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은 삼 년이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이미 이 년 이상이나 지났습니다.
그 동안 예수님은 많은 가르침을 베푸셨습니다. 또한 많은 기적도 행하셨습니다.
이를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이시며, 자신의 사역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영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육적으로 생각하려고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의 육신적인 문제도 다 해결해주시기를 바랐습니다.
요한6장15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고 난 뒤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경제적인 문제며 정치적인 문제등 세상적인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나은 편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악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악의적으로 대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의 체제에 매우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을 몹시도 배척했습니다.
마태11장19절말씀입니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마태 12장24절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이와 같이 이들은 사사건건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할 수만 있다면, 예수님을 제거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를 꾀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태를 지켜보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참으로 마음이 무거웠을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시고 갈릴리의 가장
북쪽에 있는 빌립보 가이사랴로 가셨습니다.
이 곳은 국경 지대로서, 이방인들이 많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그들을 압박하는 유대인들을 이 곳에서 잠시 피할 수 있었습니다.
빌립보 가이사랴는 헤르몬 산의 기슭에 위치한 동네였습니다.
바로 이 곳에서 요단 강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이 곳은 경치가 좋기로 정평이 나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잠시 쉼을 얻기 위해서 이곳으로 왔던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복음 9장에 기록된 말씀과 같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이 곳에서 더 많은 기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며 제자들에게 더 많은 가르침을 집중적으로 베푸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이와 같은 배경에서 주어졌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18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교회를 세우리니.” 물론 이 말씀의 주어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친히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 제자들에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거짓말을 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전능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 이 땅에 자신의 교회를
세우실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큰 희망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 말씀대로 이곳에 교회를 세우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여기에 교회를 세웠다.” 행여 우리가 이와 같은 생각을 가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건물을 지었을 수는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물질을 바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쓰임을 받았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용하셔서, 예수님이 친히 자신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로지 예수님에게 모든 영광을 돌려야 마땅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가 보여주어야 할 참 모습이 무엇인가를
세 가지로 말씀해주셨습니다.
첫째로, 교회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어야 합니다(13~16절).
13-14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여기의 “인자(人子),” 곧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물론 다니엘 7장13절에서는, “인자”라는 칭호는 그리스도 곧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를 칭하실 때, “인자”라는 칭호를 즐겨 사용하셨습니다.
이는 “인자”라는 칭호가 예수님의 신성과 예수님의 인성을 동시에 잘 나타내기 때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인자”라는 칭호를 통해서,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어떤 정보를 얻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물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가졌던 잘못된 견해와 제자들의 올바른 신앙을
대조하시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했습니다.
제자들에 의하면,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세례 요한이라고 본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죽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다시 살아났다고 보는 견해였습니다.
마태 14장 1-2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
도다 하더라"
이와 같이 예수님을 세례 요한으로 보는 견해를 가진 사람의 대표가 바로 분봉 왕 헤롯이었습니다.
물론 분봉 왕 헤롯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더러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더러는”하면서, 복수형을 사용했습니다.
계속해서 제자들은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엘리야라 보기도 하며, 또는 예레미야라
보기도 하고, 또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보기도 한다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선지자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에게 다시 살아났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여기에 제시된 견해들은 예수님을 얕잡아보거나, 빈정대기 위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마태 11장11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와같이 여자가 낳은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세례 요한은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엘리야 또한 혼자서 수많은 바알의 선지자들과 대항해서 승리했던 선지자였습니다.
아울러 예레미야도 예루살렘의 멸망을 바라보면서, 슬퍼했던 눈물의 선지자였습니다.
또한 신명기 34장10절 의하면, 율법의 전수자 모세도 역시 선지자라고 불렸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라고 보았든, 엘리야나 예레미야나 모세와 같은 또 다른
선지자로 보았든, 이는 분명히 예수님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했던 견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견해들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이들은 모두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의 견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불러서, 예수님의 교회를 세우시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물으셨습니다.
마태16장15-16절 말씀입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때 시몬 베드로의 대답은 모든 제자들의 믿음을 대변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베드로와 똑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자들을 불러서 예수님은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같이 교회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지 아니한 사람은 교회의 일원이 아닙니다.
그러면 여기서 그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을 대변했던 시몬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대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이를 위해서 오늘 본문의 배경을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빌립보 가이사랴의 본래 지명은 바네아스(Paneas)였습니다.
이는 헬라의 신 “판”(Pan)에게 바쳐진 동네라는 뜻이었습니다.
헬라의 신 “판”은 목양(牧羊)의 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곳에는 목양의 신을 상징하는 우상들이
많이 서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 곳에는 분봉 왕 헤롯 빌립이 세운 가이사의 신전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그 곳의 이름도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빌립보 가이사랴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빌립보 가이사랴에는 이런저런 우상들이 난무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우상의 땅에서, 베드로를 위시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우상들은 죽었고 헛될 뿐입니다.
이와는 달리 예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살전1장9절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바울은 여기서 우상과 하나님을 서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우상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우상들과 예수님을 대조하면서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했던 것입니다.
이사야서 44장을 읽어보면 그 곳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사람들이 우상을 어떻게 만드는지에
대해서 익살스럽게 묘사하면서 우상들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여실히 드러내었습니다.
이사야 44장15-17절 말씀입니다.
"이 나무는 사람이 땔감을 삼는 것이거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덥게도 하고 불을 피워
떡을 굽기도 하고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리기도 하는구나
그 중의 절반은 불에 사르고 그 절반으로는 고기를 구워 먹고 배불리며 또 몸을 덥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
불을 때는 나무로 신(神)을 만든 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그러니 이와 같은 우상에게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상은 헛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우상과는 달리, 예수님은 참되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리켜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본질상 살아 계신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둘 사이의 본질이 서로 같을 때, 아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마가 3장17절에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에게 “보아너게”라는 이름을 더하셨습니다.
이는 “우레의 아들들”이란 뜻입니다. 물론 이는 그들의 부모님이 우레라는 뜻이 아닙니다.
야고보와 요한, 바로 그들이 우레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의 뜻은 바로 예수님이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동등이시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요한 5장18절에서도,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육신을
입으셨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가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바로 이와 같은 신앙을 고백하면서, 예수님에게 예배하는 자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교회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이 확실해야 합니다.
딤전3장15-16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크도다 경건의
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1)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2)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3)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4)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5)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6)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교회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이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경건의 비밀이신 예수님에 대한 교회의 신앙을 여섯 가지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셨습니다.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둘째,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십니다.
셋째, 천사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과 승천 때 천사들이 나타났습니다.
넷째, 만국에서 전파되셨습니다.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되었습니다.
다섯째, 세상에서 믿은 바 되셨습니다.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들은 다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여섯째, 영광 가운데 올려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베소 사람들은 “크도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라고 외쳤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크도다 가이사여.” 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외쳐야 합니까?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크도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여.”
이것이 바로 우리의 외침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데 있습니다. 목사를 높이지 마십시오. 장로를 높이지 마십시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만 높여야만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모이는 것도 은혜로운 설교를 듣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찬양대의 좋은 찬양을 듣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힘든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교회의 본질이 될 수는 없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예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본질대로, 예수님에게 예배하며 예수님만을 영화롭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교회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야 합니다(17~18절).
17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을 대변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자신들의 신앙을 이와 같이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 줄 바르게 알았고, 예수님의 사역도 분명하게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베드로에게 이와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사실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믿고 고백하는 자체가 참으로
복된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함께 들었습니다. 그들도 똑같이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들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나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로만 보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위시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또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바르게 보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는 지체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계속해서 예수님은 복된 이유를 이와 같이 밝히셨습니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여기서 “이를”하는 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또한 여기서의 “혈육”은 그뒤에 나오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곧 하나님과 대조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혈육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것들, 곧 인간적인 모든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컨대 인간의 지식, 지혜, 노력, 경험 등등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말입니다.
고전1장21절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사람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혈육으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이심을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부각시키시기 위해서, 베드로를 “바요나 시몬”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베드로의 본시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이 베드로라는 이름을 더하신 것입니다.
바요나는 아람어로 “요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시몬의 아버지의 이름이 아람어로는 요나였고, 또한 요한1장42절에서 밝히고 있듯이
히브리식으로는 요한이었습니다. 즉 베드로의 본래 이름은 시몬이었고, 성은 바요나였습니다.
베드로는 바요나 시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기에 베드로가 자신의 신분이나 지식, 또는 자신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알았던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어떻게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알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 사실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까?
오늘 본문에 “알게 하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본래의 뜻은 “계시하다”(reveal)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어디에 계시
하셨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계시하셨습니다.
요한 5장39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누가 24장 27절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가 혈육으로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이 사실을 알게 해주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사실을 계시한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따라서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성경에 절대적 권위를 두어야 합니다.
18절에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베드로라는 이름의 뜻은 반석입니다.
혈육으로 보면 베드로는 보잘것없는 하나의 돌멩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곧 성경을 따라, 예수님을 그리스도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고백했을 때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보잘것없는 돌멩이가 변해서 예수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반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세워진 예수님의 교회는 음부의 권세조차도 이기지 못할 정도로 든든한 반석이
되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변화요, 엄청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음부”란 사람이 죽어서 가는곳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하면 무덤과 같은 개념입니다.
그리고 “권세”라고 번역된 단어의 본래 뜻은 “대문”입니다.
안으로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음부의 권세”는 한 마디로 죽음을 가리킵니다.
음부의 권세는 예수님의 교회를 이기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교회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교회는 영원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예수님의 교회는 영원무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의 본질은 무엇이며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의 참 모습은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둘째,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절대적인 권위를 두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인 성경대로 그의 신앙을 고백했을 때, 그는 예수님에게서 복이
있다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인 성경을 따르지 않았을 때는 어떠했습니까?
마태 16장23절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성경에 예언된 대로,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지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습니다. 말하자면 베드로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는 혈육을 따라 사람의 일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베드로는 예수님에게서 호되게 책망을 받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말하자면 이 때 베드로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사탄이 원하는 혈육의 길을
따르려고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적인 방법에 의지하며 혈육을 따르지 맙시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시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본질이요, 교회의 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성경의 권위에 절대적
으로 복종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의 참 모습을 나타냄으로써, 예수님의 칭찬과 은혜를 풍성히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교회는 순수하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19~20절).
19절 말씀입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열쇠는 문을 열고 닫는 일에 사용됩니다. 본문의 용어로 말하면, 풀고 매는 일에 사용됩니다.
베드로는 천국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그가 땅에서 매고 푸는 대로, 하늘에서도 매고 풀릴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권세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권세는 베드로에게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모든 제자들을 대표하는 입장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이와 똑같은 권세는 다른 제자들에게도, 그리고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 전체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졌습니다.
요한 20장23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 18장 17절 말씀입니다.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마태18장18절 말씀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와 같이 천국의 열쇠는 우리에게도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와 같은 뜻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을때,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했다면 우리는 그에게 이와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죄는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제 당신은 천국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와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전한 복음을 듣고도, 그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고의적으로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를 향하여 이와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죄는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당신은 아직도 천국의 백성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지 않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와 같은 사실이 성경에 분명히 계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이 우리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우리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그것을 뽐내라고
주신 것은 아닙니다. 만민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로 교회의 본질이며, 또한 교회의 사명입니다.
20절 말씀입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이는 참으로 의외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여기에 어떤 말씀이 와야 할 것 같습니까?
“이에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모든 사람에게 널리 전하라 하시니라.”
이와 같이 되어야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경고하셨습니다. 아주 강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경고의 내용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여기에 덧붙인다면 예수님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사실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사람들을 피해서 빌립보 가이사랴로 오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의 배고픔을 해결해주시고, 로마의 억압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나아가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란
사실을 세상에 널리 전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와서,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으려고 할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다시 한번 이 사실을 밝히셨던 것입니다.
로마서14장17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어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구원의 희락을 누리는
영적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은 복음을 전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영적인 일에 힘써야 합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교회의 참 모습은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둘째,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입니다. 셋째, 순수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교회의 본질대로, 그동안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어왔습니다.
또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왔습니다. 아울러 우리는 순수하게 복음만을 전해왔습니다.
이와 같이 그 동안 교회의 참 모습을 지켜오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합시다.
또한 앞으로도 변함없이 교회의 참 모습을 계속해서 지켜나가기를 원합니다.
그리해서 성삼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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