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10:13)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Everyday, people who encounter miracles,,,

**믿음·히브리서 11장

믿음의 행진,(히브리서 11장 39∼40절)

Andy1954 2023. 5. 2. 10:52

히브리서 11:39∼40절말씀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일본의 성자요, 일본의 사도 바울이라고 불리는, '가가와 도요히코'는 빈민 운동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실천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본시 첩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부모님들이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15살 때

고향 고베를 떠나서 동경으로 무작정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어느 인쇄소에 취직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변의 열악한 환경때문에 많은 고생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이러한 이유때문인지,

20대 초반에 폐렴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의사로부터 희망이 없다는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열악한 환경 탓에 제대로 치료를 받지도 못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런저런 고민으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는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 차라리

목숨을 끊어 버리는 것이 더 남자답지 않겠는가? 하는 자살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문득 만일 예수님이라면 나같은 경우에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님도 자살을 생각하셨을까? 그렇지는 않겠지. 그러면서 마태복음 20장 28절 말씀이

생각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고 섬기러

오셨다고 했으니까 분명 마지막 순간까지 섬길 자를 찾아가셨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그는 자살하려던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지막 날까지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섬기면서 살리라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빈민촌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날 그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자살을 하려고 마음먹었던 사람이다. 따라서 나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이제 나는 사선을 넘어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사선을 넘어서." 이것은 훗날, 그의 유명한 자서전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그는 폐렴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몸이었으나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섬기다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가지고 그곳으로 찾아 간 것입니다. 

그는 빈민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뜨거운 마음으로 그들을 섬겼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의 건강이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하루는 이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한 술주정뱅이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막무가내로 돈 좀 달라고 떼를 썼습니다.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웃으면서

돈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술주정뱅이는 그 길로 술을 사 마셨습니다. 

그러더니 돌아와서 이번에는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주변에 있는

사람이 이런 충고를 했습니다. "저런 몹쓸 인간에게 돈을 주는 것은 그를 돕는 것이 아니라오. 

도리어 그를 깊은 죄악의 구렁텅이 속으로 밀어 넣는 것이 된다오."

그때 가가와 도요히코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도 한때는 여러분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저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도 사람들에게서 속으시고 배반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 같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사악한 인간들의 마음에 비로소 작은 나마 사랑의 열매가

맺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아름답게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폐렴으로 죽도록 내버려두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그리고 신학교에 들어가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나중엔 미국 유학도 했습니다. 

유학에서 돌아오고 난 뒤에도 변함없이 빈민촌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는 7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가 머물다 간 자리에는 많은 사랑의 열매들이 결실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는 믿음으로 기적을 이루어 내며 또 불가능한 일을 가능한 일로 바꾼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믿음의 선진들이 다 그러했습니다. 

물론 어려운 시련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믿음으로 모든 역경을 다 이겨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의 역사가 그들만의 사건으로 끝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믿음의 역사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믿음으로 에녹은, 믿음으로 노아는, 믿음으로 아브라함 이라고 했듯이,

믿음으로 아무개는 하면서 이 믿음의 역사가 계속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도 믿음의 선진들처럼 날마다 믿음의 행진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히브리서 기자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믿음장의 결론에 해당하는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기자는 하나님은 우리의 학식이나 외모 또 우리가 가진 재물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우리에게 역설하고 있습니다. 

39절 상반부 말씀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여기서 "이 사람들"은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되어 있는 구약 시대의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증거를 받았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히브리서 11장 4절의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아벨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운 자라고 인정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11장 5절의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여기에서의 증거는 영어로 approval 곧 인정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에 대한 case study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31절에 나오는 라합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기생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술을 팔고 웃음을 팔고 몸을 파는 부도덕한 삶을 살았던 여인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기생 라합이 어떻게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습니까? 

이유는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십니다. 문제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약속 가운데 거할때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하십니다.  

한마디로 total acceptance 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믿음으로 증거를 받은것 같이 우리도 믿음으로 증거를 받을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 위에 굳게 서기 위해선 신앙의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우리 모두 믿음의 반석위에 굳게 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영화롭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다시 한번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구약의 성도들보다도 더 나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선진들은 정말로 대단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믿음이 그들보다도 더 나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39절 하반부의 말씀입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약속된

것을 받지 못했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받지 못했던 약속이 무엇입니까? 

우선 33절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여기에서는 믿음의 선진들이 믿음으로 약속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 39절에서는 그들이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차이입니까? 33절의 약속은 정관사가 없는 복수형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어표현을 쓰면 Promises 곧 '약속들' 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개개인에게 주신 약속들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아들 이삭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여리고 성을 칠일 동안

두루 돌아라. 그리하면 여리고 성이 무너지리라."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칠일 동안 여리고 성을 두루 다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여리고 성은 그들이 보는 눈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33절과는 달리 오늘 본문에 기록된 약속이라는 단어는 단수형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The promise 곧 '그 약속' 입니다. 

구약의 모든 성도들이 받지못한 특정한 한가지 약속은 메시야에 대한 약속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죽었으므로 약속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오실 메시아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들은 그 약속을 붙들고 핍박과 환난에 굴하지 않고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본문에서 의도하고 있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의 선진들은 약속을 받지도 못하였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오실 메시야가 아니라 이미 오신 메시아를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우리 신약의

성도들은 구약의 성도들보다 더 나은 믿음을 가져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선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약속을 받았으며 임마누엘 되시는 예수님이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또한 주님께서 보내주신 성령이 우리 가운데 계시며 완성된 성경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살고 있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나 핍박과 환난속에도 믿음을 굳세게 지켰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약속을 받은 우리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총을 

무조건적으로 받은 우리들은 구약의 성도들보다 더 나은 신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믿음의 행진을 계속해야 합니다.

40절 말씀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우리""그들"이 서로 대조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약의 성도들이며 새 언약의 백성입니다. 약속을 받은 자들입니다. 

반면에 그들은 구약의 성도들이며 옛 언약의 백성입니다. 약속을 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신약시대 성도인 우리들은 여러 면에서 그들보다 나은 상황에 있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자신들의 죄 사함을 위해 매번 짐승을 잡아 피를 흘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 새 언약의 백성들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단번에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한 속죄 제물로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가 깨끗하게 씻어진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약속을 받지도 못했으나 그들은 오실 메시야를 멀리서 바라보면서도

자신들의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메시야에 관한 한 자기들이 바라던 것을 실상으로 얻지 못했습니다. 

눈에 보지 못하는 것을 증거로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의 성도들이 바라는것을 실상으로 얻었습니다. 그들이 보지 못하는것을

증거로 얻었습니다. 말하자면 구약 성도들의 믿음이 신약시대에 와서 온전하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당연히 그들의 믿음보다도 더 나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신구약 66권으로 완성이 되었으며 여기에 더할 수도 없고 덜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늘 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계속 기록되기를 바라는 성경이 두곳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사도행전과 히브리서 11장입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점차로

확장되어 가는 내용을 기록한 성경이 바로 사도행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역사는 오늘날도 우리를 통해서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어서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으로 아벨은, 믿음으로 에녹은, 믿음으로 노아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하듯이 믿음으로

아무개는 하면서 우리 모두도 믿음의 행진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에 앞서 히브리서 10장 37∼38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후퇴하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더 좋은것을 예비하셨다는 믿음을 가지고 믿음의 행진을 계속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하시고 기뻐하십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때로는 무거운 십자가를 져야 할 시련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 약속에 대한 믿음, 섭리에 대한 믿음이 있기만하면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으며 얼마든지 십자가를 기쁨으로 질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언젠가는 알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믿음장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에

관하여 여러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반복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의 선진들이 보여준 모습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더욱더

돈독해 질뿐만 아니라 날마다 믿음의 행진을 계속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믿음의 역사를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 드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