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는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마틴 루터가 매우 사랑했던 성경입니다.
그는 성경의 모든 책들 가운데서, 갈라디아서를 최상의 책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갈라디아서는 나의 서신이다. 나는 갈라디아서와 결혼하였다. 갈라디아서는 나의 캐서린
(Katherine: 그의 아내이름)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루터 당시의 가톨릭은,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 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혜로, 얻는다는 사실을 루터가 발견하게 된 것은 바로,
갈라디아서의 깊은 연구를 통해서였습니다.
흔히들 갈라디아서를 가리켜, “영적 자유의 대헌장”(the Magna Carta of spiritual liberty),
“종교개혁의 구호”(the battle cry of the Reformation), 또는
“기독교인의 독립선언문”(the Christian`s declaration of independence)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서는 기독교가 유대교와는 어떻게 다른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기독교가
천주교와는, 근본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성경이기도 합니다.
먼저 갈라디아서가 쓰여진 배경이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아는 하박국 2장 4절
하반부의 말씀,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입니다.
이 말씀을 설명하기 위해서 세권의 신약성경이, 쓰여졌는데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와 '히브리서'
입니다. 세 성경 모두가 하박국 2장 4절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을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또, 갈라디아서 3장 11절 말씀을 보면,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히브리서 10장 38절에서도,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처럼 세 권의 신약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 권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뭔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로마서에서는, '의인에 대한 설명' 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에 대한 설명' 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는, 우리가 잘 아는, 믿음 장인, 히브리서 11장이 있습니다.
이제부터 살펴보고자 하는 갈라디아서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에대한 설명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를 살펴보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먼저, 1-2장에서는 바울의 사 도권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 이처럼 길게 설명한 이유는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하려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3-4장에서는 교리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만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길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5-6장인데
여기서는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사람이 살아가야 할, 바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1장 1-3절 말씀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편지를 쓸 때에 먼저, 보내는 사람을 밝히고, 다음으로 받는 사람을 밝히고,
그 뒤에 간단한 인사말을 하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본론으로 들어갔습니다.
바울도 이 관례에 따라서 갈라디아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절은 먼저 발신자가 바울
자신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2절은 수신자가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들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3절에서는 간단하게 인사말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1절에서 서신을 쓴 자기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다른 서신들과는 달리 매우 상세하게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울이 기록한 다른 서신서와 갈라디아서와 비교를 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로마서에서는 자신을 그저 단순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고전 1장1절을 보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다고 자신에 대해 소개를 했습니다.
다른 서신서들도 이와 대동소이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서신을 보면 아주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살전 1장1절을보면,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는 바울은 자기 자신의 이름만 기록하고 다른 설명을 일체
덧붙이지를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그만큼 모범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달리 갈라디아서에서는 자신을 얼마나 상세하게 설명을하고 있는지 갈라디아서 1장1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서 장황하리 만치 길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에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상황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에가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많은 이방인들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율법주의자들이 그들에게 왔습니다.
사도행전 15장1절에 나오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받지 못하리라 하니”
그들은 구원의 감격에 가득 차있는 갈라디아의 교인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갈라디아의 교인들은 그렇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러자 율법주의자들은 다시 물었습니다. “당신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갈라디아의 교인들은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율법주의자들이 또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할례는 받았습니까?” “아니오, 그런 것을 꼭 받아야 하나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요? 당신들은 성경도 읽지 않았습니까?
아브라함은 99세가 되어서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은 난지 8일 만에 다 할례를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할례를 받지 않고서 어떻게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갈라디아 지방의 교인들은 깜짝 놀라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지를 않았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자기들의 말을 정당화
하기 위해서 바울을 깎아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바울을 사도라고 불렀습니까?
바울이 무슨 사도요? 그가 언제 예수님과 함께 한 적이 있었습니까?
사도라면 베드로나 요한처럼, 예수님을 늘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직접 받은
사람들에게나 붙일 수 있는 칭호지요. 바울과 같은 사람을 함부로 사도라고 부르지 마시오.”
이같은 저들의말에 갈라디아 교인들 가운데는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에따라 할례를 받아야지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접하게 된 바울은 너무나도 충격이 컸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이렇게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율법주의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미혹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부활을 믿음으로 얻게 되는 것이지, 할례를 받아서 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
인간의 행위나 공로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자신의 사도권을 그토록 강한 어조로 변호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권위가 실추되었기 때문에 명예 회복을 바라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부인하는 율법주의자들 때문에 자신이
전한 복음이 거부될 위험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쩔 수 없이 먼저 자신의 사도권을 강하게 옹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먼저 '아니요'라는 부정적인 서술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지금 “사람들”이라고 복수형을 썼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자기를 사도로 보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사도들이 안수를 했기때문에 자기가 사도가 된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이번에는 “사람”이라는 단어가 단수형으로 사용
되었습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를
책임지고 있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또는, 바울을 예루살렘의 제자들에게 소개했던 바나바를 가리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지금 바울이 말씀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이 아무런,
인간관계나 인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이번에는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서 긍정적인 서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활 장인 고전 15장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부활하신 예수님은 바울에게 그모습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사도행전 9장과 22장 그리고 26장에 무려 세 번이나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바울을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특별히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에서 예수님은 다메섹에 있던 예수님의 제자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또, 사도행전 22장 2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여러분, '사도'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바울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셨으므로 누가 뭐라 해도 예수님의 사도가 분명합니다.
이번엔, 사도행전 26장 15-1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
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바울의 사도권은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사도권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사도로 삼으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 1장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마태 28장 19절 말씀을 보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이때, “이름”이라는 단어를 단 한번, 그것도 단수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 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장 1절에서도 바울은 “말미암아”라는 단어를, 단 한 번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과 하나님이 일체가 되셔서 역사하시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결국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임을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9-30절 말씀에서,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성부 하나님은 창세 전에 이미 바울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미리 하나님의 자녀로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바울의 모든 죄를 씻으시고,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 가운데, 바울을 영화롭게 하신 것입니다.
만일, 바울의 사도권의 근거가 사람이었다면, 율법주의자들이나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서 반대할 여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사도권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기에,
아무도 이의를 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큰확신을 가지고 지극히 담대한 마음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자신이 전한
복음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확신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직분이나 사명이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되었다는
확신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할때 비로소 우리는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실한 주님의
일군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바울은 다른 서신서에서는 일반적으로 함께 있는 자들의 이름을 밝히고 있습니다.
고전 1장 1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고후 1장 1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빌립보서 1장 1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살전 1장 1절 말씀입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왜,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는 자신과 함께 하는 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론하지 않고, 단지 “함께
있는 모든 형제”이라고 간단하게 서술했을까요? 바울은 거두절미하고,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절박하고도 급박한 상황에서, 갈라디아서를 기록하고 있다
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갈라디아의 교인들은 율법주의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미혹되어, 바울이 전한 복음에서 떠나려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함께 있는 형제들은 단지 바울의 사역을 돕는 조력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들과 더불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인사를 나누고 있는 것은 무슨 의도일까요?
한 사람이 말하는 것보다, 여러 사람이 하면, 그만큼 더 설득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자기 이외에도 많은 주의 종들이 마음을 같이 하여, 갈라디아 교인들의 잘못을,
고치기를 바라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의 수신자는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입니다.
다른 서신들과의 차이점은 다른 서신들은 어느 지방에 있는 한 교회에게 보낸 것인데,
갈라디아서는 그 지방에 있는 여러 교회들에게 보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로마에 한 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에 보낸 것입니다.
또, 고린도서는 고린도에 있는, 한 교회에 보낸 것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 지방에 여러 교회들이 있었는데,
이 여러 교회들이 돌아가면서 바울의 서신을 읽도록 보내진 것입니다.
갈라디아는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 내륙지방을 일컫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비시디아의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그리고 더베가 포함됩니다.
바울은 세번에 걸쳐 전도여행을 했는데 갈라디아 지방에서는 제1차 전도여행 때와 제2차 전도
여행 때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14장 19절을 보면 바울이 제1차 전도여행 때, 루스드라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루스드라는 바울에게는 끔찍한 곳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두 번 다시 루스드라에는 가지 않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때 또다시 루스드라에 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예수님이 명하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마태 28장 18-20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바울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복음을 전했습니까? 사도행전 20장 24절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이 말씀대로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또다시 루스드라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다만 한 생명이라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사도행전 16장 1절입니다.
“바울이 더 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바울은 그곳에서 자신의 믿음의 아들이요, 귀한 동역자였던,
디모데를 열매로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가 해야 할 본질적인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화로운 천국으로 부르시지 않고, 이 땅에 아직도 남겨두신 이유는,
영혼 구원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이 바로 전도에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예수님의 지상명령입니다. 따라서 절대적인 순종이 있을 뿐입니다.
복음을 전하기위해 우리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한다면, 우리에게도
전도의 귀한 열매가 맺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 3절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은혜는 구원의 원인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평강은 구원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서는 언제나 은혜가 평강보다 먼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구원을 얻게
되면, 그 뒤에는 자동적으로 우리의 심령에 평강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어디서 오는 “은혜와 평강”입니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입니다.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만이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말씀이, 곧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으며 평강이 찾아오게 됩니다.
바울은 인사말을 통해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자신의 바람을 피력하고 있는 셈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주의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미혹을 받아 요동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 위에 든든히 서서, 평안함을 누리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처럼,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지요.
자기의 공로로 구원을 얻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심령에는 평강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항상 좌절감에, 사로잡혀 살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무한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그러니 실수하고 넘어지더라도
좌절하지 말아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은혜를 베풀리라. 내가 너를 다시 세우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될 때, 우리의 심령은 평강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늘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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