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10:13)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Everyday, people who encounter miracles,,,

**복음은 하나

죽음 그리고 사후(누가 16장 20~31절)

Andy1954 2024. 5. 5. 04:42

죽음이란 과연 무엇일까?,  죽음은, 하나님께로 부터 분리이고, 영과 육체의 분리이며,

또 인간의 거주환경인 우주로부터의 분리라고 정의 할수 있습니다. 

 

그러면 죽은 다음 그 사후는 어떻게 되느냐에 대해 궁금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먼저 과학에서는, 육체와 영혼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 부인하고 있습니다.

과학은 감각적인 기관에 의한 대상들을 탐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감각에 잡히지 않기 때문에 죽음은 육체로 끝나고, 그 이상에 대해서는 전혀 없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과학적으로는 영혼의 존재를 증명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현대 의학에서도 육체안의 독립적인 존재로서 영혼이 존재한다 하는 것에 대해서,

과학과 마찬가지로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학에서는, 감각기관을 통해서만 모든 걸 탐구하고 있습니까?

자주 쓰는 말이 아니지만, '표상'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표상이라는 말은, 우리의 의식 기관이 상을 만든다고 하는 뜻입니다.

우리의 의식 기관이, 사물들을 볼 수 있도록 상을 만들어 주고, 이렇게 상이 이루어지는 것만

감각기관으로 좇아갈 수 있어서, 그것만 과학의 대상이라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심리학이나 의학에서 영혼은 그것은 두뇌의 기능, 작용일 뿐이지 별도의 독립적인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와일드 팬 필드'라고 하는 미국 태생의 카나다 두뇌 과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과학자이면서도 영혼의 존재를 믿고 주장하며, 가르치고 또 나름대로 증명했습니다.

이 교수는 본래 의학을 한 사람이 아니고, 1921년 프린스톤 철학과를 졸업했습니다.

프린스톤에서 철학을 공부한후에, 두뇌의학으로 전향을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영국의 세계적인 두뇌학자인 '쉐링턴 경' 에게 가서 두뇌의학을 연구한 후에,

팬 필드 또한 세계적인 권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수없는 간질 환자들과 교통 사고로 두뇌를 다친 많은 사람들을 고치면서, 두뇌에 대해서는

정말 구석구석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얻은 결론이 영혼은 독립적인 존재로 존재하며, 또 거기다 더해 영혼은

출생하고 나아가서 창조된다고 주장 하였습니다. 

순전히 과학적인 근거에 의해 내려진 결론입니다.

사람의 영혼은 독립된 존재로 존재하고, 그리고 사후 즉, 육체의 죽음 후에도 존재한다.

다만, 모든 일을 하려면 에너지가 공급되어야 하는데,

육체와 분리된 상태의 영혼은 에너지가 공급되지 아니하므로, 새로운 일은 하지 아니하나 기억은

그대로 갖고 있다고 주장 하였습니다.

 

철학적에서도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확실한 말을 못하고, 있습니다.

칸트는 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의 영혼이 인간의 지성의 능력으로 알 수 있는 세계는, 

이 감각기관으로 표상할 수 있는 세계 뿐이고, 내세라든지 하나님이라든지 초월의 세계등,

이런 것에 대해서는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게 단언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세계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수 있습니까? 

세계라고 하면, 이런 우주적인 세계도 말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세계라고 할 때는, 지구상의

인류가 갖는 모든 지식과 경험들이 총화를 이룰 때 그걸 세계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세계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과학의 지식을 전달하는 방식으로는 확정적인 그런 진술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칸트의 실천이성에서는 윤리적인 이성 도덕적인 이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윤리 공동체가, 어떻게 하면 바른 삶을 살 수 있을까 연구했습니다.

그는 실천이성비판을 통해서 바른 삶의 법칙을 제시했습니다.

사람이 윤리적인 행동을 하는데 있어서, 순수이성비판에서 도저히 알 수 없다고 하는 내세와

하나님과 자유의 개념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칸트는 사람이 악하게 살았든 선하게 살았든 간에, 아무 차별도 없이 내세에 가서도 똑같다면,

누가 일률적으로 바르게 살려고 하겠느냐고 되물으면서, 그러니까 하나님이 계셔서, 이 선악에

따라 상급과 형벌을 주는 존재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윤리생활을 바로 하려면 내세도 있어야 하고 또 하나님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증명할수는 없지만 요청은 됩니다. 

결국 자유와 내세와 영원의 불멸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도 요청되는 것입니다.

이건 지식적으로 증명되는 상황이 아니고, 단지 요청만 되는 것입니다.

칸트는 철학적으로도 내세를 증명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과 내세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확실한 건 하나님 말씀이고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에 의해서, 영혼이 사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으면 신자의 영혼은 하나님 품으로 가고, 불신자는 지옥으로 갑니다.

그러면 그곳이 어디냐? 증명을 해보라고 한다면 어렵지요.

영혼은 육체를 벗으면 그와 같은 상태를 벗어나, 하나님이 계신 영원의 세계로 가는 것일뿐 입니다. 


그러면  낙원하고, 음부는 무엇입니까?

신자들이 죽으면 낙원에 갔다가, 주님 오셨을 때 천당으로 가는 걸로 알고 있고, 불신자는 음부에

갔다가 주님이 재림하셔서 심판하신 후에, 지옥으로 가는 걸로 알고있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낙원이라고 하는 하나님이 계신 별도의 처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께서 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말씀하셨느냐 하면, 낙원이 천당과 별도의 곳에 있기 때문이 아니고, 

첫 낙원이 타락으로 인해서 폐쇄되고, 노아 홍수 때 하나님께서 완전히 흔적을 없애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처음 낙원이 소실되니까, 후대 유대교에서 지상에 있던 낙원을 하늘로 올려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후기 유대교에 의하면 낙원이 메시야의 처소입니다.

바로 유대인들의 그러한 사상을 아시고 계신 예수님께서, 십자가 밑에 있는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과 바리새인들과 백성들이 다 듣을수 있도록,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고 말씀하심

으로,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내가 너희들이 못 박은 내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낙원을 사용하심으로 자기가 메시야이신 것을 백성들에게 선언하신 것입니다.

죽으면 다 주님 계신 곳에 가지, 낙원이란 별도 처소가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음부는 어떤 곳이냐?

음부란 말은, 구약에서는 스올이라하고, 희랍어에는 하데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3절을 보면, 하데스에서 그의 눈을 들어 멀리서 아브라함을 보면서 그의 품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습니다.그러니까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가고, 부자는 하데스라는 곳으로

갔으니까, 음부라는 곳이 따로 있지 않느냐?

그런데 여기서, 스올이라고 하는 히브리어가, 보통 세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는, 죽음을 뜻하고, 두번째로는, 무덤을 뜻하고, 세번째로는, 죽은 자들이 가는 곳을 뜻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기독교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는, 죽은 자들이 다 저승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저승은, 죽은 자들의 세계 아닙니까?

죽은 자들이 다 같이 가는 곳으로 말했는데, 이것이 하데스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데스나 스올이나, 마찬가지로 악령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러면 이곳이 지옥 중간 지점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다 지옥을 뜻합니다.

그러면 왜, 죽은 자들의 세계라고 합니까?

우리 인간은 영혼 뿐만 아니라, 육체가 필연적인 구성요소로되어 있기 때문에 육체를 벗은 영혼은

죽은 자에 속하기 때문에, 산 자의 세계에서 끊겨있고 아무런 활동을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품에 가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도, 주님께로 간 영혼들은 죽은 자에 속하지,

산 자에 속한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혼이 육체와 분리 될 때부터 주님 오실 때까지가, 중간기 상태라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별도의 처소가 따로 있는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일단 산자의 세계에서 끊어

집니다, 공중에서 배회하는 것도 아니고, 바로 가야 할 자리 천국이나 지옥으로 갑니다.

인간의 영원한 운명은, 몸을 입고 살아 있는, 생존기간에 결정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죽은 후에 결정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이 확실하고 확실히 해야 할 진리입니다.

 

그런데, 스웨덴보르크라고 하는, 입신의 경험이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몸은, 완전한 육체적인 몸하고, 영적인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죽으면 육적인 몸은 벗고, 영적인 몸으로 부활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주의 품으로 가는 것이고, 지옥으로 가는 것이지, 우리의 몸이

이중 구조로 되어 있어서, 지금 보이는 몸이 육체적인 몸안에 영적인 몸이 또 있어서, 영적인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은 전혀 터무니 없는 주장입니다.

 

그 다음에, 스피리티즘 또는 영계주의라고도 하는 이들이 있는데, 죽은 사람의 영혼이 저승에

가지 않고, 이 세계에 살아서 활동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초대교회서 부터 있던 이단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들은 인간의 수명이, 홍수

이후에 120세까지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120세가 인간이 정상적으로 살아야 할, 수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전에 죽으면, 120세 수명을 지상에 있으면서, 떠돌아 다니다가 120년이

차면 음부나 낙원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고, 우주로 부터 분리되기 때문에, 죽은 자가 산 자의

세계에 남아 있을 수 없고, 산 자의 세계를 넘나들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 주장은 전적으로 허황되고 거짓된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갈 곳으로 가는

것이지, 결코 사람의 영혼이 귀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칸트 이전과 이후의 신학은 서로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근세신학 이후에 전개되는 신학의 경향을 알려면, 칸트를 이해하지 않고는 근세신학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으로 인간의 이성이 알수있는 영역을 감각의 세계, 시간과 공간의

세계로 제한을 했습니다.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은 순수한 지식을 과학적인 지식을 탐구하는 영역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인간이 바르게 살 수 있는가 하는 윤리의 영역이었습니다.

 

이러한 칸트의 영향이 한 세 가지로 나타나는데,

19세기 슐라이어막허와 같은 윤리진보주의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죽은후에 운명이 완전히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죽은 후에도 발전하고 인간의 덕을 함양하는 진보의 단계가 있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개혁주의에서는 살아있을 때, 중생 후 성화의 과정이 어떠했든지 간에 죽는순간 하나님의

특별한 영적인 은혜의 역사로 성화를 종결시키고 완결시킵니다.

그래서 주님 앞으로 갈 때에는 완전히 죄의 몸을 벗고, 깨끗해진 영혼으로, 주님 앞에 가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린 아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어린 아이라도 선택된 경우는, 성령의 특별한 은혜에 의해서, 그를 중생시켜서,

완전히 깨끗하게 해 가지고 주님 품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윤리주의자들은 죽은 후에도 계속적으로 덕의 진행이 이루어지고 사후에 완전한 운명이

결정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18세기의 개신교의 신학자들이, 이러한 사상을 갖게 된 것은, 

복음서에 기록된 복음의 내용을, 그 당대의 언어와 사상으로 번역하여, 그 당대의 사람들이 쉽게

알아 듣게 하는 것을 신학 활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원칙 때문에, 18세기 이후에는 많은 신학이 일어났다가 사라졌습니다. 철학이 나올 때마다,

그 철학에 맞추어서, 신학을 새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칼 바르트도 그렇고, 불투만도 그렇고,

틸리히도 그렇고, 지금의 몰트만도 그렇고, 판넨베르크도 그렇고, 다 철학 없이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점은, 연옥이 로마교회의 중요한 교리로 확정된 것입니다.

연옥교리는, 로마 교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희랍정교회도 갖고 있습니다.

희랍정교회가 갖고있다는 말은 초대교회 교부들 그러니까 그레고리, 대 바실, 그런 사람들도

연옥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희랍정교회는, 연옥은 있어서, 거기서 정화의 과정을 밟는다는 것은 인정은 하나, 로마교회처럼,

지상에서 하는 행동이 그연옥에서의 정화과정과 시기를 결정한다고 하는것과 큰 차이가 납니다.

로마교회는, 미사와 선행과 많은 헌금을 통해서, 연옥에 가 있는 자들의 정화기간을 단축하고,

천국으로 들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희랍정교회는 지상에서 진행되고 있는 선행이라든지 교회의 많은 헌금이라든지,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큰일을 하는것이, 이 연옥에 가 있는 사람들의 정화과정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도 보면,

죽은 부자가가 바로 지옥에 가고, 나사로도 바로 하나님이 계신, 아브라함의 품에 갔지, 중간기

처소에 가서, 정화하는 기간을 거치지 않았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교회는 완전히 선한 사람들은 천국에 가지만, 세례받고 완전하지 못한

사람은 연옥으로 가고, 더악한 자들은 지옥으로 가고, 그리고 세례도 받지 못하고 어렸을때 죽은, 

어린 아이들은 림보에 간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것은, 2,000년 전에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서, 

그의 조상들과 택한 백성들에게 전가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선조들의 죄도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용서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의 공로가, 구약 백성에게 전가되게 하심으로, 하나님 품으로 갈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조건적 영생설이라는게 있는데, 본래 사람은 다 죽도록 창조되었는데, 예수를 믿은

사람은 영생에 이르고, 믿지 않은 사람은 멸절된다는 설입니다.

또, 조건적 불멸설이란게 있는데 알고 보면 마찬가지입니다.

본래 사람이 죽지 않도록 창조되었지만, 죄 때문에 다 죽게 되었고, 죄 지은 사람은, 다 죽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지으면 살수있는 사람이 없기때문에, 멸절설이나 같은 말입니다.

예수믿는 사람은 구원에 이르고, 믿지않는 사람은 멸망에 이른다면, 얼마나 좋은 이야기 입니까?

예수 믿으면 영생하지만, 예수 안 믿으면 끝나니까, 세상에서 마음껏 살다 죽어도 두려울게 없을

듯 합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공의에 배치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선행을 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영생을 얻는다면,

하나님을 배척하고, 훼방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끝까지 거부한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에 의해서,

영벌을 받아야지, 그냥 죽어버린다, 멸절해 버린다고 하는 것은 맞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고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이데거는, 죽으면 무로 돌아가고, 아무 것도 없는 거라고 주장합니다.

불교에서는 죽으면 극락에 간다고 하는데, 극락이란 곳이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영혼이 극락세계로 간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민족 사상을 원효가 토착화해 놓은 것이고,

본래 불교에서는 영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흐름만 있다고 주장을 합니다.

죽으면, 이 의식의 흐름이 완전히 없어집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것을 입적이고, 열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불교가 말하는 극락세계에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에 이른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역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끝까지 거부한 사람들은, 영벌에

이르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종말에 가면 지옥이 소실된다고 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같은 주장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칼 바르트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초대교회 부터,

이 사상이 있었습니다. 오리게네스, 오리겐에 의하면, 하나님이 만유를 회복하신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하나님의 지으신 존재 중에,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지 못할 존재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모든 것을 회복하시고 완성하실 때에, 심지어 사탄까지 정화되어서, 그 완성된 단계에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이론은 아주 좋지요?

 

그러나, 전통적인 개혁신학에는 칼빈의 선택교리가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개혁교회와 개혁신학이 욕을 많이 먹습니다.

선택교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쁘신 뜻대로, 부패의 덩어리들 중에서 일부를, 영생에 이르도록

선택하시고, 그 나머지를 간과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0세기에 와서,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선택은 그렇게 악한 자와 선한 자,

구원 얻을 자와 구원 얻지 못할 자, 야곱과 에서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과 함께, 인류 전체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기된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선택하므로, 모든 인류가 그 안에서 다 선택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뭐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은 무엇이냐?

칼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선택된 사람인 줄 아는 것이지만, 교회 밖의

사람들은 그걸 모르기 때문에, 복음의 전달을 통해서 그들도 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라

고 하는 것을 알게 해 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 선택되었는데 누가 유기됩니까? 다 선택되었는데 어느 종교만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입니까?

이 사상에 근거해서 로마교회가, 종교간의 대화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바르트의 후계자들에 의해서, 종말에 지옥이 정화처로서 다 불로 정화해서, 악을 제거해, 만유가

회복되었을 때 거기에 동참할수 있게 했는데, 지옥이 더이상 남아있을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이 만인구원설의 결론입니다. 만인구원설이 되면 예수 안믿어도 됩니다.

지옥에 가서 고생 좀 해도 최후에는, 사탄도 정화되어서 완전히 창조에 회복되는데 하나님이 만유

를 회복하실 때, 우리들도 다 회복되어 회복된 세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 믿으려고 바득거릴 필요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19세기 헤겔 철학의 영향을입은 윤리적 진보를 말하는 신학자들을, 매개 신학자들이라고

하는데 제 2 시련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핵심 주장은, 인류가 하늘로 올라가도록 작정되었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동안 예수를믿지

않았어도, 죽은후에 중간기 상태에 머물다가 마지막 단계에서 복음을 거절할 때만 정죄 되어 지옥

에 이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전적으로 잘못된 주장입니다,

 

죽은 자의 운명은 죽음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변경이 사후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복음으로 구원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복음외의 방법으로 또 한번의 구원의

길이 있다고 하는 것은 복음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권세요, 권능이라고 한, 로마서

1장 16-17절 말씀에 크게 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외에 다른 방법으로 구원이 또 있다고 하는것은, 하나님의 구속경륜을 근본적으로

해치는 것입니다. 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전의 사람들과 이스라엘 밖의 사람들의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셨고, 그 이후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

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다른 방식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하나님의 작정에, 전적으로 반하는  비 성경적인 것

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