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10:13)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Everyday, people who encounter miracles,,,

** 생수의 강

염려하지 말라(누가 12장 22-26절 )

Andy1954 2024. 1. 30. 13:14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이와 거의 비슷한 내용의 말씀이,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일부인 마태복음 6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두 말씀은 각기 서로 다른 장소에서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갈릴리에 있는 어떤 산에서 주어

졌습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사역 후기에,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유대의 어느 지방에서

주어졌습니다. 

 

아무튼 오늘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셨습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2장 1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열렬하게 예수님을 환영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의 선동에 따라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주의하라, 사람들의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라, 담대하라 등등, 몇 가지 당부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13절을 보면 하나의 돌발적인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불쑥 앞으로 나섰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당돌하게도 자기와 자기 형 사이에 발생한, 유산 문제를 좀 해결해달라고 예수님

에게 요청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 사람의 마음에 가득한 탐심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리를 향하여, 우리가 잘 아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습니다. 농사가 잘 되어 소출이 풍성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와 같은 계획을 세웠습니다. 

자기의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지어서, 그 곳에 모든 것을 쌓아 두고 여러 해를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며, 즐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날 밤에, 그의 영혼을 도로 찾으신다면, 

그의 이러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 버리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비유를, 무리에게 말씀하시면서 21절에서 이 비유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내리셨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부자는 자기를 위하여 땅에 재물을 쌓아 두고자 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자기에 대하여 부요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도로 찾으시면, 그는 자기에 대해서도 부요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는 어리석게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자기에게 부요한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위하여 땅에 재물을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재물을 쌓아 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아니 좀 여유가 있을 때,

앞날을 준비하는 것이 왜 어리석은가? 

아무런 준비가 없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오히려 그것이 더 어리석지 않은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

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생각을 하는 우리들에게 오늘 본문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는 하나님이 친히 돌보시기때문에 자신의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더라도 자신의 앞날에 대해서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염려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삶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염려합니다.

쉬지 않고 염려합니다. 그들은 범사에 염려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자녀인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의 삶을 책임지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기뻐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아 갈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염려하지 맙시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항상 기뻐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깨달아야 합니다(22~23절).

하나님은 온 세상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몸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과 몸을 주셨습니까? 

구약 성경을 보면 때때로 이스라엘 땅에는 가뭄이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되면 농사 짓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결과 먹고살기가 어려워집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어려운 경제 여건 때문에, 의복을 사서 입기도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딤전 6장 8절 말씀과 같이,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것이니라

문자 그대로, 그 당시에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족한 줄로 여길 수 있는,

때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늘 염려하면서 살았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의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와같은 제자들을 향하여 먹고 입는 문제로, 염려하지 말라고 누가 12장 2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살아가는 이유가, 먹고 입는 데 있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이 살아 숨쉬며, 그들의 몸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만일 먹기 위해서 존재한다면, 그것은 짐승들의 삶과 별반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만일 몸이 옷을 입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매장에 서있는 마네킹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그저 음식이나 먹으라고 목숨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저 의복이나 입으라고 몸을 주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빛과 소금의 역활을 담당

하여 세상을 변화시킴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를 증인으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를 바라신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는 해야 할 사명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사명들을 감당하라고, 우리에게는 목숨이 주어졌고 몸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은 먹고 입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입는 것과 같은 육신의 일에 삶의 우선 순위를 두지 맙시다. 

그러다 보면 우리들도 어리석은 부자처럼 곳간을 헐고, 새로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곳간을 크게 짓는다고, 우리의 미래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염려가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학개서 1장 6절 말씀을 보면,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학개 선지자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경제적으로 몹시 궁핍했습니다. 

그들은 많이 뿌렸지만 수확하는 것이 적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먹어도 배부르지 못했습니다.

입어도 따뜻하지를 못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학개서 1장 8절을 보시겠습니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여기에 그 해답이 나옵니다. 그들이 삶의 올바른 목적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자기들의 육신을 돌보는 데 바빠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영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어서, 학개서 1장 9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

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삶의 목적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할 때 그들은 궁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벌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시편 23편 1-3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앞세우고 살아가면, 우리의 삶에는 부족함이 없게 됩니다.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셔서, 우리의 걸음을 선한 길로 또한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삽시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목숨을 주셨고 몸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부요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도 다욋처럼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으며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늘 체험하며 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래서 부족함이 없고 도리어 우리의 잔이 넘치는 삶을 누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깨달아야 합니다(24절).

누가 12장 24절 말씀을 보면,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이스라엘에는 특별할 정도로 새들이 많은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을 벗어나면 그 서쪽은 바다입니다. 그 동쪽으로는 사막입니다. 

그 남쪽으로도 광야와 사막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니, 지형적으로 이스라엘에는 새들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겨울철이 되면 많은 철새들이 떼를 지어서 북쪽에서 날아옵니다. 

더이상 동쪽이나 서쪽 또는 남쪽으로 갈수 없기 때문에 모든 새들이 이스라엘에 모여 삽니다. 

 

구약 에스겔서 39장과 신약 요한계시록 19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말세에 이스라엘의 아마겟돈에서 큰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때 수많은 사람들의 시체가 생길

것입니다. 그러면 새들이 와서 그 시체들의 살을 먹을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19장 17-18절을 보겠습니다. "또 내가 보니 한천사가 태양 안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와서 하나님의 큰잔치에 모여 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장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것을 탄 자들의 살과 자유인들이나 종들이나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 하더라" 그만큼 이스라엘에는 새들이 많다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처럼 흔한 새들을 예로 들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신다는 사실을

설명하셨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까마귀를 예로 드셨습니다. 

까마귀는 어떤 새입니까? 레위기 11장 13절을 보면 새 중에 너희가 가증히 여길것은 이것이라,

이것들이 가증한즉 먹지 말지니....까마귀는 부정한 새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까마귀를 가증히 여기면서 먹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와같은 까마귀조차도, 하나님이 먹이시며 기르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욥기 38장 41절을 보면,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

시편 147편 9절에도,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

하나님은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십니다. 어떻게 주십니까? 

까마귀를 비롯한 모든 새들에게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새들은 본능적으로 둥치를 만들고

알을 깝니다. 또한 새들은 본능적으로 새끼에게 먹이를 갖다 먹입니다.

그러면 까마귀를 비롯한 모든 새들에게 본능을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본능을 통해서 까마귀를 먹이시며, 또한 까마귀 새끼에게도 어미의 본능을

통해서 먹을 것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새들은 농사를 짓는 법이 없습니다. 

새들은 심지도 않고, 거두어들이지도 않습니다. 골방이나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들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새들은 하나님이 주신 본능에 따라서, 먹을 것을 부지런히 찾아다닙니다. 

새들은 먹이를 찾을 때까지, 계속해서 날아다닙니다. 이와 같이 새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에만

의존할 뿐입니다. 그래서 새들은 둥지를 헐고 더 크게 짓는 법이 없습니다. 

잡은 벌레들도 더 많이 더 많이 쌓아 두지도 않습니다. 

여러 해 먹을 벌레들을 많이 쌓아 두고서, 그저 평안히 쉬고 먹고 즐거워하자는 법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새들은 아무 염려없이 잘만 지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길러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새들이 자라는데 필요한 풀을 키워주시고, 새들의 먹이가 되는 벌레들을 길러주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새들을 길러주십니다. 

 

그런데 사람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농사를 지을 줄을 압니다. 사람은 심기도 하고 거두기도 하고 곳간에 모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무엇을 먹을까, 염려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오늘 본문 24절 끝 부분에서 예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새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지를 못했습니다. 

그 어떠한 새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를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와 같이 하찮은 새들도, 더구나 부정한 새인 까마귀들조차도 잊지

아니하시고 기르십니다. 하물며 우리는 새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왜,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지 아니 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어떤 염려가 생길 때, 한번 공중의 새들을 생각하십시오. 

공중의 새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그의 자녀인 우리도 돌보신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저절로 모든 염려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신다고 해서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새들은 본능을 따라서, 부지런히 먹을 것을 찾아다닙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다고, 창세기 3장 17-19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새들에게는, 그 본능을 통해서, 먹을 것을 주십니다. 

또한 사람에게는 얼굴에 땀을 흘리는 것으로 먹을 것을 먹게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일하기 싫어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단지 염려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베드로를 생각해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염려가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물위를 걸어가면서도 물에 빠지지는 않을까

염려했습니다. 그러다가 염려했던 대로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을 염려하며 제발 그러시지 말라고,

예수님을 붙들고 강하게 항변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사로잡히실 때 검을 빼어 무리에게 대항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베드로가 저지른 문제를 해결해주시지 않으셨다면 아마도 그는 살인미수죄로

감옥에 갇혔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베드로는 염려가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예수님의 말씀대로, 모든 염려에서 벗어났습니다. 

베드로는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그에게 맡기신 사명에 충성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벧전 5장 7절에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깨닫는데, 비록 오래 걸리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 베드로는 마침내 모든 염려에서 벗어났습니다. 

베드로가 모든 염려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하나님의 돌보심을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십니다. 우리의 염려를 다 하나님께 맡깁시다. 

그리고 항상 기뻐하며 쉬지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에 충성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깨달아야 합니다(25~26절).

누가 12장 25절말씀에,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우선 이 말씀의 뜻을, 좀더 정확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 “한 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본래의 뜻은 “한 규빗”인데 한 규빗은 사람의 팔꿈치에서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를 가리킵니다. 

요즘말로 환산하면 대략 45cm 정도가 되는 길이를 의미합니다.

키가 150cm 되는 사람이라도 한 규빗을 더하면, 그 키가 무려 195cm나 됩니다. 

그러니 그 정도로 자기 키가 커지기를 바라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누가 12장 26절에서,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예수님은 사람이 그 키를 한 자나 더하는 것을 작은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가장 작은 일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키에 한 규빗을 더하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는 엄청나게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예수님의 의도를 잘 살려서 번역하지 못한것 같습니다. 

여기에 또한 “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의 신장을 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단어가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의 나이나 수명을 뜻할 때도 있습니다.

요한 9장 21절을 보면,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여기 “장성”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오늘 본문의 “키”와 같은 단어입니다. 

사람이 장성했다고 해서, 그의 키가 반드시 큰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장성은 사람의 키가 아니라, 사람의 나이를 뜻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 “키”라고 번역된 단어도, 사람의 신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의 나이 곧 사람의 수명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이와같은 뜻입니다. 

사람이 염려해보았자, 자기의 수명을 한 자도 더하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시편 39편 5절을 보면,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다윗은 자기의 날이 한 뼘 길이만큼 될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자기의 수명이 짧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오늘 본문에서 상징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염려함으로 그의 수명을 조금이라도 더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목숨을 주시고 몸을 주신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서 목숨을 거두어 가시고, 우리에게서 몸을 거두어 가시는 이도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날 것인가? 우리가 결정할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결정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얼마나 살 것인가? 이것도 우리가 결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인간의 생과 사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입니다. 

음식을 가려서 먹습니다. 다이어트를 합니다. 열심히 운동을 합니다. 

비타민을 비롯해서, 많은 약들을 복용합니다. 병원에 가서 정기 검진도 받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것들이 나쁘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건강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삶의 질을 높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인간적인 방법과 노력으로, 더 오래 살아보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생과 사는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람이 염려한다고 해서 그의 생명을 일각이라도 더할 수는 없습니다.

 

누가 12장 26절 말씀에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여기서 “가장 작은 일”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자기의 생명을 한 자만큼, 다시 말해서 그저 조금 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함으로 그의 생명을 일각도 더할 수는 없습니다. 

염려는 오히려 우리의 건강만 해칠 뿐입니다. 그러기에 염려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다른 일들”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하는 일들입니다. 

이와 같은 염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의 생사 화복도 하나님이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맙시다. 

먹고 입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합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삽시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실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날 동안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더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화복은, 오로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명심합시다. 

하나님에게 모든 주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늘 명심하면서 항상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삶을 살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부요하게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모든 염려를 떨쳐버립시다. 

그리고 다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힘써 구하면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삽시다. 

그리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우리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부요케 하시면서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풍성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