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10:13)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Everyday, people who encounter miracles,,,

**행함.야고보서

신약시대의 성도의 인생관 (약 5:7-12)

Andy1954 2022. 7. 11. 03:35

네덜랜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노라'

많은 사람들이, 참 멋진 말이라고 생각하여, 자주 인용하는 말중의 하나입니다.

이 말은, 아무리 상황이 좋지 않아도,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정말로,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는데, 누가 과연, 사과나무를 심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설사 심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괜한 고집에, 불과합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인데, 지금 사과나무 한 그릇 심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무모한 짓일 뿐입니다.

만일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면, 누가 가장 억울해 하겠습니까?

아마도, 많은 재물이나 권력, 혹은 명예를 거머지고 있는, 사람들 일것입니다.

내일을 바라고, 지금까지 죽어라고 뛰어다니며, 이루어 놓았는데, 종말이라니요?

얼마나 비통하고, 황당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여러분도, 산으로 올라가서, 사과나무를 심으시겠습니까? 다 부질없는 짓입니다.

종말이 온다면, 아마도, 지금 하고 있는 일들, 또는 하고자 하는 일들의 대부분이,

무의미하고, 쓸데없는 일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고 말씀하고 있으며,

또한, 9절에는,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8절이나 9절 말씀, 모두가, 임박한 세상 끝날을 일컫는 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바로 내일 종말이 온다는, 그런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누릴, 장미빛 미래를 내다보며, 살아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성도는, 주님이 속히 오시기를, 고대하는 자들입니다.

그 날이 언제일지, 알수 없으므로, 항상 깨어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의미없는 일들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주님이 다시 오셔서 이루실,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있는 것입니다.

노아는, 마지막 날에, 물로 세상을 심판하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방주 만드는 일에,

자신의 삶을 쏟아 부으며, 살았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노아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어리석고, 고집스럽고, 무모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옳고, 누가 현명했는지는, 하늘에서, 물이 쏟아지고, 온 세상이, 물로 덮일 때에,

알게 되는 것입니다. 노아는, 오직 그 마지막 날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갔던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셨다면, 노아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우매한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한, 모든 일들에 대해, 비난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대로, 물로 심판하셨고, 산에 있는 노아의 방주를, 물에 띄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통해서, 노아의 믿음이 옳았음을, 증명해 보이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의 가치와 옳고, 그름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판가름 날 것입니다.

지금은, 좀 답답하고,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또는, 무모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에, 비로소, 그 진가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누가 옳았는지, 판가름 날 것입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는 성도들은, 

노아가, 인내하며 방주를 지었던 것처럼, 묵묵히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7절 말씀처럼,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여기서 말하고 있는, '길이 참으라' 는 말 속에는,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 결코 녹녹치 않음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분명,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찾는, 넓은 길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말씀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 삶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여러 어려움에 봉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절 말씀에 보면,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본은, 주님을 증거함으로, 고난을 당해야만 했던, 선지자들의 오래참음이,

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신 ,주님이 우리의 본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잘 믿고, 출세하고, 성공한 사람들만을, 본으로 삼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말 주님을 위해서 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의 삶을 살다간, 믿음의 선진들의 삶은,

되도록, 본으로 삼지 않을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살기, 싫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의, 고난과 오래 참음으로, 본을 삼으라고,

하시면서, 욥의 인내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욥기 1장1절에 보면, 욥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이어서, 1장 8절에 보면, 그의 의로움은, 하나님께서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그런 욥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욥은 인내하였다는 것입니다.

욥의 인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욥의 결말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내의 결과는, 욥기 42장10절 말씀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결국,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의 삶도 역시, 욥과 같이, 인내 하며, 오래 참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오래참음의 예로, 농부의 삶을 들고 있습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면서, 씨를 심고, 농사를 짓는 농부들처럼, 길이 참으라는 것입니다.

농부가, 수고하며, 인내하며, 농사를 짓는 것은, 그냥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장차 맺게될, 열매를 바라보며, 수고하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인내 역시, 그냥 참는 것이, 미덕이기 때문에, 참는 것이 아닙니다.

소망 가운데, 참는 것입니다. 그 소망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분명하게, 그 인내의 댓가가,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인내가, 헛수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복되다는 것입니다.

소망 중에 기다리는 우리 주님은, 자비하시고,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농부의 인내와 수고가, 헛되지 않듯이, 노아의 인내와 수고가, 헛되지 않았듯이

또한, 욥의 인내가, 헛되지 않았듯이, 성도의 인내와 수고 역시,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주님 오실 날을 소망하며, 그 날에 모든 것을 걸고, 인내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야고보 사도는,  8절 말씀을 통하여, '마음을 굳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해도, 여러 시험과 고난을 만날 때에, 마음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질그릇과 같은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작은 시련에도, 금방 약해지고 맙니다.

그래서, 마음을 굳게 하라는 것입니다. 뒤로, 물러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의 강림이, 가깝기 때문입니다.

마라톤 선수가 42.195KM 를 달릴때, 너무나 힘들어 중도에 포기하고 싶어도, 조그만 더 가면,

결승선이라는 생각을 하면, 다시금 힘이 나는 것입니다.

권투 선수들도, 마지막 라운드에서는, 왠만해서는 다운되지 않습니다. 3분만 버티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이제 얼만 안남았으니, 조금만 인내해라, 약한 마음을 먹지 말고, 마음을 굳게 해라.

이제 곧, 내가 갈 것이다. 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음을 굳게 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더디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더딘 것이 아니라고, 벧후 3장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계속해서, 야고보 사도는, 또한 서로 원망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인내하는 가운데, 지쳐버리면,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기 쉽습니다.

저 옛날,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광야길을 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 역시, 가나안의 소망 가운데 가고 있으나, 때때로, 힘이 들고, 지치면, 원망이 터져 나왔던 것입니다.

저들의 원망이, 쉽게 나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광야에서, 사흘길을 가는데, 물이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원망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데, 왜 이런 길로, 인도하시나? 하는 원망이, 저절로 생기지 않겠습니까?

우리 마음 가운데도, 늘 원망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음을, 잊지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문밖에 서 계십니다.

그리고, 12절을 보시면,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 맹세하지 말고, 오직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라는 것입니다.

예스와 노를,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맹세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맹세와는 좀 다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맹세는, 자신이 진실로 그렇게 하기 위해서, 맹세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교묘하게 빠져 나가기 위해서, 하는 맹세입니다. 하나님 이름으로, 맹세하면 안되니까,

저들은 하늘이나 땅, 기타 다른 것들을 가지고, 맹세를 하였습니다.

그런식으로 맹세를 남발하면서, 그들은 그 맹세의 내용에는, 별 책임을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았으니까, 괜찮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묘한 말로,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지 말고, 분명한 자세를, 취하라는 것입니다.

아닌 것은, 분명히 아니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아닌 삶들이, 있습니다. 분명히, 노해야 할, 문제들이 있습니다.

분명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맞는 것은, 분명히 맞다고 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마땅히 취해야 할, 삶의 모습이 있다면, 어떤 손해가 오더라도 그것을, 취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그들의 미지근한 신앙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런 식의 신앙은, 주님께서, 토하여 내칠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자, 임박한 재림 앞에서, 살아가는 성도는, 결코,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지 않습니다.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에게 있어서, 어정쩡한 태도는 없습니다. 확실한 태도를, 취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성도는, 예나 지금이나, 임박한 주님의 재림 앞에서, 살아갑니다.

주님의 강림이, 가까이 와 있습니다. 조금만 더,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굳게 하시고, 원망하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분명한 태도를, 취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 앞에서, 우리의 삶 가운데, 합당치 않은 것들은 무엇입니까?

결단하고, 버리시기, 바랍니다. 마땅히 취해야 할 삶은, 무엇입니까? 과감하게, 취하시기 바랍니다.

혹 그 일로, 내게 어떤 손해가 오더라도, 고난과 시련이 온다 할지라도,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강림이, 가까이 와 있습니다. 이 임박한 주님의 재림 앞에서,

인내하며, 마음을 굳게하며, 원망하지 아니하고, 살아가는, 주님의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