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10:13)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Everyday, people who encounter miracles,,,

** 생수의 강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 (누가복음 10장 30-37절)(Go and do likewise.)

Andy1954 2023. 9. 20. 06:48

오늘 읽은 본문의 내용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를 가다가 강도를 만난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두 도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 까지의 거리는 약 25Km 정도로,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지만, 

그 두 도시 사이에는 민가가 거의 없는 광야였기 때문에, 예로부터 자주 강도가 나타나곤 했었습니다.

먼저 여기에 등장하는 두 도시의, 상징적인 의미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어떠한 곳입니까?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으로, 항상 예배를드리며,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곳입니다, 

반면에 여리고라는 도시는 상업이 발달한 큰 도시로, 세상의 사치와 향락을 즐기기 쉬운 도시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5장 6절에서,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고 말씀으로 경각심을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풀어서 설명하면,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갔다는 것은,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다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 없는 세상으로 나가게 되면, 이같이 예상하지 못한 강도를 만날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강도가 한 행위를 살펴 보겠습니다.

30절을 보니까,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무엇을 의미 합니까? w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에게 '의의 옷' 입혀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가 입고 있는 '의의 옷'을 늘 벗기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의 옷'을 벗긴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원하게 하거나, 하나님의 곁을 멀리 떠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으로 "때려서 거의 죽게 만들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사탄은 달콤한 유혹으로 우리를 꼬드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을 파멸시키는 일을 합니다.

때로는 육체도 병들게 하고, 정신적으로도 고통을 당하게 하며, 소유하고 있는 물질도 빼앗아 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서 "버리고 갔더라" 이것이 바로 사탄의 본성입니다.

사탄은 우리 인간을 이용할 대로 이용하고 나서, 결국에는 내팽게치고,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이 사람 곁을, 세 사람이 지나가는 장면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먼저, 그 중에 제사장과 레위인 그를 보고서도 모른 척하고, 피하여 지나갔다, 고 31-32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당시 회당(교회)의 지도자로, 율법을 가르치며, 교회의 중요한 일을 담당하고 있는 

소위,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있는 그런 사람들 이었습니다.

우리도 간혹 밖에서 친구를 만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아, 나는 교회를 다닌지가 오래되었고, 교회에서 큰 봉사도 담당하고 있다고 말을 하면서, 아주 예수님 

잘 믿고 있는것 처럼, 은근히 자신의 경건의 모습을 자랑하곤 합니다, 

그러나 막상 주변의 어려운 친구나 이웃 사람을 보고, 나 와는 상관 없는 일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못 본체 피하여 지나친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다를 바가 없으며, 또한 온전한 믿음을 

가졌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땅에 각종 유혹과 죄악이 범람하고 있는 이 때에, 우리 주변에도 이와같이 강도 만나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들은 바로 우리의 이웃이며, 친구입니다.

외면하지 말고, 피하지도 말고, 무관심 해서도 안 됩니다.

 

이번에는, 어떤 사마리아 사람 여행 중에 거기 이르러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아니하고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아주 멸시하고 있었으며, "이웃'이라는 개념 속에는 오직 

동료 유대인만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게되면, 예수님께서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에, 사마리아 여자가 말을 합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써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이어서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만큼 유대인들로 부터 멸시 받고, 무시당하며, 사람대접도 받지 못하던, 그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유대인의 이웃이 되어, 사랑을 베풀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마리아 사람이 어떻게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 주었는지 살펴 보면서, 우리들도 이와같이 행하여,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33절을 보니까, 불쌍히 여기는 마음 가졌습니다. 

잠언 14장 21절을 보니까,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을 돕고, 힘이되어 주려면, 먼저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34절을 보니까, 가까이 갔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갖는것 만으로는 부족 합니다.

가까이 가는 것은 살펴보고, 행하기 위한 첫 단계라고 할수 있습니다.

 

세번째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부어주고, 싸매어 주었습니다.

이 당시 여행시에 가장 필수적인 용품은, '기름과 포도주'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마리아 사람은 우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으로, 도와 주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선행은, 이처럼 자기의 희생과 헌신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16절을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실질적인 도움이 없는것은, 말 장난(lip-service)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 만은 아니니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네번째로, 이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을뿐만 아니라, 비용까지도 부담하고 있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쉽사리 할수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남을 의식하여 도와주는 시늉만 한것도 아닙니다.

더군다나 무슨 보상이나 상급을 바라고 한것도 아닙니다.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과 정성이 듬뿍 담긴, 아름다운 모습이며, 은혜스러운 행동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다 보면, 강도 만나 부서지고, 깨어지고, 고통중에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수 있습니다. 그럴때 그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고, '교회'로 인도해, 주님을 만나게 해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고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변에 영적 혼란으로 방황하는 자들이나, 혹은 육체적 질고로 인해 괴로워 하거나, 경제적, 물질적 어려움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이 시대를 살고있는 우리에게, 같은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 (Go and do likewise).

비록 자신들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유대인이지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처럼, 우리들도 '선'을 행하고, 자비를 베풀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기에 앞서, 왜, 주님께서 이와같은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을 

이해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으로 읽지는 않았으나, 25절 이하에서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수 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율법교사가 대답을 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가 비록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영생에 대한 질문을 하였으나 ,

그가 율법에서 가르치는대로 대답을 함으로 '네 대답이 옳도다'라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도, 이 율법교사가, 그러면 누가 내 이웃이 됩니까? 하고 끈질기게 묻습니다.

이 율법교사는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궁지로 몰아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율법교사는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며,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라고 기도하며,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 같은 사람이, 진정한 내 이웃이라,고 인정 받기를 원하면서 이 질문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의 선행'을 비유를 들어,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제한적인 이웃의 개념을 철폐하시고, 진정한 의미의 '이웃'을 가르쳐 주시고 계신것 입니다,

그리고 나서 36절에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유대인 율법교사는 주님의 이 질문에 '자비를 베푼자,라고 대답을 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 너의 대답이 옳다, 

그러니까, 너도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차별을 두지말고, 모두에게 선한 이웃이 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권위있는 주님의 가르침 입니까?

 

야고보서 4장 17절을 보게되면,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되는데, '죄의 삯은 사망이라' 고 로마서 6장 23절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되고, 이 죄의 값으로 죽을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28절에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영생에 대한 답을 이미 주셨지만, 

또 다시 37절에서,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고 명령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6절을 보게되면,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고통 중에 울고 있거나, 삶의 의욕을 상실한 체, 좌절하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랑을 전하고, 나누며, 베푸는, 진정한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 기뻐하시는 선한 백성이 되시어, 하늘의 영생복락을 받고 누리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