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까지 살펴본 1장을 요약해 보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는데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목적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고 우리가 은혜로 그 복음을 듣게 된 것입니다.
또한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성령께서 내 안에 도장을 찍으시고 내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
하시고 계시다는 것이 핵심 내용입니다,
오늘부터는 2장 말씀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알고 있습니다. 이 집에는 두아들이 있었습니다.
작은 아들은 세상에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돈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방법대로 살고 싶은 이 아들은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세상에 나가 세상의 방법대로 살았습니다.
그 집에 또 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아들은 세상의 방법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아버지 집에서 충실하게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나가 세상의 방법대로 살던 동생은 모든것을 잃은채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 온 아들을 위하여 아버지는 잔치를 베푸셨습니다. 새 신을 신기고 새 옷을 입히고
풍악을 울리며 즐거워 하셨습니다. 밭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큰 아들이 이 광경을
보고 아버지에게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나의 친구를 위하여 한번도 잔치를 베푸신 적이 없는데, 세상에 나가 허랑방탕
한 삶을 살고 온 동생에게 잔치를 베푸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라고 큰 아들은 따졌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비유를 성경적인 인간론을 구원의 관점에서 조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동생은 이방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잘 섬긴다고 말하는 형은 유대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동생도 죄인이요 비록 아버지
집에서 아무 말없이 순종하며 사는 것 같았던 형도 결국은 아버지에게 분노하고 있는 죄인이라
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함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먼저 1절 말씀을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장 1절에서는 '너희'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런데 3절 말씀에서는 '우리'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절의 너희는 누구입니까? 에베소 교인들입니다. 즉 이방인들 입니다.
반면에 3절의 우리는 누구입니까? 유대인 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에서 살던 작은 아들이 바로 너희이고 아버지 집에서
아버지 말씀 잘 듣고 살았던 것처럼 보이는 큰 아들이 바로 우리라는 범주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
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너희이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우리가 우리 라는 범주 안에 들어오는데 이들 모두가 다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거나 믿지않는 사람이거나 다 죄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방인과 유대인의 죄를 짓는 모습은 어떻게 다릅니까?
이방인은 이세상 풍속을 따라 드러내고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마음으로 죄를 짓습니다.
마음으로 지은 죄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세리는 드러난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드러난 죄 때문에 통곡하고 회개하는 것을 보고 자기는 그렇게 살지 않았음을
의롭게 여기고 세리를 마음 속으로 정죄하고 있는 죄를 짓고 범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있는 우리도 모두 드러나지 않은 죄인일 뿐입니다. 드러난 죄인들은 모두 교도소에 가있습니다.
우리가 교도소에 가지 않는 것은 우리 죄가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어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성경에는 이같은 표현이 간혹 나옵니다.
이 말씀은 영적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허물과 죄는 우리 인생을 파멸로 이끕니다.
모든 인생은 허물과 죄로 그의 영적 생명이 죽어 있는 것입니다. 죽었다는 말은 생명과 관계가
끊겼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생명과 단절을 말합니다. 생명과 단절했다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끊겼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사람이 곧 살았으나 죽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죽음입니다, 그러면 왜 죽은 것입니까?
첫째로, 이 세상 풍속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이세상 풍속을 따랐다는 것은 이세상의 가치관을 추구하며 이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며 산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가치관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은 진실을 싫어합니다.
불법이 자연스러운 세상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세상은 항상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그러면 죽은 자란 누구며 왜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까?
요한 5장 25절 말씀을 보면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은자란 영적으로 죽은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앞서 탕자의 비유에서 돌아온 아들에 대하여 그아버지가 이처럼 말했습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아들이 세상으로 나가 죄 가운데 지낼 때를 죽은 것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죽은자입니까?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난자는 그생명이 죽은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게 합니까? 그것은 '허물과 죄'입니다.
죄는 불순종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죄는 그자체가 하나님과의 교통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 죄를 짖고 죽음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죄를 짓고도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세상에 아담의 후손인 죄인으로 태어나고서도 죽음을
면할 수 있는 사람도 한명도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자를 따른다는 말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악한 영의 통치를 받는것을
말합니다. 이 악한 영은 어떤 존재입니까? 2절 말씀을 다시 보면 역사하는 영이라고 말합니다.
다시말하면 이 악한 영은 힘과 능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마귀는, 우리에겐 보이지 않지만 힘이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보이지도 않는 마귀가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까?
마귀는 손도 없습니다. 마귀는 발도 없습니다.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역사 합니다. 어떻게요?
공중권세를 잡고 역사하는 것입니다. 공중권세를 잡았다는 것은 사탄이 우리를 영적으로 장악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우리 안에서 어두운 영은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어두움이 역사하고 분노가 역사하고 의심이 역사하고 절망이 역사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죄악된 삶의 모습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죄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비교적 양심적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지옥에 가거나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만큼
악한 존재라고 여기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천적으로 죄의 종인 아담에게서 태어나
종의 자식으로 죄에 속한 자들로 태어난 것입니다.
천진난만한 아이가 자라면서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게 아니라 누구든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의 신분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니 많은 어려움 때문에 악해지는 존재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51편 5절에서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요,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라고 고백 했습니다. 이 같은 원리를 잘 설명해 주고 있는 또 다른 말씀이 로마서 5장 12절 입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담의 후손은 이처럼 선천적으로 모두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요한 8장 34절 말씀을 보면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죄를 범하지 않고 살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죄를 범하므로 죄의 종으로
인침 받아 영원히 소망이 없는 존재들이 된 것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또, 3장 20절에서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을 육체가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죄는 영원히 벗을 길이 없는 인생의 짐이요, 빚입니다. 그러나 죄의 값은 그 무엇으로도 탕감이
안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죄값에서 자유 할 수 있습니까? 피로 갚아야 합니다.
그것도, 죄인의 피가 아닌 정결한 피로, 갚아야 합니다.
이렇게 소망 없는 인간에게 죄의 권세를 깨뜨리고 절망 상태에 있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입니다.
도저히 깨지지 않을것 같던 죄악의 세력이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깨어진 것입니다.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마귀의 힘을 완전히 누르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마귀의 손안에서 놓임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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