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10:13)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Everyday, people who encounter miracles,,,

**주안에 서면

바울의 복음에대한, 신념과 철학(고린도전서 1장 1-3절)

Andy1954 2024. 1. 22. 13:25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성도로 혹은 직분자로, 우리가 현재 서 있는 이 자리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나오는 우리의 가슴속에는, 과연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요?

바울에게는, 예수님을 만난 감격과 분명한 사명인식 그리고 이 생명 다 바쳐, 이 길을 걸어 갈

수밖에 없는 주님 사랑에 대한, 뜨겁고 진실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빌립보서 1장 8절에서,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로 일생을 하나님께 드린 그에게는, 분명한 사역의 방향과 목표와 자세가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제자요, 구원받은 성도였으며 그리고 목회자요 전도자요 하나님의 청지기였습니다.

그의 삶에는 부동의 신념과 복음적인 사상이 있었습니다.

본문은, 그의 이러한 신념과 복음적 사상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일반적으로 바울 서신의 첫머리 부분은 인사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일부 신학자들은, 이것을 서신의 도입부로 이해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반면에 바울 서신의 이 부분을, 사도 바울의 사도성을 변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쓰여진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1)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너무나 피상적인 접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먼저 바울이 쓴 13개의 서신에는, 내용의 길이가 다르기는 하지만, 비슷한 내용의 글이,

서신의  앞부분에 본문과 같이 붙어있습니다.

가장 먼저 쓴 편지인, 데살로니카 전서에서부터, 가장 나중의 기록인, 디모데 전후서와 디도서에

이르기까지 이 부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서신 전체의 일관된 진술이라고 보아야 할것 같습니다.

 

2) 바울 자신도 자신의 사도성에 대하여, 당시 교회로부터 12제자가 아니라는 점과 또한 교회를

핍박했던 전력이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었던 것을 알고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서신의 앞부분을 사도성 변호로 보는 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본 서두문은 로마, 고린도, 갈라디아, 데살로니카, 심지어, 목회서신 즉 사도성 논란이 없는,

디모데와 디도서에도 같은 맥락의 인사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디모데와 디도는, 자신의 아들이라 할 정도로 가장 사적으로 허물이없는 관계입니다.

따라서 디모데와 디도에게 하나님의 사도라는 사실을 구차히 변명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13개의 편지를 쓸때마다 번거롭고, 구차하게, 그것도 서신의 첫머리부터, 자신의 사도성이나

변명하고, 의미 없이 인사말을 했겠습니까?

본문은 사도 바울의 사역의 방향과 목표 행동양식을 규정하는 근본 원리로 보는것이 타당하다

고 할수 있습니다. 

1. 먼저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란  내 뜻이나, 내 생각이나, 내 지식이나, 내 가치관에 대한 반대의 개념

이라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믿는다는 것 특별히 사도가 된다는것은 십자가를 지는 일이며 나의 권리를 포기하는 일입니다.

고난과 시련이있고, 추위와 매맞음과 굶주림이 연속적으로 다가오는, 인간의 의지와 생각으로는

그 누구도 걸어 갈수 없는 길 인것입니다.

사도가 된다는 것은, 인간적인 지위를 누릴 수 없고, 가정을 가지고 안락하고, 풍요한 삶을 꿈꿀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생명까지도 내어 놓아야하는 험난한 길 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독하고 슬프고 비참했습니다.

형용 할 수 없을 만큼 아프고, 고통의 고비마다 생과 사의 기로에 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주를 위하여 전에 자신에게 이롭게 여겨졌던, 일체의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이 여겨야만

했습니다. 비천한 자를 얻기 위해서 그 스스로가, 비천해지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 아시아에서 환난을 당하여,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져, 마음에

사형선고 받은 줄 알았다."(고후1:8) 그 때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입버릇처럼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제1차 전도여행 중에, 소아시아 루스드라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고쳤습니다.

앉은뱅이는 걷기도 하고, 즉시 뛰기도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시기하는 유대인들이 왔습니다.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부터 온 그들은, 무리들을 사주하여 돌로 바울을 쳤습니다.

얼마나 매를 맞았던지 바울은 혼절을 하였습니다.

사주를 받아 매를 치던 자들은 그를 성밖으로 내던졌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죽었다고 생각 했습니다.

긴 시간이 흘러, 의식은 혼미한데 싸늘해진 몸 위로 차가운 밤이슬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온 몸 마디 마다 저리고, 아프고 쑤셔왔습니다.

희미한 의식의 끝자락을 붙잡고, 바울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예수님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다.... 고통과 시련이 다가와, 견딜 수 없어 쓰러 질 때마다,

부인 할 수 없게, 그를 괴롭히는 것은 "여기서 그만두자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는

인간적인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도 인간인지라 그의 사도직에, 고뇌와 회의가 없었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굳게 붙잡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서신의 첫머리에 쓰는 것은, 그의 사역에서 경험한 고백적인 증언이,

아닐수 없습니다.

이 길은 인간의 생각이나 힘으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태  26장 38-39절에 나오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예수님의 고뇌를 엿볼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마태 26장 38-39절)

하나님의 자녀로 성도로 부름을 받아 산다는 것, 교회에서 직분자로 봉사한다는 것,

장로나 집사 그리고 권사로 수고 한다는 것에는, 많은 고통과 시련이 있을수 있습니다.

마음에 상처를 받고, 이제 그만 교회를 떠나야하겠다고 마음까지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 있기까지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신자의 삶과 교회생활에는, 상처와 아픔이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과 핍박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수단입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찾고 또 찾아야 할 것입니다.

내 생각 내 뜻으로는, 한 순간도 이 자리에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라는,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 이 말의 반대말은 '내 교회'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이 교회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교회'라고 말하지 않고 강조하여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하는 데에는,

그의 경험이 배경에 깔려 있습니다. 바울은 목회자로서 많은 교회를 세우고 성장시켰습니다.

그 때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라야 한다,는 강한 신념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교회의 설립과 발전에 공이 많아도, 내 것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은 교회를 세우고 목회를 했던 바울이 경험한 교회의 위험성에대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1) 개척교회목회자들의 위험

처음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를 하는 목회자의 의식은, 내가 개척하여 성장시킨 것은 내 것,

내 교회란 의식이 팽배 해 있습니다.

따라서 은연중에 목회자 자신이 교회의 주인이 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모든 권한을 혼자 쥐고서 성도들에게는 무조건 따르도록 강요함으로, 불신과 상처를

주곤합니다. 그 결과 교인들은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라기 보다는, 목사님 교회란 생각을 하게

되어, 교회에 소극적이고 무관심과 냉소적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내 것이요 내 교회이니 남에게 교회를 물려 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야 어떻게 되든 아들이나, 사위에게, 교회를 물려 줘야하겠다는, 발상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대물림은 그중심에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을 부정하고 사유화

하려는, 위험한 의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 공헌도가 있는 목회자들이 갖는 유혹인 것입니다.

 

2.) 기존교회의 위험

교회에 공헌도가 있거나 많은 봉사를 했거나, 오래믿은 사람들 가운데는, 교회 각 부서에서

마치 자신의 교회인 것처럼 행동하고, 큰 기득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때 신입 교우들과 교회기여도가 약한 사람들은 설자리가 없어, 교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냉소적인 교인이 되고 맙니다.

일찍이 몸된 교회를 섬기며 충성해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주인이 되는 교회에는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은혜가 설자리가 없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내 위치가 뭐냐, 또는 내 자리가 어디냐에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서있는 교회 내가 속한 기관, 내가 봉사하는 부서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먼저

고려해야 하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 되기 전에 하나님을 먼저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3. 바울은 '우리' 라고 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의 주' '저희와 우리의 주' '하나님 우리 아버지'등 우리라는 말을 세 번 이상,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서 우리란 개념은, 특별한 것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의 13개 서신 전체에서, 거의 예외 없이 서두에는 우리라는 말이 쓰여지고 있습니다.

 

 

1) '우리의식'란 말의 의미는 세상과 구분되는 새로운 질서를 의미합니다.

'우리'라는 말은, '울타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의 준말 '울'은 '울타리'라는 의미입니다. 

울타리 안과 밖은, 질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라는 말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는 새로운 질서안에 살고있는 사람들이고

또한 새로운 질서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전혀 다른질서에 놓여 있습니다.

교회에 세상의 질서가 들어오면, 교회는 빛을 잃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세상의 질서에 살면서 우리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과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2) 새로운 질서는, 곧 동기의식, 형제의식, 지체의식 입니다.

우리 주님, 우리 하나님이라고 할때에는, 우리 안에 같은 주님과 하나님이 계신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앎이 같다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에 너의 마음에, 사람은 달라도 지식이 같다는 것입니다.

같은 하나님이 계신다든지, 앎이 같다는 것은, '우리'를 만드는 중요한 조건이 됩니다.

한 부모 밑에 자식이 10명이면, 그 자녀의 관계는 형제 자매의 관계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동기란, 한 분 부모님으로부터, 생명을 나누어 받은 같은 몸이라는 의미입니다.

동기가, 동기일 수 있는 것은 단 한가지 조건하에서 이루어 집니다.

자녀들의 가슴속에 같은 부모가 있다는 것이며, 같은 몸이기 때문에 서로 아픔을 함께 나눌수

있습니다. 서로 허물을 감추어 주고 서로 위로를 하며 서로 돕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계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3) 새로운 질서란 자기부정의 질서이며, 서로 낮아지고 작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모든 것이 서로 강함을 추구하고, 낮음을 싫어하고 높음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인류의 시선을, 정반대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구유에 탄생 하심으로서, 인간의 시선을 아래로 돌려놓은 것입니다.

교회 울타리 안에서는 강성의 추구나, 자기과시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란 강한 사람이 둘 모여서 만드는 우리가 아닙니다.

상대방에게 자신을 낮추고, 자신을 부정하여, 약한 사람이되어 이것이 모여서 우리가 됩니다.

바울은 자신을 죄인의 수괴, 세상의 만삭되지 못한 나라고 했습니다.

모든 자 보다 더 작은 나, 지극히 작은 나, 만물의 찌꺼기 배설물과 같은 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부정하고 세상의 강함을 버려 '우리' 라는 새로운 질서에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이러한 자기부정의 신질서는, 이 세상에는 없는 것입니다.

4) 새로운 질서란, 진정한 동역자의 질서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큰 자입니다. 

본문에도 '바울과 그리고 형제 소스데네'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둘의 관계는 동격입니다.

그 외에도 바울은 많은 서신에서, 자신과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함께 나열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로마서 16장에는 35명 이상의 사람들을 언급하면서, 나의 형제 동역자로 부르며,

일일이 그 공로를 밝히고, 문안과 감사를 드릴것을, 로마교회에 당부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거론된, 여러 사람의 비중은 분명히 다르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의 영광을 위하여, 그자신이 그들과 같은 열에 서기를

원하며, 기꺼이 형제요, 동역자의 관계에 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사는 우리의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서있는 부르심의 자리에서, 아무런 의미 없이 서 있어서는 안됩니다.

바울 사도와 같이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길 원합니다.

바울의 삶 안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의 교회가 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