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태 6장 5∼8절 말씀입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골방에 들어가 문을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때에 이방인과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
느니라"
기도에 관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래전에 어떤 집사님의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해외여행이 수월하고 흔하게 이루어집니다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해외에
나가는 일이 드물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 집사님이 다니시던 교회의 목사님 장로님 그리고 여러 교인들이 그 가족을 배웅하기
위해서 공항으로 갔습니다. 이별을 아쉬워하며 대합실에 빙둘러서서 잠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한 장로님이 대표로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장로님의 기도가 여간하지를 않았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
부터 시작해서 한참동안 인류의 타락에 대해서 기도하더니 노아의 홍수로 넘어갔습니다.
그리고는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또 솔로몬의 지혜에 이르기까지, 구약성경 이곳저곳을 두루두루
다니면서 장황하게 기도했습니다. 구약성경에 대한 기도를 다마치고 난 뒤에는 신약성경으로 넘어
갔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에서 시작해서 예수님의 생애, 십자가, 부활, 승천을 거쳐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소망으로 드디어 기도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장로님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기가 기도를 아주 잘했다고 생각하며 아주 흡족한 듯이 자신의
기도를 마무리했습니다. "이 모든 말씀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장로님은 힘주어 아멘 소리를 하면서 기도를 마쳤습니다.
당연히 함께한 모든 교인들도 자기의 기도에 화답해서 "아멘"하고 큰소리로 말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단 2명만 "아멘"이라고 화답을 했습니다.
한 사람은 기도를 한 당사자인 장로님 자신이었고 또 한 사람은 예배를 인도한 목사님이었습니다.
장로님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눈을 떴습니다. 그러자 거기에는 장로님과 목사님, 단 두 사람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장로님은 깜짝 놀라서,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교인들은 다 어디 갔습니까?" 그러자 목사님은 딱하다는 듯이 장로님에게 이렇게 대답
했습니다. "장로님, 장로님의 기도 중에 노아의 홍수가 시작될 때 한 사람씩 두 사람씩 홍수에
떠내려가더니 결국은 다 떠내려 가버리고 장로님과 저만 살아있는 모양입니다."
물론 우스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은 줄 압니다.
기도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 사람들 들으라고 설교하듯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무것도 모르고 계시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 옛날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은밀하게 드리는 기도에 대해서는 열심도 없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꼿꼿하게 서서 장황하게 오랫동안 큰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기도를 지적하시고 바른기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기도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둘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했던 기도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들이 드리는 바른 기도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바른 기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기도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경건한 삶을 위해서 하루에 세 번씩 기도 시간을 정해놓고 하나님께 기도
했습니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오전 9시 낮 12시 오후 3시 였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하루에 세 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일에 힘썼으며 특별히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가 구걸을하고 있었는데 베드로는 구걸하고있는 앉은뱅이를 보며
말했습니다. "은과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러면서 앉은뱅이의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앉은뱅이의 발과 발목에 힘이 생겼습니다.
그는 그 즉시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리고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왜 성전에 올라갔습니까? 제9시 곧 오후 3시의 기도시간을 맞이해서 기도
하기위해서 성전으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반면에 성전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들은 가까이 있는 회당을 찾아가 기도했습니다.
또 사정이 여의치 못해서 성전과 회당에 갈수 없는 사람들은 시간에 맞추어서 자기가 있는
그 자리에서 기도하기에 힘을 썼습니다. 이처럼 하루에 세번씩 기도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일에 힘쓰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본문 5절에서 기도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하시면서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사람들이 하루에 세 번씩 기도시간을 정해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에 힘쓰는
것을 나무라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기도는 하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외식적인 기도는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미 살펴본 바대로 "외식하는 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대명사' 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겉과 속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구제할 때나 기도할 때 금식할 때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외식하는 자"라고 질책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기도가 어떤 점에서 외식적이었습니까?
오늘 예수님은 그들의 기도를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그들은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는 말씀 앞에 세 개의 수식어가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입니다. 그들이 기도했던 동기입니다.
둘째, "회당과 큰 거리"입니다. 그들이 기도하기를 좋아했던 장소입니다.
셋째, "서서"입니다. 그들이 기도했던 자세입니다.
기도의 장소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하기 위해서 회당을 찾아갑니다.
가는 도중에 시간이 지체되어 그만 가는 도중에 그만 기도 시간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면 그 자리가 회당의 입구든지 아니면 큰 거리 어귀든지 상관없이 그대로 멈추어서 기도를
하면 됩니다. 이처럼 어쩔수 없이 그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은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찾아가서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이 보는 앞에서
기도를 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이번엔 기도의 자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앉아서 기도할 수도 있고 꿇어 엎드려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
보편적으로 취했던 자세가 바로 "서서"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때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자신을 뽐내면서 기도했으나 세리는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세리는 멀리 떨어져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자신의 가슴을 치면서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세리도 역시 "서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니까 서서 기도하는 그 자세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들의 잘못된 기도는 한마디로 순수하지 못한 동기에 있었습니다. 회당과 큰거리 어귀를 찾아간
것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이 서서 오랫동안 큰소리로 기도한 것도 역시 사람들에게 드러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 앞에 있는 척했으나 속으로는 사람들 앞에 자신을 내보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겉과 속이 다르니까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서 외식하는 자라고 질책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외식적인 기도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5절 끝 부분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사람들은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사람 기도 잘하는구나 참 믿음이 좋은 사람이구나"
그들을 칭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들이 받을 상은 다 끝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에게는 단지 화가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둘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중언부언하던 기도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7절 말씀입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중언부언' 이라는 말은 같은 말을 의미 없이 되풀이하는 것을 뜻하는데
영어로 말하면 "meaningless repetition" 입니다.
같은 기도를 반복하더라도 진실한 마음으로 간절하게 하나님 앞에서 기도한다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우리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십자가를 앞에 놓으시고 같은 내용을
세번 반복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하실만 하거든 이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때 예수님은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하셨
든지 흘러내리는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도 자기의 육체를 괴롭히는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간절한 마음
으로 기도했던 것을 알고있습니다. 이와 같이 똑같은 기도를 반복하더라도, 전심으로 구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입술 따로 마음 따로가 문제입니다.
본래 중언부언 하는 방식은 이방인들의 기도하는 모습의 특징이었습니다.
성경에도 그 예가 여러곳에 나타나 있습니다.
열왕기상 18장에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과 대결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 바알 선지자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똑같은 말만 반복했습니다.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그들은 똑같은 말만 온종일 반복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중언부언입니다.
또, 사도행전 19장에도 한 예가 나옵니다. 에베소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반대하기 위해서 연극장
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똑같은 말을 두 시간이나 계속해서 외쳤습니다.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역시 중언부언입니다.
왜 이방인들은 기도할때 이와같이 중언부언합니까? 계속해서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목적이 무엇
입니까? 7절 하반부에 보니까,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방인들은 기도할 때 자기들의 말이 많으면 많을수록 기도가 길면 길수록 기도에 더 큰 효과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이 갈멜산에서 바알을 부를 때 그들의 중언부언은 네 단계로 이루어졌습니다.
첫째, 그들은 잠자는 바알을 깨우기 위해서 바알의 이름을 큰 소리로 계속해서 불렀습니다.
둘째, 그들은 송아지를 잡아서 제단 위에 올려놓고 주변을 돌면서 자기들의 춤과 제물로서
자기들의 신인 바알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바알에게 아첨을 떨어서
기도의 응답을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셋째, 그들은 칼과 창으로 자기들의 몸을 상하게 하면서 피를 흘렸습니다.
아마도 바알을 협박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좋은 말로 할 때 들으라는 것입니다.
넷째, 그들은 그 뒤로도 계속해서 바알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들은 바알을 귀찮게 해서라도
기도의 응답을 받고야 말겠다는 것입니다.
이같이 이방인들은 자기들의 신을 잠에서 깨워야 하며 아첨도 해야 하고 협박도 해야 됩니다.
귀찮도록 졸라대야 됩니다. 그러니 중언부언할 수밖에 없으며 기도가 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기도할 때 이방인들의 영향을 받아서 그들도 중언
부언하는 기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암송하듯이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암송하던 두 개의 기도문이 있었습니다.
첫째, '쉐마' 였습니다. 히브리어인데 우리말의 뜻은 "들으라"입니다.
쉐마는 신명기 6장 4∼9절, 11장 13∼21절, 민수기15장 37∼41절의 말씀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기도문을 아침 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씩 암송했습니다.
둘째, '쉐모네 에스레' 라는 기도문인데 이것은 히브리어로 18이라는 숫자를 뜻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삶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경우들을 18가지로 압축했습니다.
그리고는 각 경우에 적합한 기도문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기도문이 얼마나 길겠습니까?
그들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 시간마다 그 장황한 기도문을 암송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자기들이 해야할 기도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기도문을 진실한 마음과 정성으로 암송을 한다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들은 그저 기계적으로 형식적으로 암송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기도를 아무리 오래 한들 이방인들의 중언부언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결국 그들의 의는 이방인의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의로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가 드리는 바른 기도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6절 말씀입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기도합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며 은밀하게 하나님께만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은밀한 기도의 모습을 세 가지로, 설명하셨습니다.
첫째,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자기 집 안의 구석진 곳에
작은 골방을 마련해놓고 있었습니다. 그 방은 사람이 거주하는 곳은 아니며 귀중품같은 물품을
보관하는 장소입니다. 따라서 거기 들어가서 기도하면 사람에게 보일 우려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마음을 하나님께로만 집중해서 기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둘째, "문을 닫고"입니다. 문을 닫아야지 보는 사람의 시선이나 시끄러운 소리에서 피할 수가
있으며 그럴때에 하나님께로만 마음을 집중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셋째,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 하는 기도는 장소가
중요한게 아니고 마음의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기도한다 할지라도, 마음이 하나님께로 집중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가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우리의 바른 기도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6절말씀의 끝 부분입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외식적인 기도를 하면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듣지아니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은밀한 가운데 기도하면 언제나 우리의 간구에 귀를 기울여 주시며
그리고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갚으시기 때문입니다. 8절말씀 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부모는 그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언제나 더 좋은 것을 더 많은 것을 주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지각이 부족하기 때문에 때로는 잘못 구할 때도 있습니다.
돌이 떡인 줄 알고 돌을 구할 때도 있으며, 뱀이 생선인 줄 알고 뱀을 구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돌 대신 떡을 공급해 주시고, 뱀 대신에 생선을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실한 마음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언제나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계시록 5장 8절 말씀을 보게되면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아름다운 향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바른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뿐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신실한 기도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
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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