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기도문 강해
본문 : 마태복음 6장 9-13절, 누가복음 11장 1-4절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날마다 열심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주님의 뜻에 맞게
기도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면 아마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기도의 모델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깨닫고, 함께 기도함으로 우리의 기도가 주님으로부터 응답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마태복음 6장 5-8절을 보면, 외식하는 자들이 회당과 큰 거리에서 기도하는 것이나 이방인들이
같은 말을 의미 없이 반복하는 기도의 모습을 보시고, 그들을 본받지 말고, 바른 기도를 하도록 하기 위하여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누가복음을 보면, 세레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을 본, 예수님 제자들이 요청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기도문'을 마술의 주문 외우듯이, 중얼거리며 외우는데 빠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주기도문이 가지고 있는 몇 가지 특성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주기도문은, 가장 모범적인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또 자기 감정에 의지하여 중언부언하는 기도도
아닙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2. 주기도문은, 단순하면서도 간결한 기도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미사어구를 동원해서 유창한 언어로 장식되어 있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 아버지와 대화 하듯이, 간결하면서도 자연스럽게 하는 기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3. 주기도문은, 가장 완벽한 기도입니다.
우리 주님이 직접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가장 완벽한 기도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했을뿐 아니라, 인간의 현재의 삶 속에 필요한 양식과, 과거의 죄에대한 용서와
미래의 악에서 구원해 달라는 기도이기 때문에, 너무나 완벽한 기도일수 밖에 없습니다.
4. 주기도문은, 어느 시대 누구든지 드릴 수 있는 '보편적 기도'입니다.
5. 주기도문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 교회에서 아주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기도문에 대해서,
1) 1세기 사도들의 교훈집으로 알려진, ‘디다케’에서는 '하루 3번씩'(아침, 오후, 저녁) 주기도문으로 기도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2) 또한 주기도문에 관한 첫 번째 주석을 쓴 ‘터툴리안’이란 교부는, 주기도문은 모든 '복음의 요약'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3) 종교 개혁가 '마틴 루터'는, 주기도문은 '최고, 최선의 기도문'이므로 주기도문으로 하루를 열고,
하루를 마감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4) 장로교의 창시자인 '존 칼빈'은, 주기도문은 신자들이 간구해야 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가장 '이상적인 기도'라고 말했습니다.
먼저, 9절을 보게 되면,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이렇게‘ 란 '이런 방법'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까?
응답 받는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겸비한 자의 기도요, 하나님을 먼저 기쁘시게 하는
기도 방법을 말합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을 보면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부르짖으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놀라운
반응을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생각할 말은 ’기도하라‘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기도하라는 뜻은,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7절 말씀대로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 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먼저 '아버지'를 부르면서 기도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참된 '기도의 대상'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이란 말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무소 부재하신 영광의 하나님, 무한히 크고 위대하시며, 이해할 수 없는 본질과, 말할 수 없는 권세와
영원 불변성을 가지고 계신 분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하늘'은 단순한 공간(sky)이나 장소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주의 핵심으로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이며,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가 이루어 지는 곳 (heaven)
즉, '하나님의 보좌'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 33;13, 11;4, 사 66;1 참조)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심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우주 만물을 주장하시는 하나님, 살아계시고 인격적인 하나님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 ‘아버지여’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을 불경스럽게 생각했습니다.
(15회 정도 언급/ 사64;8, 신32;6, 렘3;4, 신 14;1 참조)
그러나 복음서에서는 아버지란 말이 무려 170회 등장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15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 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혹은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은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모든 기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또한 하나님과 특별히 가까운 관계로 말미암아,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을,
신뢰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아버지의 자비와 긍휼에 대한
불신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한 아버지 밑에서 동일한 자녀이므로, 우리 가운데
형제애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주기도문은, 하늘 아버지께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주님께서 이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먼저 3가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간구를, 다음 3가지는 우리의
필요를 위해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름이‘ 누구의 이름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원문에는 '당신의 이름이' 라고 되어 있습니다.
구약에서 이름은 단순히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인격이나
그 사람 자체를 가르키고 있습니다.
창세기 17장5절에 보면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창세기 32장28절에서는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인격과 임재하심을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은 어떤 뜻이 있을까요?
성경에는 ’여호와(Lord)‘라는 말이 7040번으로 가장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여호와 : 출애굽기 3장16절에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 I AM who I AM.) (출3장14절)란 뜻으로, 우리안에 내주하셔서 함께하시고,
도와주시고 교제하시기를 원하시는, 인격적이고 은혜의 하나님을 카르킨다. (창세기 2장의 하나님).
즉, 복을 주겠다, 지켜 주겠다, 인도해 주겠다고 말씀 하실 때 '여호와'란 이름을 사용하셨다.
하나님(엘로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초월적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가르킨다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은 창조, 권능, 능력을 나타낼 때,
계시록 1장 8절의 하나님은 전능하신(almighty God) 하나님을 나타낼 때
그리고 시편 57편 2절의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most high God) 하나님을 나타낼 때에,
이사야 40장 28절의 하나님은 영원하신 (everlasting God) 하나님을 나타낼 때에 사용된다.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거룩하다’란 구별된다, 다르다, 란 뜻으로, 죄가 전혀 없는 깨끗하고 완전한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민수기 20장10-12절과 신명기 32장51절을 보면, 모세는 물이 없어서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반석을 쳐서 물을 얻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시행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반석을 두번 쳤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분노와 자신의 이름을 나타낸 행위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벌을 받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수 있는가?
1,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야 합니다.
계시록 5장 13절에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찌어다'.
내가 감동받기 위해 찬송하고 찬양하는 것 아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2,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생활의 '모든 것 위에, 주님을 두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 제일주의 삶을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15절,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고린도전서 10장 31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던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베드로전서 4장 11절,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레위기 19장 2절,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에스겔 39장7절에 하나님의 이름이 어느 시점이 되면 천하 만민에게 알려질 것이라는 예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높임을 받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에서 이루어 질 것을 예언
하는 것입니다.
요한 12장28절을 보게되면,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하신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이름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으로 거룩히 되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과거의 사건으로 머물러 있는게 아닌, 계속 선포되고 확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미 거룩하게 되신 하나님의 이름이
더욱 선포되고, 완성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 받으시게 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여,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나라가 임하옵시며,
예수님을 믿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요? 많은 대답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중의 하나는 ‘천국’에 가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설교와 가르침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마가 1장1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첫 증거의 말씀이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고 말씀 하셨습니다.
또 마태 4장17절에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4장 43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복음을 전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8장1절에서, 열두 제자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3절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실 때까지 40일간 역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8장 31절을 보면 사도 바울도 로마 감옥에 온 2년 동안 하나님 나라를 전파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 우리가 믿고 가기를 소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모습인지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성경은 매우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독교 전통에서 오랫동안 하나님의 나라는 사후에 가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 요소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1) 누가 11장20절을 보면,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만 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으로도 임하여 체험 가능한 놀라운
일임을 선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종말론적인 미래로 남아 있지만, 현재에도 부분적인 체험이 가능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를 어떤 국가나 장소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생각해 오곤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한 공간이나 장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에 의한 통치 혹은 지배를 말합니다.
누가 17장20-21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또 마태 12장28절에,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귀신이 어떤 사람을 지배하면, 그 사람은 죄와 어두움의 힘에 사로잡힙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지배가 그 사람에게 임하면, 죄와 어두움의 세력은 물러가고,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됩니다. 바로 이 상태를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성격은, 복합적입니다.
하나님의 은총, 기쁨, 구원, 축복등 매우 다양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영적인 어떤 것’ 으로만 간주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는, 물질적이고 공동체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이고, 이 세상을 넘어서는 초월적 성격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속에서 체험되는, 물질적 측면도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서를 보게 되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잔치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소외된 자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거룩한 천상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소외되고 약한 자와 함께 울고, 그들의 상처를 감싸주고 위로하고, 억울한 자의 고통을 덜어주고
죄인과 함께 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체험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을 떠나서만 오는게 아니라, 이 세상의 삶 속에서도, 임한다는 것입니다.
4) 미래에 나타날 영원한 천국 (계시록 21장 10절 – 22장 5절)으로, 이는 장차 구속받을 우주의 모습으로,
낙원 중에 낙원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천국에 가고자 하는것은, 그곳이 낙원이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이 그곳에 게시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1) 주님이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천국입니다. 즉 주님의 주권이 미치는 영역을 말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마음과 생각을 바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특별한 의미에서
나타내고 사용하십니다.
고린도전서 4장20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성도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천국'을 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믿고 산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곧 내가 나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다스리는 그 나라는, 잘 다스려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이란, 내가 나를 다스릴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내가 나를 다스린 삶, 내 자아가 나를 주장한 삶이 형편없이 나를 실망시켰으며, 내 삶이 어두움과
죄악 가운데 빠져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어느 날 내가 나를 다스리는 그런 삶을 떠나서,
나의 죄와 허물 때문에, 십자가에서 살을 찢으시고 피와 물을 몽땅 쏟으시고 죽으신 그 예수님을,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인격적으로,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한 때부터, 주님은 나를 다스리시고, 나를 통해 주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천국은 우리의 모든 소원이 만족되는 나라임에 분명합니다.
로마서 14장 17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바울은 천국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성령을 통해서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주를 다스리시며, 내 교회와 가정 그리고 나를 다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에, 의가 이루어지며, 평화가 이루어지며, 말로 다할수 없는 기쁨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물질적인 만족뿐만 아니라, 인격적인 차원까지 포함하는 나라입니다.
누가 17장20절에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합니까? 하고 물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1) 나의 삶이, 주님의 다스림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2)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완성된 그 나라가 속히 오기를 고대하는 것입니다.(계 22장 20절)
3)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태24장14절)
4) 주님이 만물을 회복하시는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롬 8장 18-23절)
계시록 11장15절에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나타내는 이 말씀이 바로, 나라가 임하옵시며, 의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처음 오심으로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며,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가 조속히
실현되도록, 날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며,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면서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소원하는 이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이 땅에 드러나게 해 달라는 기도며,
성취된 하나님의 나라가 나를 통해서 우리 안에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내 영혼 안에, 내 삶의 현장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찬송가 549장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 옵소서’를 작사한 벤야민 슈몰크는 독일의 루터교 목사였습니다.
1704년 어느날 목사 부부는 심방을 마치고 집에 와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집은 다 불타 버렸고, 연기만 모락모락 나고 있었습니다.
정신없이 두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잿더미를 파헤쳐 보았지만 이미 두 아들은 죽어있었습니다.
그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동안 정신을 잃었던 슈몰크 목사는 마가 14장 36절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한 예수님의 기도를 생각하면서 슬픔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이 찬송가 549장의 가사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기도하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이시간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이 이 땅위에서 이루어지는 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신앙생활에서 많이 쓰이고 있는 말 중의 하나가 ‘영적’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영적인 삶이 어떤 삶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제각기 자신이 영적이라고들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별로 영적이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종종 생각하기를 죄많고 괴로운 세상을 벗어나 하늘나라로 가는것이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른 영성은 ‘땅에서 하늘로’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땅으로’ 라는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살기를 원한다면, 먼저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땅 위에서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본질적으로 말 하는 것(speaking) 이 아니라, 듣는 것(listening)입니다.
우리가 초신자일 때는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지만,
영적인 수준이 어느 정도 향상되면, 우리의 기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나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시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듣는 기도,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기도로 성숙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기도를 즐겨하셨습니다. 종종 예수님은 혼자서 밤새도록 기도하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자백할 죄가 없으시고 간구할 물질적 필요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 전체가 기도였다고 말할 수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어렵고 힘들 때, 무엇이 간절하게 필요할 때에만 그나마 기도합니다.
우리가 바른 기도생활하기 위해서는 영적 무감각이나 냉담함과 먼저 싸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이며, 지금도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주기도문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으로 이루어 진 하나님의 뜻이 교회를 통해서,
성령 하나님께서 계속하여 이루시기를 원하는 기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낸 성경 구절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데살로니가전서 4장 3-8절,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 거룩함이라. 도덕적인 교훈으로 순결한 생활을 해라.
요한 6장 38-40절,
내가 하늘에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벧전 3장 17절,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시편 40편 8절,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요한 1서 2장 17절,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한복음 4장 34절,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주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하나님의 중요한 뜻은 마태 18장 12-14절/누가15장 8-10절 말씀과 같이 성자를통해 잃은자를 찾는 일입니다.
‘이와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14절)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수 있었습니까?
a)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 갈 1장4절, 히 10장9-10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갈1장 4절)
b)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구속사의 경륜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골 1장13-14절, 이사야 53장10-11절)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골 1장13-14절)
따라서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에서 우선적으로 이루어 진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셨을 뿐만 아니라, 고난을 무릎써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 뜻에
기꺼이 복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가해 질수 있는 가장 혹독한 십자가의 시련과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그럴 때에도 불평하거나 불만을 갖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고난도 기꺼이 감수하신 것입니다.
계시록 12장 7-9절 말씀을 보면, 하늘은 사탄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이라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온전히 그리고 완벽하게 이루어 진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온전히 이루어 진 것같이, 땅에서도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며
이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삶속에서 찾고 이루기 위해, 말씀에 순종하고 경청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마태 7장 21절을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삶에 영적인 눈과 귀가 가리워져,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 성경 중심의 삶을 순종하면서 살고 있는 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세상적인 간구와 나의 뜻을 접어두고 하나님의 뜻을 먼저 찾으려는 순종의 마음과 자세가 더욱 요청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 주님의 재림을 통해 이루어질 완전한
나라를 바라보며, 그 분의 뜻이 우리의 뜻과 마음과 생활 가운데 날마다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제 우리는 주기도문의 전반부인 하나님에 대한 청원을 마치고, 우리 자신에 대한 청원을 다루게 됩니다.
전반부의 하나님에 대한 청원은,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 그리고 하나님의 뜻’ 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후반부에도 3개의 간구가 등장하는데, ‘우리를 위한 양식, 우리의 죄 그리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 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6장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라’ 라는 순서를 연상케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십계명중 1-4 계명이 하나님 중심과 관련된 계명에서, 5-10 계명은 수평적인 이웃과의 계명을
다루는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엔식량농업기구는 아시아,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세계 40여 개국이 식량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식량 위기에 처하게된 이유는 내전과 엘리뇨, 라니아에 위한 가뭄과 홍수가 원인이라고 합니다.
또한 이 기구의 보고서는 이와같은 식량 위기로 매년 1800만명이 굶어 죽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주위에는 실제로 먹는문제의 해결을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으며, 보이지않는 생존 위협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처음부터 이러한 먹고 사는 문제로, 위기 속에서 살게 된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 3장 17-19절을 보게 되면, 인간의 타락과 범죄 이전에는 먹는 문제로 고통 받지 아니하고 살았지만,
타락 이후에는 땀을 흘리는 수고를 하여야 먹을 것을 구할 수 있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들에게 있어서 먹는 문제의 시작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에덴동산에서 쫒겨나면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로 먹고 사는 문제는 생존의 최대의 문제로 떠오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에,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 예수님을
유혹한 내용이 바로 돌들을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먼저 하나님의 이름, 나라, 뜻을 구한 다음에 사람의 문제를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양식’의 문제를 언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시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일용할 양식의 의미를 깨달으며, 우리의 삶 속에 적용시켜 보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먼저 일용할 양식은, 말 그대로 ‘그날’ 하루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정도를 말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동차는 기름이 있어야 움직이고 기계는 동력이 있어야 작동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양식을 먹어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더 핑크라는 신학자는 여기서의 양식이란 꼭 필요한 음식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생활의 방편을 포함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종교 개혁가 마틴 루터는, 육체를 위한 떡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기도문에서 구하고 있는 일용할 양식은, 잠언 30장 8-9절의 말씀과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 함이니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나’에게가 아니고 ‘우리’에게라고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이웃에 대한 관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향한 사랑의 표시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선진국은 먹을게 넘쳐나고 있지 않습니까? 너무 먹어서 살빼느라고 고생하고 있잖아요,
브라질의 경우 커피가 너무 많이 생산되어, 궁여지책으로 잉여 커피를 굳게 해서 기관차의 연료로
쓰고 있다고 합니다.
FAO의 통계에 의하면, 전 세계 식량 생산량은 현재 지구촌 인구의 2배도 먹일 만큼 충분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식량이 부족하고 없어서 굶어 죽는게 아니라, 어떤 나라에서는 너무 많아 주체를 못하고, 가난하고
못 사는 나라에서는 먹지 못해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모습입니까?
그래서 오늘 우리가 기도할 때에 ‘나에게 일용할 양식’이 아니라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라고 기도하는
것은, 이와같은 불균형된 모습이 아니라, 함께 나누며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을 기대하며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성경말씀, 사도행전 20장 35절 말씀, 약한 사람을 돕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우리는 교회를 신앙의 공동체라고 합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초대교회의 공동체의 모습이 사도행전 2장 44절 이하에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초대교회와 같이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을 보이기에는 부족하지만, 함께하는 사랑의 나눔과
교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내세의 복은 물론이거니와 현세에서도 복을 받기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용할 양식을 구하면서, 우리가 기억해야할 중요한 사항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생업이나
사업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도구가 되어야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는 것입니다.
바로 이순서가 지켜질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질적인 복을 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앙인으로써 어떠한 자세로 양식을 구해야 하는지, 성경 몇 구절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1절에,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행18장 3절,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살전 2장 9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 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디모데전서 6장8절에,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이 기도를 해석하는 열쇠는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는 것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과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원망한다면, 상처 받는 사람은 상대방일까요?
아니면 나 자신 일까요?
어느 날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줘야 합니까?
그때에 예수님께서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하라, 하시면서 마태복음 18장 23절 이하에서 한 가지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이 비유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잘못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비유를, 사람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위해서는 어떤 조건이나
공로를 필요로 한다, 고 하는 말씀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교훈하시고저 하는 포인트는, 큰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의
삶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받았다면, 변화된 새로운 삶의 모습이 보여져야 한다, 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받은 사람이라 볼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 6장14-15절의 산상수훈에서도 같은 맥락의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을 보면,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은 삭개오의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주님 가신 길을 따라 가려면, 먼저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6-27절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그러시면서 32절에,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같이 하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보복적인 분노를 이기지 못해, 증오나 원한을 품는 것을 경계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행악에 치우치기
쉽기 때문입니다.
요한 일서 3장15절에,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라’ 고 말씀하시면서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고 사망에 머물러 있다’ 고 우리에게 신행일치의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 만큼 용서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며, 또한 아름다운 신앙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속에 그 문제가 깊이 뿌리 내리기 전에 가능한 빨리 용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미움과 원한의 뿌리가 너무 깊이 박히면 뽑기가 훨씬 힘들어 지기 때문입니다.
‘복수’라는 이름을가진 사탄은 ‘당신이 나에게 이렇게 했으니, 나도 그대로 갚아주지’ 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용서와 긍휼’은 ‘당신이 비록 나에게 잘못했어도, 나는 이미 당신을 용서했으므로, 나에게 잘못이
없는 사람처럼 대하겠어요’ 라고 말하게 합니다.
미움이나 원한 같은 나쁜 감정을 계속 내 마음에 품는 것으로, 상대방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도리어 그런 감정은 우리 자신을 더 고통스럽고, 불행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남을 용서하는게 그리 녹녹하지 않은 일이란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남을 용서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기도해야 합니다. 누가 6장 27-28절에 그냥 기도하는 게 아니라 축복하며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로마서 12장19절에는,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 다른 사람을 이해해야 합니다. understand는 under(아래) + stand(서다)의 복합어입니다.
다른 사람의 형편과 처지,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의 입장을 고집하지 말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면, 많은 것이 달라보입니다.
3) 잊어버리기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 속담에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마음에 새긴다’ 는 말이 있습니다. 아주 무서운 말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피해를 준 것은 빨리 잊어버리고, 좋은 기억은 오래 오래 간직하시기를 바랍니다.
4)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아카페의 사랑 즉 목숨까지도 내어주는자기희생의 사랑 죄를 대신 짊어져 주시는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완전하지 않을뿐더러 자신을 완벽하게 꾸밀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를 한다면, 우리 가운데 변화된 모습과 치유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할 수 있으며,
자신의 신앙을 한 단계 엎그레이드 할 수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하며, 우리의 감정을 사랑과 진실함으로 바꾸기 위해서 우리는 바로
지금 용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용서’는 우리의 불완전함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우리는 주기도문에서 처음으로 부정적인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이 간구와 관련하여 자연스런 질문은,
과연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야고보서 1장13절에 나와 있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그런데 이 말씀을 뒷받침하는 놀라운 말씀이 욥기 2장 6절에 나와 있습니다, 아주 놀라운 말씀입니다.
사탄이 욥을 시험하기 전에 하나님의 허락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이것은 우리가 사탄의 유혹과 핍박을 전혀 만나지 않도록 해달라는 간구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사탄의 시험과 유혹을 만나더러도 그것을 감당하며 이길 수 있도록 해달라는 간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간구는 예방적 차원의 기도가 아니라, 극복하여 승리하는 차원의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탄의 유혹과 시험은, 우리가 주님께 더욱 헌신할수록, 말씀을 더 사모할수록, 어려움과
시련은 더욱 많아지고 커진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에도 마귀와 사탄은 끊임없는 시험으로 대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마귀, 사탄의 시험을 만나지 않도록 해달라고 간구하신 적이 없었으며, 이러한 유혹이나
시험과는 타협하지도 않으셨고, 도리어 책망하시고, 물리치시는 승리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마귀와 싸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시험’은 무엇을 말하는가? 시험이란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징계, 훈련
그리고 연단을 의미하는 test와 다른 하나는 유혹 혹은 미혹을 나타내는 temptation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시험(test)은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의미의 징계나 연단을 말합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12장 11절)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 아들이 아니니라".(히,12장5-8절)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1장2절)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1장6절)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연단이나 훈련을 통해 신앙이 성장하게 되며, 이 과정을 믿음으로 통과함으로
하나님의 상급과 칭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유혹(temptation)은 파괴적이며, 정욕적인 의미의 시험으로 이것은 우리를 무너뜨리고, 파멸하는
시험을 말합니다.
요일 2장15-16절을 보게 되면, 마귀, 사탄의 무기는 바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도 이 방법을 다 사용했습니다,
돌이 떡이 되게하라는 육신의 정욕을 시험하고 있으며, 천하만국과 영광을 보여주면서 자기에게 절하라는
안목의 정욕을 시험하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천사로 받들게하라는 이생의 자랑을 시험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시험과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까?
1)기도해야 합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마태 26장 41절)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마가 9장 29절)
2)세상과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 1장14절),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무장하고,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엡 6장11절)
3)무엇보다도, 시험에 빠질 수 있는 기회와 장소를 거부해야 합니다.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편1편1절)
4)세상이 시험과 유혹이 가득한 곳임을 항상 인식해야 합니다.(마태 24장10절)
‘악’에서 구하옵소서, 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와 표현만 달리 하고 있을 뿐이지, 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악’은 ‘사탄’을 가르키고 있으며, 그 악이 바로 우리를 유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23절 이하를 보게 되면, 사탄으로부터 고난당하는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며, 선교사며, 신학자 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고난과 시험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 때마다 바울은 기도했고, 하나님은 사탄의 손에서 바울을 건지셨고, 보호하셨음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뿐만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장 35절 이하에는, 많은 믿음의 선진들 역시 이런 고난과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 했으며, 때로는 목숨까지도 내어 놓았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탄과 마귀의 궤계에 좌절하거나 포기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욥이 끝까지 하나님께
범죄하지 아니함으로, 나중에 갑절의 복을 받았음을 기억하고, 우리도 끝까지 인내해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57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놀라운 은혜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로 사탄의 권세, 죄의 권세,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으므로, 그 승리는 바로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우리들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지속적인 승리를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 분의 나라를 확고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간구에 나타난 주님의 소원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많은 시험과 유혹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0장13절에 은혜의 말씀을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다음으로 주기도문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아옵나이다, 아-멘.
6개의 간구가 끝나고 이제 송영으로 주기도문을 마칩니다. 송영이란 거룩하고 기쁜 감사와 찬양을 뜻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라’는 요한계시록 11장15절의 말씀과 같이, 주님의 주권(다스림)이 실현되는 세상을
말 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권세‘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과 전지전능하심으로, 이 권세로 지금도 세상 만물을 다스리실
뿐 아니라, 우리의 삶도 지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영광’은 하나님께서 원래 가지고 계시는 거룩하고 영화로운 것들과 그 영광을 피조물에게
비춰 주시는 찬란함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 14절을 보게 되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즉, 이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아-멘, 은 꼭 그렇게 될 줄을 믿습니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나,
고린도후서 1장 20절에,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으며,
느헤미야 8장 6절에서도,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함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주기도문을 마치면서 아-멘 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시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과 땅에서
이루어지며,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않으시며, 악에서
구하시는 하나님께서 송영을 받으셔야 하며 그렇게 될줄로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기도를 마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기도할 때에 아멘을 무분별하게 사용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미 없는 아멘의 남발은 아멘이신 예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3장14절,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우리는 이제껏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대해 배웠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를 배운 것입니다.
무엇을 간구하는지 생각함이 없이 그저 틀에 박힌 기도문을 암송하고 되뇌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본받아 행함으로, 날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천국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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