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10:13)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Everyday, people who encounter miracles,,,

**복음·갈라디아서

이상하게 여기노라 (갈라디아서 1장 6-10절)

Andy1954 2024. 4. 6. 12:46

 갈라디아서 1장 6-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에게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라디아서를 기록한 사도 바울은, 신약성경의 거의 절반을 기록한 사람이었습니다. 

히브리서를 그의 기록으로 보면 그는 14권의 성경을 기록한 셈이 됩니다. 

신약성경이 모두 27권이니까, 그가 기록한 성경이 거의 절반에 이르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을 기록할 때, 인사말이 있는 서론 부분이 끝나고 본론 부분에 들어갈 때는, 

언제나 감사하는 말로 시작하는 것이 그의 관례였습니다. 

로마서 1장8절을 보면,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바울은 이렇듯 감사를 통해서, 그의 서신을 받는 교회나 개인의 장점을 부각해 칭찬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또 고전 1장4-7절에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고린도 교회에는 이런저런 문제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몇 개 파로 나뉘어서 분쟁하고 있었습니다. 성도 간에 송사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음행 문제도 있었습니다. 잘못된 은사관으로 인해서 교회의 질서가 흐트러지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이런 문제 많은 고린도 교회를 위해서도, 감사하는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빌립보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여성 지도자들 사이의 골이 매우 깊어서 교회가 분열될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편지할 때도, 빌립보서 1장 3-6절을 보면,

역시 감사의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이처럼 바울이 본론의 내용을 감사의 말로 시작하는 것은, 교회에 보낸 서신뿐만 아니라,

딤후 1장 3-5절 말씀에서는, 개인에게 보내는 서신에서도 같은 내용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이러한 관례는 또한 빌레몬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빌레몬서 1장 4-7절 말씀을 보면,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

 

이와 같이 바울은 교회에 서신을 보낼 때나, 개인에게 서신을 보낼 때나, 변함없이 감사의 말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갈라디아서에서는 그의 이러한 관례를 깨뜨리고, 감사의 말을 전혀

쓰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장 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바울은 다른 서신서에서는 “내가 감사히 여기노라”는 말로 그의 본론을

시작했으나, 갈라디아서에서는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는 말로 바뀌었습니다. 

이제까지의 그의 관례를 완전히 깨뜨린 것입니다. 

이는 갈라디아 교인들의 상태가 몹시도 심각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 대해서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뜻 생각하면 잘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고린도 교회이런저런 문제들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심려를 끼쳤습니까? 

그런데도 먼저 그들을 몇 가지로 칭찬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보내는 서신에는 전혀 칭찬의 말이 없습니다. 

오히려 질책하는 말로 시작을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이러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올바른 삶에 관한 것이었지, 교리에 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반면에, 갈라디아 교회들의 문제는, 복음의 본질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주의자 또는 율법주의자라고 불리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켰습니다. 

그런데도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것도 모르고 잘못된 가르침을 따르려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을 배신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갈라디아 교인들의 생사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엄하게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갈라디아 교인들의 문제점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6절을 보면, 갈라디아 교인들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떠나서 “다른 복음”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속히 떠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떠나다”라는 동사의 시제가 현재형을 쓰고 있습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떠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무엇입니까? 

본문 6절에 있는 말씀으로 대답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들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다른 복음”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닌, 할례와 같은 “율법의 행위”로 부르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6절에서, 율법주의자들의 가르침을 “다른 복음”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여기서의 “다르다”는 말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헤테 로스'인데, 이는 “질적으로 전혀 다르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에서 나온 말이, 영어의 heterodoxy 란 단어인데, 곧 '이단'이란 뜻입니다. 

바울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율법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을 복음이라고 부르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전혀 복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생각해봅시다. 과연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이 복음이 될 수가 있습니까? 

그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거기에 더해서

할례도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아무리 애써 율법을 지킨다고, 과연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습니까?

결코 없습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 그 해답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행위로 그의앞에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사람은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결코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율법주의자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고

하니, 어떻게 복음이 될수가 있습니까? 그들의 가르침은 사람을 살리는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복음 곧 good news가 아니라, 완전히 bad news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율법주의자들의 가르침은 복음과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이단사상, 곧 “다른 복음”에 불과할

뿐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 6절 상반부 말씀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을

떠나는 것을,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들을 부르신 이를 떠나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방인들이었던 갈라디아 교인들을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신 이는 누구였습니까? 

하나님이셨습니다. 로마서 8장 29-30절 말씀이 이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창세전에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리 아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그들을 미리 자신의 자녀로 정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그들을 역사 가운데서 부르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영원한 섭리 가운데서 영화롭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갈라디아 교인들이 은혜의 복음을 떠나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신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바울이 더더욱 이상히 여긴 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은혜의 복음에서 떠나되, “속히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별반 의심을 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너무나도 쉽게 이단 교리에 물들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물론 일차적인 잘못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한 거짓 교사들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복음을 전해준 바울에게 등을 돌리고, 율법주의자들의 이단 사상에 너무도 쉽게

물들어버린 갈라디아 교인들의 잘못도 결코 무시 못할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미 말씀을 드린 대로 여기에 사용된 “떠나다”라는 동사는, 현재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하고 있을 당시에도 계속해서, 그 일이 진행되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바울의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먼저 하나님에게 드리는 감사의 말로 수신자를 칭찬하던 그의 관례를 깨고, 

책망하는 말로 시작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떠나다”라는 동사는 원래 군대

용어였습니다. 군인이 전투 중에 자기 진영을 이탈해서 떠나면 어떻게 됩니까?

총살형에 처해집니다. 지금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처럼 위태한 짓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출애굽기 32장 8절에 이와 유사한 사건이 나옵니다.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 된 모습입니다. 

출애굽기 32장 8절 말씀을 한번 보겠습니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급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지금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 옛날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을 숭배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배교 행위를 저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노를발했던 것처럼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

교인들을 강하게 질책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7절 말씀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이 가르치는 내용의 실체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하려 함이라”

바울은 6절에서도 “다른 복음”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7절에서도 “다른 복음”이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6절에 사용된 “다르다”와 7절에 사용된 “다르다”는 헬라어로 같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단어입니다. 우선 6절에 사용된 “다르다”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6절에서 말한 “다른 복음”은 전혀 복음이 아닌 것을 의미합니다. 

영어로 표현을 하면 “a different gospel”이 됩니다. 그러나 7절의 “다르다”는

같은 종류 중의 다른 하나를 뜻합니다. 영어로 표현을 하면 “another gospel”이 될 것입니다. 

복음서 가운데도 마태복음이 있고 마가복음이 있고 하는 식입니다.

지금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영어로 표현해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입니다. 

“A different gospel is not another gospel. There is but one gospel. 

다른 복음은 또 하나의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의 가르침이 결코 복음이 될 수 없음을 강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6절 말씀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를 불러주셨다는 것만이,

유일하게 될 수 있을 뿐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율법주의자들이 전하는 “다른 복음”은 복음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면서, 

율법주의자들이 전하는 “다른 복음”의 실체를 두 가지로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선 “어떤 사람들”이라는

복수형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특정인 한사람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한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문안을 하면서, 자신에게도 뜻을 같이 하는 여러 명의

동역자들이 있음을 밝혔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2절입니다.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무엇을 줍니까? 

갈라디아서 1장 3절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렇습니다. 복음은 “은혜와 평강”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그들을

교란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못하게 하고 그들의 심령에 있는

평강마저 앗아가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시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자기 몸에 할례를 받아 육체의 모양을 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율법의 행위로 깨끗하게 하려고 하는 것을,

바라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오면서, 인간의 열심히나 공로, 인간의

행위를 가지고 나오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만을 바라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변하려 하다”라는 말은 정반대 방향으로 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율법주의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도

아닌데 믿음 위에, 할례와 율법을 좀 덧붙이면 무엇이 그리 잘못이란 말인가?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조금이라도 율법의 행위가 들어오면 이것은

복음이 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완전히 변질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율법주의자들이 어떤 식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켰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입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율법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시하고 율법의 행위를 주장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한 것이었습니까? 갈라디아서 2장 21절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율법의 행위를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이 복음을 또한 어떻게 변질시켰습니까? 갈라디아서 5장 6-10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율법주의자들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잘못된 가르침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의 믿음의 행보를

중단시켰습니다. 이처럼 율법주의자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믿음만 가지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며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침으로서, 

갈라디아 교인들의 믿음을 근본적으로 전복시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혼란케 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하는, 율법주의자들에게

엄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바울은 바울이 전한 복음과 율법주의자들의 가르침 사이에, 이점을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면 하나님이 계시하신 복음의 진리와

다른것을 전할리가 없습니다.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지만 바울은 복음의 절대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오늘 본문에서 “하늘로부터 온 천사”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요란케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고 있는 율법주의자들에게,

“저주를 받을지어다”라는 매우 강력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이 말이 단 두 경우에만 사용되었습니다. 한 경우는 고전 16장 22절에 나옵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의 저주가 임합니다. 

또 한 경우가 바로 오늘 본문 1장 8-9절에 사용되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처럼 복음을 변질시키는

자들에게도 역시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게 되리라 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문제는 전하는 자가 아닙니다. 전하는 내용이 문제가 될 뿐입니다. 

바울이 전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바울과 함께 하는 동역자들이 전하느냐, 또는 하늘로부터 온

천사가 전하느냐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1장 15-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 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동기가 좀 불순하기는 하더라도, 복음이 제대로 전해지기만 하면,

그것으로 기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전하든지 전하는 내용이 잘못되었을 때는 사정이 달라집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율법주의자들에 대해서 만큼은 가차 없이 정죄를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전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전하는 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살리는 good news가 아니라 도리어 갈라디아 교인을

죽이는 bad news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바울은 9절에서 다시 한번 복음의 절대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바울은 8절에서는 가정법을 써서, 하늘에서 온 천사의 경우를 예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9절에서는 직설법을 이용해서, 실제적인 상황에 대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실제로 잘못된 가르침을 주고 있는, 율법주의자들을 염두에

두면서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전에 갈라디아 지방을 방문했을

때에도 똑같은 경고를 했던 적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바울은 지금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반복해서 말하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는 우리가 잘 쓰는 말로 표현한다면, “천벌을 받아 마땅하리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바울이 7절에 이어, 이 말을 8절에서 또다시 반복하는 이유는 갈라디아 교인들의 마음에,

아주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이런 강한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의 가르침에, 이미 미혹된 자들은,

얼른 돌이키게 하고, 그 나머지 다른 갈라디아 교인들은, 아예 율법주의자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막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10절 말씀입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아마도 율법주의자들은 바울을 이렇게 비난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좋게 하는 자요,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는 자다.” 왜 그렇게 비난했을까요? 

바울은 오로지 믿음 한 가지만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방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에 대해서 율법주의자들은 바울이 사람들의 인기를 끌기 위해서,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고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친 것이라고 비난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본문 10절에서 율법주의자들의 비난을 강한 어조로 부인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들 말대로 사람들에게 좋게 보이려 했다면, 내가 그들을 저주하면서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키려고 하겠느냐?”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고 있는 율법주의자들에게, 하나님의 저주를 퍼부은

만 보더라도, 사람들에게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좋게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10절 하반부에서,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사람을 기쁘게 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자신은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기에 자기는 오직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일 바울이 사람들에게 좋게 하며,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는 자라면, 

그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순교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는 진실로 그리스도의 종이 었기에 일생토록 결혼도 하지않고 독신으로 지내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리스도를 위하여 로마의 영문 밖에서 순교까지 했던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당시 율법주의자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할례를받고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인간의 행위, 인간의 열심, 인간의 공로를 내세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바울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한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구원

하는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4-5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흔들리고 있었던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에 굳게 설 것을 당부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도 당시의 율법주의자들처럼, 이단 사상으로 우리를 요란케 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하려 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그런 이단 사상에 미혹을 받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복음의 유일성과 절대성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굳게 서서 아무런 흔들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바르게 전하며 또한 힘써 전하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사람들에게 좋게 하고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께 좋게 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 중심주의의 삶을,

살아갈 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