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10:13)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Everyday, people who encounter miracles,,,

**복음·갈라디아서

복음의 진리를 따라

Andy1954 2020. 12. 18. 05:20

 

갈라디아서 2장 11-14절, 복음의 진리를 따라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기록하면서, 처음부터 자신의 사도권을,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1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이는 그 당시에,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율법주의자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이 그들을 대항해서, 자신의 사도권을, 강하게 주장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하는, 율법주의자들로 인해서, 바울이 전한 복음이, 

왜곡되고 거부될, 위험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사도권을, 강하게 옹호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자기의 사도권이, 하나님에게서 주어진 것임을 밝혔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는 자기가 처음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불과 십오 일을, 머물렀을 뿐이며, 

그 기간 동안에도,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 이외에는, 다른 사도들을, 

만나지 못하였음을, 밝혔습니다. 

그 뒤에 그는, 수리아와 길리기아에서, 복음을 전하였는데, 

그 때에도, 예루살렘의 사도들과는, 아무런 접촉이 없었음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난 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에 들어와서, 

자신의 사도권과 그가 전한 복음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비롯한,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공적으로 인정되었음을 밝혔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루살렘 사도들의 수장격인 베드로가, 신앙의 원리 면에서, 

잘못되었을 때, 바울 자신이, 그를 단호하게 책망했던 일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바울은 자기의 사도권이, 베드로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입니다. 

말하자면, 갈라디아서 2장 1-10절에서는, 자신의 사도권을, 수동적으로 입증했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능동적으로 입증하고 있는 셈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율법주의자들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유력한 자들”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바울을 무명한 자로, 깍아내리기 위한,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자기가 오히려 베드로를 책망했던 사실을 들어서, 

자기를 무시하고 있는, 율법주의자들의 불순한 의도를, 완전히 깨뜨려버렸습니다.

 

오늘 본문은 흔히들, “안디옥 에피소드” (the Antioch episode) 라고 부릅니다. 

안디옥에서 생긴, 일화라는 뜻입니다. 

이제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그들이 데리고 갔던 디도는,

예루살렘에서 공의회를 마치고, 다시금 안디옥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 당시 안디옥은, 로마제국에서, 셋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로마, 알렉산드리아, 의 뒤를 이어서, 안디옥이 세 번째로 컸습니다. 

바로 이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 안디옥 교회는, 이방 지방에서 세워진, 최초의 교회였습니다. 

사도행전 13장1절 말씀을 보게되면, 바울과 바나바는 여기서, 다른 세 사람의 도움을 받아, 

함께 교회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1절 말씀입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어떻게 입증하고 있는지를,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바울은 자기가 베드로를 책망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둘째, 바울은 베드로의 책망 받을 행동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셋째, 바울은 자기가 베드로를, 어떻게 책망했는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바울은 먼저 자기가, 베드로를 책망했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11절 말씀입니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게바는, 베드로를 가리킵니다. 

베드로가, 언제 그리고 무슨 목적으로, 안디옥에 왔는지, 

오늘 본문은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간의 상황을, 순서에 따라, 정리를 해보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1)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게 되었습니다(행9:1-9).

(2) 그는 다메섹에서 잠시 복음을 전하다가,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

아라비아로 갔습니다. (갈1:17).

(3) 그는 다시금 다메섹으로 돌아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아, 광주리를 타고, 

다메섹 성을 빠져 나와,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행9:23-25).

(4) 그는 예루살렘에서, 십오 일을 머물렀습니다(갈1:18). 

그러다가 그는 핍박을 피해, 길리기아 다소로 갔습니다(행9:26-30).

(5) 그는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갈1:21).

(6) 안디옥 교회가 부흥하게 되자,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파송했습니다.

(행11:21-22).

(7) 바나바는 길리기아의 다소로 가서, 바울을 안디옥으로 데리고  왔습니다(행11:25-26).

(8) 바울과 바나바는, 다른 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안디옥 교회를 목회했습니다(행13:1).

(9)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을 했습니다(행13:2-3).

(10) 제1차 선교여행 때에, 그들은 갈라디아의 여러 곳에, 교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행13-14장).

(11) 그들은 안디옥 교회로, 되돌아 왔습니다(행14:26-28).

(12) 그때 율법주의자들이 안디옥으로 왔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큰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습니다(행15:1-2상).

(13)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 교회로, 

보냈습니다(행15:2하).

(14) 예루살렘 공의회에서는, 바울의 복음과 사도권을, 공인했습니다(행15:6-29).

(16)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으로 되돌아왔습니다(행15:30-35).

 

이제 여기서 사도행전 15장 30-31절, 그리고 15장3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바로 이 때에, 베드로가 안디옥을 방문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베드로와 바울이 교제의 악수를 하면서, 서로 간에,  

무엇을 합의했었습니까? 

베드로는 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하고, 바울은 무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사역지입니다. 

베드로는 이곳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왔다기보다는, 아마도 친선방문을 위해서, 

이곳에 왔을 것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선교지를 방문한 셈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그의 면전에서, 공개적으로 책망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바울보다, 연령이 위였습니다. 

게다가 베드로는, 사도들의 수장격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베드로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책망한 것입니다.

바울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베드로를 책망했습니까? 

그렇다면 바울은, 교만한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베드로에게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 사실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오늘 본문 11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베드로가 분명, 책망을 받을 일을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베드로의 잘못을, 지적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비록, 바울보다 나이도 많고, 유명도도 높지만, 바울의 지적을, 

달게 받아들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분명한 소신과 담대함, 그리고 베드로의 겸손함을, 똑같이 높이,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일화가, 주기철 목사님과 조만식 장로님, 사이에 있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오산학교에 재학하던 시절, 조만식 장로님은, 주기철 목사님의, 

은사님이셨습니다. 

또, 주기철 목사님을, 평양 산정현 교회로, 모시고 오신 분도, 조만식 장로님이셨습니다. 

당시 조만식 장로님은, 민족의 지도자로서, 많은 존경을 받고 있던, 분이셨습니다. 

그러니까 연배로 보나, 유명도로 보나, 조만식 장로님이 위라고 할수 있습니다.

어느 주일날, 조만식 장로님이 손님을 만나느라, 예배에 늦게 오셨습니다. 

조만식 장로님은, 헐레벌떡 예배당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 모습을 주기철 목사님이, 예배를 인도하다가, 보시게 되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그 자리에서 조만식 장로님을, 이렇게 면책했습니다.

“장로님! 본이 되셔야 할 장로님이, 예배에 늦게 오시면 됩니까? 

그리고 늦게 오셨으면, 뒤에서, 예배를 드리셔야지, 무슨 면목으로, 

앞자리로 나아오십니까?”

그날 조만식 장로님은, 예배 시간 내내, 뒤에 서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가 끝난 뒤에, 조만식 장로님은, 교인들 앞에서, 이렇게 사죄했습니다.

“본이 되어야 할 장로가, 예배에 늦게 와서, 무엇이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울러, 목사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려야 할 장로가, 

도리어, 목사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려, 너무나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두 번 다시 없도록, 조심하겠습니다.”

조만식 장로님의 겸손한 모습을 보면서, 모두가 조만식 장로님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장로님이 계셨기에, 주기철 목사님, 또한 순교자의 반열에, 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바울이 베드로를 면책했던 사실을 들어서, 의도하고 있는 바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자신의 사도권이, 예루살렘의 사도들과는, 독립적이었음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먼저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결정된 일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사도권이, 

예루살렘 사도들과, 동등함을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베드로가 잘못되었을 때, 자기의 책망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바울은, 자기의 사도권이,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동등함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10절에서, 사람을 기쁘게 하는 종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종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토록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늘 하나님을 바라보는 가운데, 바울처럼 모든 면에서 떳떳하고, 소신 있게, 

처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는 베드로처럼, 우리의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겸손함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베드로의 책망 받을 행동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12-13절). 

먼저 12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계속 말해오고 있는, 율법주의자들 입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그것에 더해서,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는 자들이 아니라, 

더럽고 냄새나는 인간의 의를, 내세우려 들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태도는,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마태 5장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렇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 곧 인간적인 의로는, 천국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를, 믿음으로 받아야, 비로소, 천국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힘써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율법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야고보에게서 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 주장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9절을 보면,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야고보는 바울과 교제의 악수를, 나누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야고보가 율법주의자들을, 안디옥에 파견할 리는 만무합니다. 

그러니까 율법주의자들은,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인, 야고보에게서 보냄을 받았다고, 

거짓말까지, 한 것입니다.

아무튼 그들이, 안디옥에 오기 전까지는, 어떠한 상황이었습니까? 

오늘 본문 12절 상반부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여기에 사용된 “먹다”라는 동사의 시제가, 미완료형입니다. 

반복적인 동작을, 나타낼 때 쓰이는 시제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그 동안은 이방인들과,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함께 식사를 해왔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안디옥을 방문했을 때, 안디옥의 교인들은, 

정성을 다해서, 베드로를 극진히, 대접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음식에 관해서, 예수님이 주신 가르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가 7장 18-19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또, 베드로가 고넬료의 가정에, 보내심을 받기 바로 전이었습니다. 

그는 환상 가운데서, 보자기에 담긴, 부정한 음식들을 보았습니다. 

자기는 그러한 음식들을, 먹을 수 없다고 하자,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사도행전 10장15절 말씀입니다.

“또, 두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베드로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통해서, 또 자기가 받은 환상을 통해서, 

이방인들과 식탁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전혀 어긋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한 동안 안디옥에서, 아무런 거리낌없이, 이방인들과 식탁의 교제를, 

계속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이 안디옥에 온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주의 형제요,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당회장이라고 할 수 있는, 

야고보의 보냄을 받아서, 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어떤 행동을 했습니까? 

12절 끝 부분에 있는 말씀입니다. “떠나 물러가매.”  

말하자면, 베드로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안디옥 교회 성도들의, 식사초청에, 

응하지를 않은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베드로는, 그들과 같이 식사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는 아예, 어울리려고, 들지도 않았습니다. 

아마도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베드로의 돌변한 태도에 대해서, 

좀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이방인들과의 교제를 잘 하다가, 

갑자기 그것을 꺼리는 행동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12절 하반부입니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이유는 그 한 가지였습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할례자들의 무엇을 두려워했습니까? 

베드로가 그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까?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율법주의자들도, 명목상으로는,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옛날의 바울처럼, 대제사장들의 공문을 받아서, 기독교인들을 체포하고, 

감옥에 넣고, 고문할 권한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기껏 베드로를 비웃으며, 나쁜 평판을 전할, 

그 정도의, 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정도의 일로,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는 바울에게서, 책망을 받아도 마땅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의 옛 성품이, 되살아 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죽겠다고, 큰 소리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더니 바로 얼마 후에, 그는 비천한 계집 종 앞에서까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부활하신 예수님께로부터, 복음 전파를 위해,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고서도 사명을 망각하고서는, 기껏 디베랴 바다로 가서, 고기잡이를 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유부단하고, 겁 많던 베드로의 옛 성품이, 다시금 되살아 난 것입니다.

베드로의 행동은, 어떤 결과를 초래했습니까? 

13절 말씀입니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바울은 베드로의 행동을 '외식' 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자기의 실제 모습을 감추고, 다르게 행동하는 것이, 바로 '외식' 입니다. 

누가 20장20절 말씀을 보면, 외식에 대한 개념을, 쉽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실제로는 아니면서, 스스로 무엇인 체하는 것이, 바로 외식입니다. 

그런데 보통 외식이라고 하면, 평소의 나쁜 태도나, 불순한 감정이나, 

좋지 않은 행동을 감추고, 일부러 좋은 체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베드로의 경우는 정반대였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행동을, 감추어버리고,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잘 어울려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율법주의자들이 오니까, 이방인들과는, 교제하지 않는 체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외식적인 행동은,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베드로의 이런 외식적인 행동을 보고서, 함께 있던 크리스찬 유대인들도, 

이방인들과의 교제를, 끊고 말았습니다. 

그러더니 바울의 동역자로서, 그 누구보다도, 바울을 잘 이해하던, 바나바까지도, 

외식적인 행동에, 넘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바나바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바울이 회심하고 난 뒤에, 처음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바울을 사도들에게 데리고, 가서 옹호해주었던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사도행전 9장27절 말씀입니다.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또한, 길리기아 다소에 있는 바울을, 안디옥으로 데리고 와서, 함께 안디옥 교회를 위하여, 

사역하도록 만든 사람도, 역시 바나바였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5-26절 말씀입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컫음을 받게 되었더라.”

이처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의 목회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안다옥 교회에서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 뒤에 바나바는, 바울과 함께, 제1차 선교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는 바울과 함께, 선교여행을 같이 하면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바울의 설교를, 수도 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도 그렇게 전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방지역에서, 많은 열매들을 맺었습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들도, 그때에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 때문에, 뜻하지 않은 문제가 생기자, 바나바는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는 바울과 함께, 율법주의자들에 대항해서, 복음을 옹호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와서, 

그는 바울과 함께, 안디옥 교회를,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바나바는 바울과 함께 가르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목회도 하며, 

함께 고통을 나누었던, 동역자였습니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며, 깊이 사랑하던 사이였습니다. 

이런 바나바까지도, 베드로의 외식적인 행동에, 물들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러니 바울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이러한 외식적인 행동은, 안디옥 교회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의 행동은,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패배한, 율법주의자들로 하여금, 

다시금, 반격의 기회를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외식적인 행동은, 그들로만 끝나지 않고, 전염병처럼 계속해서, 

퍼져나갔을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소문은,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에까지, 파급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통분한 심정으로, 갈라디아서를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정들을 생각해볼 때, 바울이 분연히 일어나서, 베드로를 면책한 태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로,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14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바울은 베드로와,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안디옥 교회의 유대인들, 

심지어는 안디옥 교회의, 목회자였던 바나바까지도,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았습니다. 

복음의 진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십니다. 

따라서, 할례 받은 유대인이나,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이나, 구분 없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6-28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런데 베드로를 위시한, 남은 유대인들과 바나바는, 사람을 외모로 취했습니다. 

그들은 그 순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종들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주의자들을, 지나치게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어떻게 했습니까?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바울은 게바 곧 베드로를, 심하게 책망했습니다. 

그 이유는 베드로의 외식에, 원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베드로를 책망하되, 모든 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책망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모든 성도들, 곧 유대인 성도들뿐만 아니라, 

이방인 성도들이 모인 앞에서, 

바울은 공개적으로, 베드로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책망한 것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이르되”라는 동사는, 일회적인 동작을 나타내는 동사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어느 날을 잡아서, 모든 사람들이 모였을 때, 공개적으로 

베드로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책망을 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한 의도는 무엇이었습니까? 딤전 5장20절 말씀입니다.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공개적으로 지은 죄는, 공개적으로 책망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그 일로 인해서, 실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베드로를 어떤 말로 책망을 했습니까? 

14절 하반부의 말씀입니다.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베드로가 안디옥에 처음 왔을 때, 안디옥 교회의 이방인 성도들이 초청하는 대로, 

그들의 가정을 방문하고, 그리고 그들이 차려주는 대로, 먹었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이었지만, 율법에 얽매인, 다른 유대인처럼, 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이 안디옥으로 오게 되자, 그의 태도가 돌변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이방인 성도들과, 교제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와 같은 베드로의 행동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이방인들을 억지로, 유대인답게 살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교제를 하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하고, 또, 율법이 부정하다고 규정한 음식들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 셈이 되고 만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베드로의 외식적인 행동은, 결국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된, 

자유를 상실하게 하고, 다시금 율법에 얽매여, 

종의 멍에를 메도록, 만드는 셈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베드로를 위시한 남은 유대인들과 바나바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서, 행하지 않았기에,

원인을 제공했던 베드로를,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책망을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것은, 베드로의 외식적인 행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악영향을 받아, 실족할 수 있기 때문에, 

그를 책망함으로서, 복음의 진리를, 바로 세워나가기 위함이었습니다.

베드로 또한,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바울의 책망을 달게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책망에 대해서, 바울에게 대항하는 말이나, 변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바울을 높이 평가하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벧후 3장 15-16절 말씀입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베드로는, 자기를 면박한 바울에게, 단 한번도, 사적인 감정을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에게 공개적인 면박을 주었지만,

베드로는, 그를 사랑하는 형제라고, 부르면서 높여주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베드로의 성숙한 겸손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뒤돌아 보고, 반성해야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이러한 베드로도,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못하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이처럼 큰 인물도, 위대한 사람도, 얼마든지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야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섰다고 자랑하지 말고, 넘어질까, 늘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할 수 있도록, 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우리의 잘못된 행위가, 우리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고,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남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도록,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늘 진실한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지도자가 바르게 서느냐, 바르게 서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그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막대한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지도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지도자적인 위치에, 서있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목회자들과 당회원들은 말 할 것도 없고, 구역장, 남녀전도회장, 각 부서의 장, 

주일학교의 교사들에게 이르기까지, 모두가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무쪼록,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함으로, 모든 성도들에게, 

믿음의 본을 보일뿐만 아니라, 귀한 감명을 주고, 또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