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10:13)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Everyday, people who encounter miracles,,,

**복음·갈라디아서

믿음안에서 사는것

Andy1954 2021. 2. 8. 04:37

 

갈라디아서 2:18-21절,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베드로는 안디옥에서, 복음의 진리를 따라서, 바르게 행하지를 못했습니다. 

처음엔, 그곳의 이방인 성도들과,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식탁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어떤 음식을 먹든지, 상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이 그곳으로 오게 되자, 그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베드로는 율법주의자들의 비난이 두려워서, 이방인들과의 식탁의 교제를 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방인들과는, 함께 음식을 들지 않는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10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바울은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너무나 사람의 눈치를 보았습니다.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으면, 중심을 잡고, 하나님만 바라보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주님의 종이 아니라, 사람의 눈치를 살피면서, 

사람을 기쁘게 하는 종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베드로 때문에 바울의 동역자 바나바는 물론, 함께 있던, 다른 유대인들도 복음의 진리를, 

거스리는 행동에 물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 모든 이들 앞에서, 베드로를 강하게, 

책망 했습니다. 

13절에서 바울은, 베드로의 행동을, 외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또한 17절에서는, 베드로의 그런 행동이,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일이라고까지, 강하게 질타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 연속입니다. 18절 말씀입니다.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바울은 자기 자신을, 예로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베드로를, 직접적으로 면책했습니다. 

그래서 14절을 보면, 바울은 베드로를 가리켜서, “네가”라는 말로 단도직입적으로, 

그를 가리키면서 질책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15절 이하에서는, “우리가”하면서, 간접적으로 베드로의 잘못을, 책망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본문 18절에서는 “내가”하면서, 자기 자신을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나름대로는 베드로를, 많이 생각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오늘 본문에 나오는 “헐었다,” 또는 “세웠다”하는 용어들은, 모두 건물에 관계되는, 

말입니다. 

성경은, 복음의 진리를, 가옥의 건축으로 비유해서, 설명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을 대조하셔서, 

말씀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성경을보면, 바울도 건축 용어를 이용해서, 복음의 진리를, 설명하곤 했었습니다. 

로마서 15:20절 말씀입니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또, 에베소서 2:20-22절 말씀에서도, 인용되고 있습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율법의 의를, 

정신없이 추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그는 빌립보서 3:6절 말씀, 하반부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바울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율법의 의를 추구하던, 그의 삶에서, 완전히 탈바꿈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을 빌면, 지금까지 자신이 세워온, 율법주의를, 완전히 헐어버렸던,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 의, 곧 하나님께로서 난 의를, 

얻었습니다. 

그는 이것이 너무나도 귀함을 알았기에, 과거에 자신이 추구했던 율법의 의는, 

완전히,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그는 결코 뒤돌아보지 않고, 늘 앞만 바라보며, 신앙의 집을, 든든히 세워나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안디옥에서 어떠했습니까? 

베드로는 자신이 마땅히 헐어야 할, 율법주의를 다시금 세웠던 것입니다.

 

여러분! 율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가 무엇이었습니까? 

그 당시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이방인들도 있었고,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은, 대부분이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은 주장하기를,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 유대인들은, 율법에 규정된 규례를,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사도 바울이 배설물처럼 여겼던, 율법의 의를, 계속해서 추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자신이 헐었던, 율법주의를, 다시금 세운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는 자신을 "범법한 자"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범법한 자”라는 단어는, 배신자, 변절자라는 뜻이 강합니다. 

베드로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움으로, 무엇을 배신한 셈입니까?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저버리고 만 것입니다.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참 뜻을, 거역하고 만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2:16절에서 말씀했듯이,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해서, 우리 힘으로는 결단코 구원을 받을 수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함으로서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만듭니다.

베드로가 구원을 받은 것도, 율법의 의로,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율법주의로 되돌아간다면,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행위요,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참 뜻을, 거역하는 행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주의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요, 사실은 율법의 정신을 어기는 범법자가, 

되고 마는 셈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18절에서, 자신이 이미 헐어버렸던 율법주의를, 다시 세우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을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그 이유를, 19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니라.”

바울이 율법주의를, 다시 세울 수 없었던 이유는, 그가 율법을 향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죽었다”는 말씀은 “완전히 관계를 끊어버린것을 말합니다. 

“더 이상 율법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로마서 6:2절 말씀을 보면,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씀은 “우리가 죄와는 상관없는 자가 되었다,” 

따라서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죄의 권세 아래 놓여 있지 않다”라는 뜻입니다. 

또, 갈라디아서 6:14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씀은 “죽었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도 죽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사단이 다스리는, 세상의 원리에 따라 살지 않고, 천국의 백성으로,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따라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에 나오는, 율법주의가 무엇입니까? 

율법주의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살려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에는,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살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을 향하여는, 살지 못합니다. 결국은 죽고 맙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자기가 붙들고 추구했던, 

율법주의를, 완전히 헐어버렸습니다. 

이제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원인도, 율법이었습니다. 

율법 아래서 살다보면, 결국은 절망감에 빠져, 그곳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죽음의 대상도, 율법입니다. 

율법주의와는 완전히, 손을 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처럼, 율법주의를 깨끗이 청산했던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바울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난 의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복음 9장 62절에보면,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손에 쟁기를 잡으셨습니까?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만 바라보고 전진합시다. 

바울은 잘못된 것을 헐고 나서, 다시 세우는 일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고, 세상에 대하여도 죽고, 우리의 옛 성품과 자아에 대해서도, 

온전히, 죽어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20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신앙을, 아름답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20절 말씀을 함께 읽어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0절 말씀은, 내용상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첫째,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는 옛 사람의 죽음입니다.

둘째,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는 새 사람의 탄생입니다.

셋째,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는 새 사람의 삶을 가리킵니다.

 

좀더 자세하게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리함으로서 예수님은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습니다. 

로마서 8:3-4절 말씀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율법이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의롭게 하는 일입니다. 

물론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율법은 결코 우리를 의롭게 하지를 못합니다. 

이는 그 책임이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이 연약하여 율법을 다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의롭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 없는 자기의 독생자를,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인 인간으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의 모든 죄를, 자기의 독생자에게 다 담당시키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은, 율법의 모든 요구를, 다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다 이루었다.” 예수님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다 지불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자신은 더 이상 율법에 얽매여 

있을 필요가 없게 된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의 의를 추구했던, 자신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음을 여기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율법에서 자유함을 받았습니다. 

18절의 말씀대로, 그는 율법을 향하여 죽은 것입니다.

계속해서 20절 중반부에 있는 말씀을 생각해봅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는 새 사람의 탄생입니다. 이제는 삶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과거 옛 사람 때에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 사람이 되고 난 뒤의, 내 삶의 주인은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1:20-21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이제는 그리스도가 바울의 주인이요,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사나 죽으나, 그의 삶을 통해서, 오직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20절 하반부에 있는 말씀을 살펴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는 새 사람의 삶을 가리킵니다.

비록 우리가 새 사람으로 거듭 났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생활은 아직은 현세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세상에서 살지만,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배가 물에 떠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물이 배 안으로 들어오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이 세상에 파묻혀 살고는 있지만,

세상 사람들과 같이 세상적인 것들을 추구하면서 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갑니까?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차원 높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이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 “나를 사랑하사”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행위를 했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어떤 공로가 있어서, 우기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산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몸을 버리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안에서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언급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자기도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바울 안에는, 이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신다고 말씀했습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체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예수님의 죽음이 그의 죽음이 되었고, 예수님의 부활이 그의 부활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이러한 신비스러운 연합이, 늘 체험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예수님의 죽음이 내 죽음이요,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며, 

예수님의 승천이 내 승천이며, 예수님의 천국이 내 천국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울러 우리도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 위에 굳게 서서,

그 사랑과 그 은혜에 보답하는 심정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인 21절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바울은 여기서 안디옥 에피소드의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다시 말해서 사람이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 함을 받으려고 생각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그 결과를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이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다면,

하나님은 독생자를 의미 없이 이 땅에 보내신 셈이 되고 맙니다. 

또한 예수님도 십자가를 괜히 지신 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안디옥에서 베드로가 행했던 잘못도

결국은 이 두 가지의 결과를 초래하고 만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베드로를 단호하게 책망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의 두 가지 기둥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오직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알수 있습니다. 

둘째는 오직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죽으심이 내 죽음이 되며, 예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됩니다. 

또, 예수님의 영광이 내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6장14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한 것과 같이, 

우리들도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든든히 붙들고, 

십자가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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