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10:13)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Everyday, people who encounter miracles,,,

**복음·갈라디아서

내가 전한 복음은(2)(갈라디아서 1장 11-17절)

Andy1954 2023. 1. 28. 14:18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히 있었으나,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바울은 자신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한, 복음의 출처가 사람에게 있지 않고, 

신적 기원을 갖고 있음을, 11절과 12절에서 밝혔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그런 후에 바울은, 자신의 삶을, 세 시기로 구분을 해서, 이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가 구원을 받기, 이전입니다(pre-conversion, 13-14절).

둘째, 그가 구원을 받을, 때입니다(conversion, 15-16 절상).

셋째, 그가 구원을 받고 난, 이후입니다(post-conversion, 16 절하-17절).

 

그러면 바울이 자신이 전한 복음이, 사람에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로 된 것을, 

어떻게 입증하고 있는지를,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바울이 구원을 받기, 이전에 대해서 살펴봅니다(pre-conversion).

13-1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히 있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의 바울은, 어떠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유대교에 지나칠 정도로, 열심을 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교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의 가르침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찌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바울이 자신의 과거를 들추어내면서까지, 주장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과거에 너무 유대교에 빠져 있었던 사람이었다. 따라서 내가 전하는 복음이,

인간의 어떤 영향력이나, 사람의 뜻을 따라서는, 결코 내게 주어질 수가 없는 일이었다.”

만일 바울이 어떤 사람에게서, 복음을 받은 것이라면, 과연 그가 누구에게서, 

복음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유대교에 속한 사람이, 그에게 복음을 전해주었겠습니까? 

이것은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유대교의 가르침과 그리스도의 복음은,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인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였겠습니까? 

이것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유대교의 골수분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일을, 당연하게 여겼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1절의 상반부에 있는, 말씀입니다.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바울은 자기가 과거 유대교에 있을 때, 어찌하든지 교회를 심히 핍박해서, 멸하려고 했던

사람이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바울은 자기가 전하는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서는, 결코 자기에게,

주어질 수는 없었다고, 입증하고 것입니다. 여기까지, 지난 시간에,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둘째로, 바울이 구원을 받을 때에 대해서 살펴봅니다(conversion,).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의 구원도, 역시 사람에 의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15절과 16절 상반부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 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본문 13절과 14절의 주어는 “내가”였습니다. 바울이 주어였습니다. 

그런데 본문 15절과 16절 상반부에서는, 주어가 누구로 바뀌었습니까? 

바울을 그의 어머니 태로부터 택정하시고, 그를 은혜로 부르시고, 

바울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나태 내시고, 또 이 모든 일들을 기뻐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유대교의 열심 분자였던 바울을,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에게 전하기 위한, 

사도로 바꾸는 일은, 결단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변화시키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통해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한

복음도,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임을, 또다시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본문은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시작을 했습니다. 

유대교에 열심인 바울이, 자기가 핍박하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바뀐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얼마든지 하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능치 못하실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바울을 위해서, 어떤 일들을 하셨습니까? 

 

본문에 나오는 사건들을, 논리적인 순서로 설명하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첫째는, 택정하심 입니다(election). 둘째는, 부르심 입니다(calling).

셋째는, 나타내심 입니다(revelation). 넷째는, 전하게 하심입니다(witness).

이 네 가지의 사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따라서, 된 일들입니다. 

그러면 이 네 가지 일들을, 차례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택정 하심입니다(election).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를, 자기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 하셨다고 말씀했습니다. 

로마서 9장 11-1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어머니 리브가의 태로부터,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던 것처럼, 

바울은 자신도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함을 입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구약의 선지자 예레미야도, 이미 밝혔던 사실입니다. 

예레미야 1장5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 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또,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온, 세례 요한의 경우를 통해서,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 1장 13-17절 말씀입니다.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예레미야나 세례 요한과 마찬가지로, 바울 자신도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택정 하심을,

받았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는, 바울의 의도는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은 자신이 구원을 얻게 된 것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은, 자신에게 어떤 열심히

있어서도 아니며, 많이 배웠기 때문도 아니고, 자기에게 어떤 지도력이 있어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요, 섭리였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다음 사건인, 부르심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2) 부르심 입니다(calling).

이는 영원 가운데 이루어진, 하나님의 택정 하심이 역사 속에서, 시간 속에서, 실현된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시되, “은혜로” 불러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부르심을 받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은혜에 따라 됩니다. 

신명기 7장 7-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기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택함을 받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말미암아, 또는 너희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돼,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급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 하셨나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애굽에서 불러내심을 받은 것은, 

그들에게 어떤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며,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또, 삼상 12장 22절에서, 사무엘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같은 내용의 말씀을 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불러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그 일을 기뻐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번에는 대상 28장 4-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전에 나를 내 부친의 온 집에서 택하여,

영원히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셨나니, 곧 하나님이 유다 지파를 택하사, 머리를 삼으시고, 

유다의 가문에서, 내 부친의 집을 택하시고, 내 부친의 아들들 중에서, 나를 기뻐 하사,

온 이스라엘의 왕을, 삼으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내게 여러 아들을 주시고, 그 모든 아들 중에서,

내 아들 솔로몬을 택하사, 여호와의 나라 위에 앉혀,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려 하실새.”

 

하나님은 만백성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택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서 유다 지파를 택하셨고, 

또 그 가운데서, 다윗의 부친 곧 이새의 집을 택하시고, 이새의 집에서 다윗을 택하시고, 

다윗의 여러 아들 가운데서, 솔로몬을 택하셔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다윗은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의해서, 되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바울도, 자기가 구원을 받게 된 것이나, 사도로 세움을 받은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요, 은혜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언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사도행전 9장 1-6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오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바울은 다메섹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인간적인 견지에서 보면, 바울은 사도로 세움을 받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구원을 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고, 멸하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구원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만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6절에서, 갈라디아 교인들도, 역시 은혜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하나님이 바울을 부르신 것도, 갈라디아 교인들을 부르신 것도, 여기 있는 우리를 부르신 것도,

다 은혜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잘 나서 불러주신 것도 아니고, 우리가 착한 일을 해서, 불러주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자격이 없는,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 나타내심 입니다(revelation).

오늘 본문 16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은 바울의 심령 속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 주셨습니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겪었던 사건을,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그때의 일을, 아그립바 왕 앞에서, 더 소상히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6장 15-17절 말씀입니다.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하나님은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울의 마음속에 계시해주셨습니다. 

이는 바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바울은 유대교에서 자란 사람이었기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은, 결코 그에게,

그리스도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예수님이 율법을 모독한 자였기에,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을 추종하는 자들로 이루어진 교회도, 이 지상에서 완전히 없어져야,

마땅한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바울이 완전히 변해서, 이제는 자기의 목숨을 다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된 것은, 하나님이 그의 마음속에, 계시를 주셔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깨닫게 해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4) 전하게 하심입니다(witness).

택정 하심과 부르심을 받고, 계시를 받은 결과는, 복음의 전도자로, 보내심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의, 정상적인 종점은, 복음의 전파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아무런 목적이 없이, 우리를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해야 할, 선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선한 일은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벧전 2장 9절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여 부르시고, 또 그의 아들을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아들의 증인이 되어,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야 할 가장 선한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2장 1-2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의도하고 있는 바가 무엇입니까? 

갈라디아 교인들과 같은, 이방인들이 들어야 할 것은, 결국 무엇입니까? 

율법주의자들이 가르치는, 모세의 율법이나, 장로들의 전통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여기 있는 우리를, 창세 전에 택하시고, 불러주시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의 아들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업을 하십니까? 

그저 돈이나 벌라고,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은 아닙니다. 

사업을 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할 것입니다. 

영적인 면에서 보면, 아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은, 이방인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가 만나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운전을 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은 그저 운전이나 하라고, 우리를 불러주신 것이 아닙니다. 

운전이나 하면서 살라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면, 우리의 삶은, 그다지 가치 있는 삶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차에 타고 내리는 사람에게, 우리가 복음을 전해주면, 우리의 삶은, 그만큼 가치 있고,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드린, 네 가지 사건 가운데서, 택정 하심, 부르심, 계시하심의 세 가지는, 

그 시제가 모두, 일회적인 일을 나타내는, 부정 과거형으로, 기술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독, 마지막 넷째 사건인, 전하게 하심은, 현재형으로 쓰였습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일은, 날마다 중단 없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에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곧 '전도자'가 된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사람은, 신자로 대우를, 받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명심하면서, 날마다 쉬지 말고, 복음을 전하면서,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6절 상반부, 제일 끝에 있는 말씀은 “기뻐하실 때에”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이 말씀이 네 가지 사건의, 맨 끝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헬라어 원문 성경에는, 15절 앞부분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15절과 16절 상반부에 나타나는, 네 가지의 사건, 

곧 택정 하심과 부르심과 계시하심과 전하게 하심 모두가,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구원도 역시 사람에 의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두 시기에 걸쳐서, 자신이 전한 복음의 독립성을 입증했습니다. 

자신이 구원을 받기 이전의 시기에도, 또 구원을 받게 된 때에도, 

사람에게서, 복음을 받지 않은 것을, 밝혔습니다.

 

셋째로, 바울이 구원을 받고 난, 이후에 대해서 살펴봅니다(post-conversion,)

바울은 자기가 구원을 받은 후에,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설명은, 역시 분명합니다. 

바울은 구원을 받고 난 후에,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전혀 사람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16절 하반부와 17절 말씀입니다.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런 후 그는, 한 동안, 아라비아와 다메섹에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을, 만난 적이 없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아라비아나 다메섹은,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한 마디로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은, 먼저 사도 된 자들에게서, 받은 것이 아님을,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9장 17-20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후에,  그곳에서 아나니아를 비롯한,

제자들과 함께 며칠을 머무르며,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은 자기가 받은 계시에 대해서, 아나니아나 다른 제자들에게, 묻지않았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본문에서 말한 “혈육”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혈육이란, 인간의 유한성과 연약성을, 뜻하는 말입니다. 

마태 16장17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여기서 혈육은, 하나님과 대조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무한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에 비해서, 혈육은 유한하고 연약한 인간성을, 뜻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무한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에게서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어찌 유한하고, 연약한 혈육과,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보다도 더 높으신 분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에게서 받은 계시는, 순종이 필요한 것이지, 의논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네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내게 번제로 드려라.”

그때 아브라함은, 아무와도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와도,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의논이 아니라, 순종이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그 나머지는, 하나님이 다 책임을 지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반드시 좋은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바울은, 혈육과 의논하지도 않고, 또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러, 예루살렘으로도,

가지 않았음을 밝혔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자들은, 베드로를 비롯한 열 두 제자들과,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 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물론 바울이 그들을 만나서, 그들의 도움이나 인정을 받는다면, 아마도 바울의 전도 사역에,

많은 유익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인위적인 방법을, 쓰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체험했던, 하늘의 계시에, 완전히 압도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한 복음은, 순전히,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지, 

먼저 사도 된 자들의, 가르침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자기가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아라비아로 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 당시의 아라비아는, 매우 광범위한 지역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25절을, 보겠습니다.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 하고.”

여기에 보면, 시내 산도 아라비아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아라비아는,

위로는 유브라데 강부터, 아래로는 시내 반도까지, 매우 넓은 지역을, 이르는 말이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어느 지점으로 갔는지, 얼마나 오래 그곳에 있었는지, 

또, 왜 그곳으로 갔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우선 그가 다메섹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만일 아라비아가, 다메섹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면, 그는 다시금 다메섹으로 오지 않고,

그 인근에 있는 도시로 가서,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금 다메섹으로 돌아왔으니까, 그가 말하고 있는 아라비아는,

다메섹에서 그다지 먼 곳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라비아에서 머문 시일은, 그다지 길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아라비아로 간 사실에 대해서, 사도행전이 전혀, 기술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오늘 본문 다음절인, 갈라디아서 1장1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여기서의 “그 후”는 일반적으로,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후를,

가리킨다고 보고 있습니다. 

바울은 아라비아에서, 비교적 짧은 기간을 보내고, 다메섹으로 돌아와서, 그 삼 년의 대부분을,

복음을 전하면서,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왜 아라비아로 갔느냐, 그 목적이 무엇이냐? 

오늘 본문을 통해, 바울이 그곳으로 간 목적이, 다른데 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6절 하반부와 17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후에, 혈육과 의논하지 않고, 

또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도 가지를 않았습니다. 

그 대신 아라비아로 갔습니다. 

아라비아에 있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그곳으로 간 것은, 물론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유한하고, 연약한 인간을 만나기 위해서, 아라비아로 간 것이 아니라, 

무한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인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 아라비아로 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까? 

혈육과 의논하는 것보다도, 선배를 찾아가는 것보다도,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바울과 같이, 우리의 아라비아로 가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결정한 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책임지시며, 그 결과는 반드시, 형통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실수나 실패가,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9장 61-62절, 말씀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게, 자기가 예수님을 따르기는 하겠는데, 먼저 가서, 부모에게 인사를 하고

오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라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가지 말라는 뜻입니까? 

한 마디로, 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과의 의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직접 만나서, 기도로 결정하고, 

그 결정에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17절에서,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아라비아에서 머물며,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통해, 새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 22-25절 말씀입니다.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먼저 된 사도들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거 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바울은, 자기가 전한 복음의 독립성을,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이제는 자기가 핍박을 받는, 자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핍박을 하던 자가, 이제는 핍박을 받는 자로, 바뀐 것입니다. 

그는 핍박을 받으면서, 그 핍박을 달게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 나는 얼마든지, 핍박을 받아도 마땅한 사람이다". 

그러면서 자기가 당하는 핍박을, 얼마든지 기쁘게 감수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지나날들을 돌이켜 생각하면, 죄악 된 삶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의 허물까지도, 

다 사용하십니다. 문제는 우리의 현재입니다. 

하나님이 쓰시겠다고 부르시면, 순종하고 충성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 하시고, 은혜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다메섹 도상에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울 속에 나타내셨습니다. 

이것은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기쁘신 뜻 안에서, 창세 전에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속에 계시해주시고,  아직까지, 우리를 이 세상에

남겨놓으신 것은, 우리를 복음의 증거자로, 삼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호흡이 있는 한, 우리는 성심을 다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어떤 인생의 갈림길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 혈육과 의논하지 말고, 선배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도 가지 말고, 오직 아라비아로

가시기 바랍니다. 

힘 없는 인생을 의지하려고 들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힘 있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결정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리라,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의 핍박이 있어도,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면 됩니다. 바울은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살았습니다. 

우리들도, 바울의 삶을 본받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