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10:13)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Everyday, people who encounter miracles,,,

**복음·갈라디아서

하나님께 영광을(갈 1장18-24절)

Andy1954 2024. 2. 20. 05:15

 지금까지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임을 밝혔습니다.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런 후에 그는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으며 예루살렘으로 가서 먼저 사도가 된 자들을 만나지도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는 아라비아로 갔습니다. 물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아라비아로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아라비아로 간 것입니다. 

그는 아라비아에서,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바울이 아라비아로 간것은 그곳에서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의, 자신의 사역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도 자신이 전한 복음의 독립성에 대해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사람에게서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바울은, 예루살렘 방문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자기가 예루살렘에서 머문 기간도 짧았고, 그곳에서 만난 사도도 많지

않았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그가, 그 이후, 수리아나 길리기아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도, 유대에 있는 교회들과의 전혀

접촉이 없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이나 자신이 전한 복음이, 

자신보다 먼저 사도가 된 자들로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님을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1:18-20)

본문 18절을 보겠습니다. “그후 삼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 일을 유할새.” 이것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고 난 후에 있었던,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을 가리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절에서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은 두 번째로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을 가리킵니다.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그러면 바울이 회심을 하고 난 후, 다메섹을 떠나 처음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된 배경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너무나도 밝은 빛을 보았기 때문에, 사흘 동안 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는 다메섹에 있는 아나니아 에게서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며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다음 된 일은 사도행전 9장 19-27절 말씀에 아주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읽다 보면, 아마도 사도행전 9장 21과 22절 사이에서, 바울이 아라비아로 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곳에서 깊은 기도의 시간을 가지면서, 더욱 영적인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다메섹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는 여러 날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힘써 전했습니다. 

그러다가 핍박을 받게 되고 그 핍박을 피해서, 밤에 광주리를 타고서 다메섹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기록된 대로,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된 배경입니다. 

 

오늘 본문 18절 말씀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그 후 삼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 일을 유할새.”

 

여기서 말하는 “그후 삼년”은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후 삼년을

가리킨다고, 보입니다. 

그가 두번 다메섹에서 복음을 전한 기간과, 또한 그가 아라비아에서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며,

자신의 사역을 준비한 기간을 모두 합쳐, 약 삼년 정도 시간이 흘렀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9장 19-27절의 말씀과 같이, 바울은 다메섹에서의 핍박을 피해 광주리를 타고

그 성을 빠져나와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게바를 심방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만난 게바는 누구입니까? 

요한 1장 42절을 보면,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여기에 세 개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시몬, 게바 그리고 베드로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이 세 이름은 모두 동일인의 이름입니다. 

시몬이란 이름은 베드로의 히브리식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헬라어로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게바는 아람어로 역시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게바는 바로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

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마태 16장 17-18절 말씀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사도행전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초창기에,

중추적인 인물이었음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15절 말씀입니다.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 가로되.”

 

사도행전 2장 14절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

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사도행전 3장 11-12절 말씀입니다.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

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자기들의 소유를 팔아 그 얼마를 감추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이 전부인양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을 때였습니다. 

그때도 베드로가 나서면서 그들을 질책했습니다. 사도행전 5장 3절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이외에도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의 집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도 역시 베드로였습니다. 

사도행전 10장 24-26절 말씀입니다.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이처럼 게바 곧 베드로는,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가장 중추적인 인물로서 능력 있게 쓰임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왜 게바를 찾아갔습니까?

그에게서 복음을 배우기 위해서였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맞는지 틀리는지

확인하러 갔습니까?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바울은 단순히 그를 심방하러 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바울이 기독교인들을 몹시도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인사차 게바를 찾아갔던 것입니다.

 

바울은 얼마 동안 게바와 함께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게바와 함께 있었던 기간은, 불과 십오일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있는 베드로나 또 다른 사도들로부터, 복음을 배웠을 것이라는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은 전혀 타당성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바울은 다시 한번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독립성을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과 게바는 서로 만나서 이 기간 동안에 무엇을 했겠습니까? 

날씨 이야기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하면서 보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자신이 다메섹에서 체험했던 일들을, 게바에게 전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또 베드로는 베드로대로 자신이 과거에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받은 

은혜를 바울에게 간증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함께 다짐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그 기간 동안에도 기회가 있는 대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1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바울은 그곳에서 게바와 함께 15일을 머무는 동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는

다른 사도들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야고보는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나오는 야고보와는 다른 인물입니다. 

마가 3장 16-18절 말씀을 보게 되면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는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제자가,

두 명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안드레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안인 시몬이며.”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고보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도 아니고,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 야고보 였습니다. 

마태 13장 55절 말씀입니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요한 7장 3-5절 말씀입니다.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그러나 야고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고전 15장 7절 말씀입니다.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 와.”

 

사도행전 1장 13-14절을 보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에, 야고보는 사도들과 함께 기도하는

일에 힘쓰며 초대교회 건설에 동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사도행전 12장 17절 말씀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던 베드로가, 예루살렘을

떠나게 됩니다. “베드로가 저희에게 손짓하여 종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그때부터 야고보는 베드로를 대신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요즘 말로 하면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담임목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총회 때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신약성경 야고보서를 기록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를 했든지, 그 무릎이 낙타 무릎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주후 62년경 돌에 맞아 순교함으로써 그의 삶을 마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동안 게바와 야고보 이외의 다른 사도들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왜 바울이 그때 다른 사도들은 만나지를 못했을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째 가능성은 다른 사도들이 그를 피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미 사도행전에서 읽었듯이, 바울은 다메섹에서의 핍박을 피해서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만일 다메섹에서 핍박이 없었더라면, 그는 다메섹에 더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와서 제자들을 사귀려 했지만 다들 두려워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려 들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때 바나바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바울은 게바나 야고보조차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그때 베드로와 야고보 이외의, 다른 사도들을 만나지 못했던 것은 다른 사도들이,

바울 만나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둘째 가능성은 다른 사도들이 핍박을 피해서, 이미 예루살렘을 떠났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8장 1절 말씀을 보면, 아마도 이것이 더 타당성이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처음에는 사도들만 예루살렘에 남아 있다가, 점차로 사도들도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는 베드로와 야고보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는 사도행전 12장 17절에서, 이미 읽은 바와 같이 베드로도 결국은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베드로와 야고보 이외의 다른 사도들을 만나지 못했다

는 것은 무엇을 뜻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의 복음이 다른 사도들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2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무슨 다짐을 할때 하나님을 증인으로 삼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바울도 여러 번 그런 표현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후 1장 23절 말씀입니다.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 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또 고후 11장 31절 말씀입니다.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

또한 사전 2장 5절 말씀입니다.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 하시느니라.”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을 증인 삼아 두 가지를 다짐했습니다. 

첫째는, 그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그는 그곳에서 게바와 함께 단지

십오 일을 유했을 뿐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둘째는, 그때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는 다른 사도들을 만나보지 못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다짐을 통해서 자신이 전한 복음이,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사람에게서 배운 것도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의 독립성을 내세우면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당부를

하고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아, 게바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복음을 직접 받은 것처럼, 

또 주의 형제 야고보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복음을 직접 받은 것처럼, 나도 예수 그리스도

에게서 복음을 직접 받았느니라. 그러니 너희는 율법주의자들의 그릇된 가르침에서 즉시 돌이켜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만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그대로 믿어야 하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내가 지금 사람에게서 말씀을 받고 있다.” 

이런 자세를 가지면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머리만 굵어집니다. 

영적으로 교만해서 말씀을 전하는 자를 비판하는 자리까지 이르게 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고 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질때 절로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의 가정에 갔을 때을 생각 해보십시오. 

그때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이 바로 이러한 마음자세를 보여주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31-33절 말씀입니다.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가 바닷가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느니라 하시기로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이 이러한 마음을 가졌을 때, 그들은 베드로가 전하는 말씀을 통해서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늘 이러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바울의 수리아와 길리기아에서의 전도에 대해서 살펴봅니다(1:21-24).

오늘 본문 21절입니다.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서 게바를 심방하고 그와 함께 십오 일을 유한 후에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사도행전 9장 28-30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십오일 동안도 힘써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헬라파 유대인들 곧 헬라 말을 쓰는 유대인들의 음모를 받아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은, 그를 데리고 가까운 항구 가이사랴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배를 태워 바울을 다소로 보내었습니다. 

다소는 길리기아 지방의 수도로서 바울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사도행전 22장 3절 말씀입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헬라파 유대인들의 핍박을 피해, 예루살렘을 떠난 바울은 일단 자기 고향 길리기아의 다소로

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1절에 보면 수리아라는 지방명이 길리기아라는 지방 명보다 앞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수리아는 길리기아 바로 밑에 인접해 있습니다. 

다소가 길리기아의 수도인 것처럼 수리아의 수도는 안디옥이었습니다. 

안디옥은 뒤에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한 교회가 있던 곳이었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길리기아의 다소로 가기에 앞서 잠시 수리아의 안디옥에 들렀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리아를 길리기아보다 앞서서 기록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울이 길리기아 다소에서 했던 사역보다는 수리아 안디옥에서 했던 사역이,

더 많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수리아를 길리기아보다 앞서 기록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1장 25-26절 말씀입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컫음을 받게 되었더라.”

 

아무튼 바울은 예루살렘을 떠난 후에 수리아와 길리기아에서 한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가 그곳에서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본문 23절이 그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 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바울은 그곳에서도 부지런히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지금 주장하고자 하는 논지는 다른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 22절입니다.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무슨 뜻입니까? 

바울은 수리아나 길리기아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도 유대에 있는 교회들과의 접촉이 전연 없었

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유대는 예루살렘을 포함한 그 인근 지역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를 예로 들어서 설명하면 예루살렘은 서울에 해당하고, 유대는 경기도에 해당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아무튼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서도 게바와 야고보 이외의 다른 사도들은 만나지를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들과 불과 십오 일을 함께 유했을 뿐입니다. 그 뒤에 바울은 수리아와 길리기아에서,

한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바울은 예루살렘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인근 지역인 유대에 있는 기독교인들과도,

전혀 접촉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통해서 다시 한번 자신이 전한 복음의 독립성을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23절 말씀입니다.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 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바울과 유대에 있는 기독교인들은 서로 만난 적이 없습니다.

다만 그들은 바울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뿐입니다. 어떤 소문이었습니까?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들이 들은 소문의 내용을 직접화법으로,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전에는 바울이 핍박자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전에는 무엇을 핍박했고 그가 지금은 무엇을 전하고 있습니까? 

바로 복음의 핵심인 “믿음”이었습니다. 

바울이 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그는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고자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바울에게는 율법을 무시하고 오직 믿음만을 강조하는 기독교인들은 죽어 마땅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러한 바울이 이제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전에 자기가 잔해하던 바로 그 믿음을 지금은 오히려 자기가 전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기독교인들이 바울의 변화된 모습을 잘 믿으려 들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9장 13-14절 말씀입니다.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사도행전 9장 21절 말씀입니다.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르는 사람을 잔해 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또 사도행전 9장 26절 말씀입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

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그러나 주께서 바울에게 은총을 베푸셔서, 그의 사역을 왕성하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이제는 바울 자신이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 23-24절 말씀입니다.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또, 사도행전 9장 29절 말씀입니다.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는다는 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야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된 자들은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이, 바울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으로 세움을 받은 사도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지금 유대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소문을 통해서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 무엇입니까? 

바울이 전에 잔해하던 바로 그믿음 곧 사도들이 전하는 그믿음을 지금은 바울이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들이 전하는 믿음이나, 바울이 지금 전하는 믿음이나, 서로 다르지 

않고 온전히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본문 마지막 24절 말씀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바울 자신이 하나님께,영광을 돌린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소문을 듣고 다른 사람들 곧 유대에 있는 교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궁극적인 의도는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은 그가 전한 복음은 독립적일 뿐만 아니라, 유대에 있는 교회들이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정도로, 자신이 전한 복음을 인정해주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갈라디아 교인들은 율법주의자들의 그릇된 가르침에, 미혹을 받아서는 안 되며, 바울이

전한 복음 위에 굳게 서야 마땅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떠합니까? 

사람들이 우리의 소문을 듣고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어지지는 않을까요? 

비록 우리의 얼굴을 본적이 없어도 우리에 대한 소문을 듣고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런 놀라운 은혜가 우리에게 나타나고 보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