같은 짐승들이 교통 수단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관에 있을 방을 구하지 못한 요셉과 마리아는 어쩔 수 없이 사관에 딸린 마구간에서 그들의 짐을

풀 수밖에 없었으며 바로 그같이 더럽고 냄새나는 곳에서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해산했습니다. 

그리고는 준비해온 강보에 아기 예수님을 싸서 구유에 뉘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마구간에 머물렀는지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지를 못합니다. 

단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호적을 마친 사람들이 많이 되돌아가고 난 뒤에는, 그들이 사관에 있을

곳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마태 2장11절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이와 같이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에게 이르렀을 때, 아기 예수님은 더 이상 마구간의

구유에 계시지는 않았습니다. 그 때에는 이미 집으로 옮기고 난 뒤였습니다. 

아마도 사관에 있을 곳이 생겼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베들레헴에 탄생시키기 위해 가이사 아구스도를 이용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로마의 황제를 이용하시는 하나님이 왜 그 아들의 탄생을 위해서는 마구간과 구유밖에

준비하시지를 않으셨을까요?

고후 8장9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섬기시기 위해서 가장 낮은 자리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난해지셨기 때문에 우리가 부요해질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생명의 양식으로 구유에 누이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마구간보다도 더 더럽고 추악한 냄새가나는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고, 우리의 모든 허물이 깨끗하여 졌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우신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탄의 계절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본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해서 우리 모두의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서, 우리의 삶 속에 천국을 소유하며 살아가는

은혜와 복이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