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태 6장 14∼15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1999년 7월 4일이었습니다. 그날은 미국의 독립기념일이었으며 또한 주일날이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인디애나 주립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밟고있던, 윤원준이라는 장래가 촉망되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평소와 같이 주일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불루밍턴에 있는 한인교회로 갔습니다.
교회 주차장에 차를세우고 교회로 들어가는 도중이었는데 그는 난데없이 날아온 총탄에 맞아서
그만 영문도 모른 채 목숨을 잃었습니다. 말 그대로 아닌 밤중에 날벼락을 맞은 것입니다.
벤자민 스미스 라는 백인우월주의자가 무차별로 난사한 총에 맞은 것입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 그의 장례식이 열렸습니다. 그 자리에는 당시 미국의 법무장관을 비롯해서
약 1500명의 조객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장례식이 거의 끝나갈 무렵 그의 사촌형이었던 박승호 목사님이 유족들을 대표해서 조객들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그의 인사말은 이러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분명하고도 큰 소리로 말하는 그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는 벤자민 스미스를 용서하겠다는 그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 가족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 가족들은 내 사촌 동생을 죽인 벤자민 스미스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합니다". 그의 인사말을 들은 조객들은 모두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를 길이
없어 눈시울을 붉히면서 흐느껴 울었습니다.
흔히들 기독교를 가리켜서 사랑의 종교라고 부릅니다. 사랑의 뿌리가 무엇입니까? 용서입니다.
용서없는 사랑은 결코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십자가의 사랑도 결국은 용서
하신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의롭다하신 사랑이었습니다.
이 시간 말씀을 듣는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아직도 나와 너와의 관계 속에서 풀지 못하고
맺혀서 마음 아파하며 괴로워하는 것이 있으면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풀어버림으로 참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주시고 난 뒤에 용서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기도에 관한 가르치심을
끝맺으셨습니다. 주기도문에는 6개의 간구가 있는데 그 가운데 다섯 번째 간구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바로 용서에 관한 간구였습니다. 6개의 간구 가운데 예수님이 다시 한 번 설명해 주신 것은
다섯 번째 간구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용서가 중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왜 기도에 관한 가르치심을 용서에 대한 말씀으로 마무리 하셨습니까?
그것은 기도 생활에 있어서 용서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를 우리가
체험적으로도 얼마든지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용서하지 못하고 미움의 쓴 뿌리를
계속해서 간직하고 있으면 마음이 결코 평안할 수 없으며 기도 생활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기도 생활을 못하는데 어떻게 기도의 응답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 생활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용서하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하며 용서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용서와 관련해서 세 가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용서의 이유입니다. 왜 용서해야 하는가? 둘째로, 용서의 방법입니다. 어떤 식으로 용서
해야 하는가? 셋째로, 용서의 비결입니다. 어떻게 하면 용서할 수 있는가?
이 세 가지를 살펴보는 가운데 하나님이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용서의 이유입니다.
왜, 용서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 14∼15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예수님은 14절에서는 긍정적 표현으로 그리고 15절에서는 부정적으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러나 원리는 간단합니다. 용서하면 용서받고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다 노출되어 있어서
이런저런 죄를짓고 살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죄사함을 받지 못하고 그 죄를 그대로 가지고서는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며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
입니다. 그러면 그 많은 죄를 어떻게 하면 용서받을 수가 있습니까?
앞서 말씀드린대로 용서하면 용서받고 용서하지 못하면 용서받지 못합니다.
옛날 어떤 나라의 왕궁에 사람들을 웃기면서 즐겁게 하는 광대가 있었습니다. 그는 늘 우스꽝
스러운 표정과 행동으로 왕과 신하들을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광대가 공을
가지고 광대놀이를 하다가 그만 실수로 왕이 아끼는 도자기를 깨고 말았습니다. 왕은 순간 너무나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왕은 자기도 모르게 그 광대를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얼마후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자 왕은 자기의 명령이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왕명을 내렸기 때문에 그 명령을 돌이키는 것은 왕의 권위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한참동안 생각한 후에 어쩔수 없이 사형에 처하기는 하지만 마지막으로 광대의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줘그의 마음을 위로해 주기로 했습니다. 광대는 왕 앞에 섰습니다.
왕은 그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내가 어릴 때부터 나를 즐겁게 해주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너의 마지막 소원 한가지를 들어주겠다. 그러니 네가 죽을 방법을 스스로 선택해서 말하도록 하라.
지금 해가 중천에 떠 있다. 해가 서산에 질때까지 죽을 방법을 내게 말하도록 하라. 알겠느냐?"
광대는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생각에 잠겼습니다.
드디어 해가 서산에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광대는 다시금 왕 앞에 섰습니다. 왕은 물었습니다.
"자, 이제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지 그 방법을 말해보아라." 그때 광대는 태연한 모습으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폐하,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제가 죽을 방법은 늙어서 죽는 방법을 택하도록
하겠습니다." 얼마나 지혜로운 대답입니까? 왕은 약속대로 그를 살려주고 용서해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 왕의 왕 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용서하면 용서받을 수 있고 용서하지 못하면 용서받지 못하리라."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용서하면서 삽니다.
따라서 우리는 용서받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복된 사람들입니까?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마음은 강퍅했습니다. 그들은 용서하려 하지 않았
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용서받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이러한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루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예수님에게 끌고 왔습니다. 그들은 그 여인을 가운데 세우고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그 여인을
정죄했습니다. 그리고는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수님의 말씀에 양심에 가책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들었던 돌을 모두 내려놓고는 슬그머니 그 자리를 다 떠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그 여인만 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예수님은 그 여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마음이 강퍅해서 용서하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도 용서받지
못하는 자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따라서
용서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얼마나 복 있는 자들입니까?
둘째로, 용서의 방법입니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 용서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방식대로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두 번 다시 기억조차도 아니하십니다. 용서는 한 마디로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일단 용서했으면 깨끗하게 잊어야 합니다.
한 번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물었습니다.
"주님, 형제가 내게 잘못을 범하면 몇 번까지 용서하리이까? 일곱 번까지 용서하리이까?"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일곱 번 뿐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할
찌니라." 예수님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70×7=490번까지만 용서하라는 뜻입니까?
490번까지만 용서하고 491번째 용서하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용서하지 않은 셈이 됩니다.
예수님은 490번이 아니라 무제한적으로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다른 사람은 나를 다 버린다 할지
라도 너만큼은 나를 버리지 않겠다고 큰 소리하지 않았느냐? 그러던 네가 나를 모른다고 세 번
이나 부인했다는 말이냐? 내가 너에게 그토록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했건만 네가 잠을 자더니
결국은 나를 이렇게 부인하고 말았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과거를 들추어내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과거를 추궁하면서 그를 질책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한 가지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의 물음에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지 주께서 아시
나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되었다. 너는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은 베드로의 과거를 기억치 않으시고 모든 잘못을 깨끗하게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되 우리의 죄를 두 번 다시 기억조차 아니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용서해야 될 방식인 것입니다.
셋째로, 용서의 비결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용서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비결은 간단합니다.
용서해야 될 사람을 밉게 보지 말고 곱게 보아주면 됩니다. 잠언 16장 4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누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까?
누가 우리에게 악을 행했습니까? 그러나 그 가운데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주시고자 하는 유익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대로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이사실을 생각하면서 비록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너무 밉게 보지말고
곱게 보아주어야 할 것입니다.
인생 길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 가지 환난의 바람이 불어닥칠 때도 있습니다.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피해를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삶에 활력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러한 것들을 우리를 위해서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셉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형들에 의해서 애굽에 종으로 팔렸습니다.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결코 형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곱게 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애굽에 종으로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들 앞서 나를 보내셨나이다."
요셉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생각하면서 형들을 기꺼이 용서해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 피해를 주었습니까? 그것 때문에 망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생각하면 그 사람 때문에 우리가 더욱더 겸손해지고 하나님을 더욱더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 더욱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고 정신을 차리게 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생각
하면서 그 사람을 밉게 보지 말고 곱게 보아주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미워할 때 그 사람이 내게 행한 잘못 때문에 미워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사람
에게는 다른 좋은 점들도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그를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고
좋아하는 친구들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그사람이 내게 행한 잘못때문에 그를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에게 있는 좋은 점들을 생각하면서 그를 곱게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얼마든지 그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해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용서와 관련해서 세 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용서의 이유입니다. 왜, 우리가 용서해야 합니까? 용서하면 용서받고 용서하지 못하면
용서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용서의 방식입니다. 어떻게 용서해야 합니까? 용서는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용서하면
두 번 다시 기억하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로, 용서의 비결입니다. 어떻게 하면 용서할 수 있습니까? 무슨 일이든지 거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깨닫고 비록 마음에 상처를 주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밉게 보지 말고 곱게볼때
용서의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도 그는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을 용서했습니다.
그리할 때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빛났습니다. 그의 마음은 천국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할 것을 용서함으로 마음에 평강을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아울러 우리의 얼굴이 스데반의 얼굴처럼 천사의 얼굴처럼 환하게 빛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
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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