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말씀 :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에베소서 5장 18절) / 성령을 소멸치 말라(살전 5장19절)
오늘날 많은 한국 교회가 추구하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해지기를 소원한다면, 살아있는 하나님 말씀을 주야로 열심히 살펴보고 깊이 묵상해야
할 것이며, 그 때에 우리 가운에 일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올바르게 깨닫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왜 성령의 사역을 바로 알아야 하냐하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장 32절을 비롯한 여러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의 사역을 무시하는 행위에 대해, 우리에게 엄하게 경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에 대한 우리의 높은 관심은, 우리의 신앙 생활을 때로는 혼란에 빠지게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게 된 배경에는 오순절 운동이라 든지 은사운동 그리고 빈야드 운동과 같은,
성경의 충족성과 종결성에 모순되는 잘못된 현대 성령운동의 영향이 적지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에 대해 어느 때보다 관심이 높아져, 요즘, 많은 성도들이 성령 충만 받기를 기대하며 사모하며, 열심히 기도
하는 모습을 자주 볼수 있습니다.
요한 20장 22절을 보면,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계심을
알수 있으며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는 바울도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오직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충만을 원하는 것만으로 사도의 명령에 순종했다 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행전에는 베드로, 바나바, 바울,스데반 등과 같은 사람들을 성령 충만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성령충만한 사람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근거와 성령 충만한 결과로 그들에게서 드러나는 현상을 우리는
성경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이 분들의 모범을 살펴보면 성경의 가르침과 우리의 생각 사이에 존재하는 성령 충만의
모습이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인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오순절 혹은 은사주의자들이 정립해 놓은 성령
충만에 관한 인식에, 우리가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즉 방언, 예언, 치유와 같은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와 성도의 내적 체험과 같은 범주에서 성령충만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성경 말씀이 그들을 성령 충만한 사람으로 확증하는 근거는, 그들의 초자연적인
은사가 아니라, 그들 가운데 드러나는 온전한 신앙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예컨대, 스데반은 사도행전 6장 5,8,10,55절에서 성령충만한 사람으로 묘사되는데, 그것은 그의 신앙적 삶이
다른 사람에게 모범이 되어 집사 직분을 감당하기에 합당한 성도였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바나바 또한 사도행전 11장 24절에 성령충만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이제 막 복음을 알기 시작한
안디옥의 성도들을 온전한 신앙의 길로 이끄는데 합당한 경건함과 지혜를 가진 사람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과 베드로도 성령 충만하였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히 전할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로마 황제 앞에서 또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들 앞에서 그리고 새로운 선교지에서의 혼란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할 수 있었음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인식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시대적
사명을 감당할 줄 아는 성령충만한 삶을 살았던, 믿음의 선진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성령에 관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말할 수 있겠지만, 이 시간 그 중에서 특별히 두 가지를 말하고 싶습니다.
먼저, 삼위일체(The Trinity)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으로 영원히 구별된 삼위 즉 성부, 성자, 성령의 다른
위로 계시지만 삼위는 본질과 속성 영광과 존귀에 있어서 동등하시며 그리고 영원하신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그리고 다른 하나는 믿음의 성도들에 대한 성령님의 사역으로, 그분은 택한 백성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온전히 참여하여 성도로서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일 하시는 분 이심을 알아야 한다는것입니다.
이것은 ‘술 취하지 말고 오직 성령을 충만을 받을 것’을 말하는 바울의 명령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고 할수 있습니다.
이 명령은 복음에 합당하지 못한 어리석은 자들의 생활을 벗어나,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실천하는 삶,
즉 성령을 소멸치 않고, 성령충만한 성도의 상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엡 5:17, 18).
그러나 은사주의의 영향을 받은 교회들은, 개혁주의자들도 성령의 은사들이 드러나는 것을 성령님의 사역과
동일시 하면서도, 성령은사 운동을 무시한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개혁주의 신앙은 성령을 소멸하지도 않을 뿐더러, 훼방하지도 않습니다.
현대교회에 영적 침체가 있다면 이들의 주장처럼 "전통적이고 경직된 성령론" 때문이 아니고 역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세상과 분리되기 보다는 세상을 따라가며 세상과 타협하는 인본주의적 신앙과 성경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며, 신앙을 말씀보다 경험에 의존시키는, 은사운동의 영향때문으로 보고있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은사들이 아니고 성경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과 성실한 순종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들과 온전한 믿음의 성도들은 마땅히 은사운동의 위험을 인식하고 그 운동을 경계해야 하는것 입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개혁주의가 지향하는 근본적인 삶의
태도이며, 그것은 성령님의 사역을 통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부터, 즉 우리의 유일한 위로를 그리스도에게 속함에서 찾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에게 온전히 의존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은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충족한 말씀, 최종적 권위의 말씀 즉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정확 무오한 유일의 규범
임을 확실히 믿는 것이며, 바로 그것이 곧 성령 충만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삶이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