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10:13)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Everyday, people who encounter miracles,,,

**네가 믿으면

그가 찔림은 (이사야 53장 4-6절)

Andy1954 2024. 3. 11. 10:47

이사야 53장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담고 있으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실제적인 예언의 말씀은 52장 13절부터 시작한다 고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52장 13절 말씀을 보면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받으실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광을 받으실 것을, 

전제로 말씀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리스도의 고난은 영광을 위한 고난이라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고난뿐 아니라 고난 이후, 

그리스도께서 받으실 영광까지 내다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선지자 이사야는, 주전 700년경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보다,

700년이나 앞서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너무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사야는 모든 동사를 과거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미래적으로 내다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과거적으로 되돌아 본것입니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11장 25∼26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구원받은 이방인의 수가 다 차면 그때는 온 이스라엘도 구원받게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마지막 때에, 구원받을 이스라엘 백성은 과거에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님을

되돌아 보게 될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들의 잘못과 죄를 통회하는 심정으로 믿음의 고백을 할

것입니다. 이사야는 바로 이 내용을 본문에 기록한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그”라는 대명사와 “우리”라는 대명사가 매절마다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는 고난 받으신 메시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 때, 구원받을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이사야는 선지자였습니다. 민수기 24장을 보면, 선지자는 하나님의 비밀과 지식을 알뿐 아니라, 

예언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미리 보았습니다. 

또한 마지막 때에 구원받을 이스라엘 백성이 말할 믿음의 고백도 미리 들었습니다. 

참으로 경이롭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일을 하시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그들에게 참된 회개와 믿음의 고백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들에게 참된 회개와 믿음의 고백이 있기 때문에 주님앞에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통회하며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심정으로 주님께 나아올 때, 십자가의

은혜가 넘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이스라엘은 그릇된 생각을 회개했습니다.

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이미 말씀드린 대로 본문에서 “그”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실로.” “진실로”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지신 질고는 외적이고 신체적인 고난을 뜻합니다. 

반면에 이때의 슬픔은 내적이고 정신적인 고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으로서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고발하였지만, 

빌라도나 헤롯까지도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온갖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습니다. 그 이유가 오늘 본문에 설명되고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이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잘못 생각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 그들의 생각은 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올바른 사실을 깨닫고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질고를 지셨고 자신의 슬픔을 당하셨다고 고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죄의 질병을 지고 있음에도 죄인 줄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볼 때, 자신은 괜찮은 사람인양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으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은 예수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져야 할 질고를 대신해서 지셨으며, 우리가 당해야 할 우리의 슬픔을 대신하여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마지막 때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입으로, 이 사실을 확실하게 고백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그들이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들은 예수님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으로만 생각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는 신성 모독죄를 범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의 왕이 되는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과 바라바 중 한 사람을 택하라고 했을때, 바라바를 택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유대인들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신성 모독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벌로 십자가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 것도, 전적으로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 하나님은 새 영을 그들 속에 두시며 새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이 잘못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들의 그릇된 생각을 깊이 회개할 것입니다.

이렇듯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고 예수님에 대한 그릇된 생각도 고쳐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심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나의 질고를 지시고 나의 슬픔을 당하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를 영영 죽을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며 늘 예수님을 찬양하시기를 원합니다.

 

둘째로, 이스라엘은 그릇된 행동을 회개했습니다.

이어서 5절 말씀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을 네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찔리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상하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넷째, 예수님은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네 가지 고난을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찔리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시관으로 머리를 찔리셨습니다. 

또한 못으로 양손과 양발을 찢기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죽으시고 난 후에도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도합 여섯 곳이 찔리신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상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먹으로 치기도 하고 손바닥으로 때리기도 했습니다.

군병들은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의 머리를 내려 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이사야 52장 14절 말씀과 같이 예수님의 모양과 모습은 보는 사람들이 놀랄 만큼 

상하셨습니다. 이때의 모양은 얼굴을 가리키며 모습은 몸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얼굴과 예수님의 몸은 너무도 끔찍하게 상하신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이 뜻은 예수님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져서 벌이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여러 차례의 형식적인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안나스나 가야바 앞에서, 그리고 헤롯 왕 앞에서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신성모독죄로 사형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끌고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갔습니다. 

빌라도는 군중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습니다. 

 

넷째, 예수님은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채찍은 손잡이로 사용할 나무토막과 여러 가닥의 가죽 끈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가죽 끈의 끝에는 날카로운 유리나 돌 뼈 또는 금속을 박았습니다. 

그래서 채찍에 맞을 때마다 살갗이 찢어지는 더 큰 고통을 느끼게 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찔리시고, 상하시고, 징계를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예수님보다 700여년 앞서 살았던 이사야 선지자가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처럼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도 예수님이 찔리시고 상하시고 징계를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셨다는 사실을 다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예수님 자신의 죄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하셨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 이스라엘 백성은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그의 허물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그의 죄악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찔리시고 상하셨습니까? 바로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입니다. 

우리의 그릇된 행동 때문에 예수님이 찔리시고 상하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소극적인 이유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보다 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왜 예수님이 징계를 받으셨습니까?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 곧 샬롬을 누리도록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셨습니까?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적인 나음, 곧 모든 죄의 사함을 주시려고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적극적인 목적은, 우리의 평화와 나음을 위해서였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을 찌르며, 상하게 하며, 징계하고, 채찍질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신성 모독의 죄를 범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행동은 정당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 그들은 자신들의 그릇된 행동을 애통하며 회개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며 이와 같이 고백할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시간 우리의 죄와 허물을 회개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때문에 예수님이 찔리셨고

상하셨음을 고백하고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애통하며 회개할때 예수 그리스도의 위로가 우리의 

심령에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감사하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감사할 때,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이스라엘은 그릇된 본성을 회개했습니다.

계속해서 6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보통 양이라고 할때에는 좋은 뜻으로 사용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말하는 양의 의미는 좋은 뜻이 아닙니다.

양에게는 양의 본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양은 그 본성에 따라서 양처럼 살며 또한 양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양의 본성을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릇 행하여”입니다. 양은 바로 눈앞에 있는 풀만 봅니다. 

저 너머에 낭떠러지가 있는지 사나운 맹수가 있는지 개의치 않습니다. 

양은 즉흥적이고 충동적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그릇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각기 제길로 갔거늘”입니다. 소들은 떼를 이루어 집단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양은 충동에 따라 각기 제멋대로 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목자가 양을 보살피지 않으면 양은 각기 제 길로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양은 본성을 따라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양과 같이 그릇 행하여 제 갈길로 가는 습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습성은 부패하고 타락했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사기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다는 것은 올바른 길이 있어서 그길로 가도록 하였음에도,

인간은 그 길을 가지 않았고 가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어쩔 수없이 양과 같이 그릇 행하여 각각 제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로마서 7장 18절 말씀과 같이 우리 속에는 선한 것이 아예 거하지 않습니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부패하고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거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의 의를 내세우며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여겼으나, 

마지막 때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그릇된 본성을 깊이 자각하고 회개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힘써 세우려고 했을 뿐이었습니다. 

 

마지막 때 그들은 회개하면서 다시 한번 놀라운 고백을 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곧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그릇된 생각과 우리의 그릇된 행동과 우리의 그릇된

본성까지도 다 담당하셨습니다.

 

레위기 16장을 보면 대속죄일의 규례가 나옵니다. 두 마리의 염소 중 한 마리는 죽여서, 하나님께

제물로 바칩니다. 다른 한 마리는 대제사장이 그 머리에 안수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그 염소의 머리에 둔다는 뜻입니다.

그염소는 살아있는 채로 광야로 보내집니다. 물론 그염소는 두번 다시 진영에 돌아오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가 멀리 옮겨져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여겼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멀리 옮기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모든 죄를 사함 받고 영적인 나음을 받아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우리의 죄악을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셨습니까?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바로 하나님 이십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분은 바로 하나님

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까닭을  고후 5장 21절 말씀에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가 전혀 없으신 예수님을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그 까닭은 죄인들인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후 6장 2절 말씀과 같이,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을 통해서, 더 깊은 은혜의 자리로 들어가야 합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처럼 변명하지도 말고 남을 탓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그릇된 생각과 행동 그리고 그릇된 본성을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짧은 구절의 말씀이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예수님 자신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죄악때문에 찔리시고, 상하시고, 징계를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와 기쁨을 베푸시고 슬픈 마음에 위로를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영광을 받게 될것이기 때문에, 그 영광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고난주간에 다시 한번, 우리 주님이 감당하신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주님께

감사함으로 이같은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풍성히 받고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