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10:13)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Everyday, people who encounter miracles,,,

** 생수의 강

근심하지도 말라(누가 12장 27-31절)

Andy1954 2024. 3. 31. 06:05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에게 “근심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바로 뒤에서는 우리에게 “무서워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12장 22절,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누가 12장 29절,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누가 12장 32절,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

하시느니라

 

이 땅에 사는 세상 백성들은 늘 염려하면서, 근심하면서 살아갑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삶에 대한

무서움과 두려움이 시시때때로 찾아옵니다. 왜냐하면 이 각박하고 험악한 세상에서, 그들은 자기

들의 삶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고, 근심하지도 말고, 무서워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와 같은 부정적인 생각들을 다 떨쳐버리고, 예수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늘 즐거워하며,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염려, 근심, 무서움 등의 부정적인 생각들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때문입니다. 하나는 우리의 무지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의 믿음이 작기 때문입니다.

 

먼저, 무지에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돌보심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도 깨달아야 합니다. 

이같은 깨달음이 없을 때 우리는 우리의 무지로 인해서 부정적인 생각들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누가 12장 22-23절 말씀을 보면,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목숨과 몸을 주셨습니까? 먹고 즐기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입고 뽐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고 주셨습니다. 

우리가 먹고 입는 문제로 인하여 염려하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12장 24절을 보면,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까마귀는 부정한 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까마귀조차도 길러주십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그 자녀인 우리를 돌보지 아니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12장 25-26절에,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우리가 아무리 염려한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단 한 순간도 연장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은 오로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깨닫지를 못할 때 쓸데없이 염려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돌보심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깨닫지 못할 때, 부정적인 생각들이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염려하며 근심하는 것은 한 마디로 우리의 무지 곧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같은 사실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염려와 근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습니까?

세상 사는게 무섭고 두렵게 느껴지십니까? 그것은 우리의 믿음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크지 못하고 작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돌보심과

하나님의 주권을 알지 못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면서도 믿지 못하는 것은 더 큰 문제가 아닐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시간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 가운데는 믿음이 작다고 예수님에게서 책망을 받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해서 염려하지 말고, 근심하지도 말고, 무서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도리어 예수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범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의 믿음이 크다고 예수님에게서 칭찬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어야 합니다(27~28절).

예수님은 우리에게 먹고 입는 문제로 인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두 가지의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신다는 사실을 설명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오늘 본문 앞에 있는 24절에서 공중의 새들을 예로 드셨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예수님은 특별히 까마귀를 예로 드셨습니다. 

 

또, 오늘 본문에서는 들의 풀들을 예로 드셨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예수님은 특별히 백합화를 예로 드셨습니다.  

누가 12장 27절을 보면,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우선 여기에 “백합화”라고 번역된 단어가 나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백합화와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28절에서 백합화를 가리켜서,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이라고 칭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설명하시기 위해서, 먼저 새들 가운데서 부정한 새인 까마귀를 예로

드셨습니다. 곧 이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설명하시기 위해서, 꽃들 가운데서도 들에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들풀을 예로 드신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 어떠한

들풀도 꽃을 피우기 위해서 실을 만들거나 천을 짜는 법이 없습니다. 

들풀은 자기의 꽃이 너무 크다고 해서 그것을 잘라내는 법이 없습니다. 

또한, 자기의 꽃이 너무 작다고 해서 그것을 깁는 법도 없습니다.

어제는 노란 꽃을 피웠으니까, 오늘은 무슨 색깔의 꽃을 피워야 하지? 

어제는 동그란 꽃을 피웠으니까, 오늘은 어떤 모양의 꽃을 피울까? 

남들과는 모양이나 색깔이 좀 달라야 할텐데.... 등등 들풀은 이같은 염려를 전연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풀은 언제나 아름답게 잘만 꽃을 피웁니다. 

 

예수님은 들꽃의 아름다움을 설명하시기 위해서, 솔로몬이 입은 옷과 비교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 가운데서, 가장 많은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왕이었습니다.

왕상10장4-5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스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모든 지혜와 그 건축한 왕궁과

그 상의 식물과, 그의 신하들의 좌석과, 그의 시종들이 시립한 것과 

그들의 관복과 술 관원들과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는 층계를 보고 크게 감동되어"

스바의 여왕은 솔로몬의 신하들이 입은 관복을 보고서도 크게 감동했습니다. 

그러니 솔로몬이 입은 옷은 얼마나 영화로웠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들꽃이 오히려 솔로몬의 의복보다도 더 훌륭하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사람이 입는 옷은 아무리 잘 만들어도 기운 곳이 있습니다. 

몇번 입고 나면 구겨집니다. 또한 아무리 염색을 잘해도 시간이 흐르면 물이 빠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꽃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꽃들은 그 자체로 완벽합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현미경을 통해서, 사람의 의복과 꽃잎을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더욱더 현저하게

나타납니다. 사람이 만든 옷은 그 조직이 조잡하고 디자인도 엉성합니다. 

그러나 꽃잎의 조직은 그렇게 정교할 수가 없고, 디자인도 그렇게 세련될 수가 없습니다.

요즘은 기술이 발달해서 육안으로는 식별이 잘 가지 않을 정도로 조화를 잘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아무리 정교하게 만든 조화일지라도, 현미경을 통해서 보면 생화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조잡합니다. 생화가 가진 세련됨은, 오직 하나님만이 만드실 수 있습니다. 

 

누가 12장28절 말씀에서,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

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식은 떡입니다. 밀이나 보리의 가루로 반죽을해서 떡의 모양을 만듭니다. 

그리고는 화덕에 올려놓고 구워서 그것으로 주식을 삼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궁이”는 바로 이 화덕에 땔감을 집어넣는 곳을 뜻합니다.

화덕은 진흙으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들고 운반할 수 있는 크기로 만들었습니다. 

화덕의 땔감으로는 곡식의 겨가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로 들에서 거두어 온 마른 풀들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에는 곳곳에 마른 풀들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지중해에 인접해 있기 때문에, 전형적인 지중해성기후를 띠고 있습니다. 

비는 겨울철에만 내리고 여름철에는 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름철에는 뜨겁고 건조합니다. 

게다가, 여름철에는 동쪽과 남쪽에 자리한 사막에서 강한 열풍이 불어옵니다.

시편 103편 15-16절 말씀에,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기에서 말하는 바람이 바로, 이스라엘의 동쪽과 남쪽에서 불어오는 강한 열풍을 뜻합니다.

이 열풍에 이스라엘의 들풀들은 쉽게 마르고 시듭니다. 그래서 들에만 나가면 얼마든지 마른

풀들을 구해서 화덕의 땔감으로 사용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들풀은 오늘 있다가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집니다. 그만큼 들풀은 수명도 짧고,

또한 천하게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런 하찮은 들풀조차도 아름답게 입히십니다. 

하나님은 들꽃을 솔로몬의 옷보다도 더 아름답게 피우십니다.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신부들입니다. 

그러니 왜, 하나님이 우리를 입히시지 아니하시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어떤 염려나 근심이 있다면 들의 꽃들을 생각하십시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조차도, 하나님은 아름답게 입히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의 자녀인 우리도 잊지 아니하시고 돌보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염려하거나 근심한다면, 이것은 우리의 믿음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작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 28절 끝 부분에서 염려하며 근심하는 자들을 향하여, 이와 같이 책망

하셨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대상은 무리가 아닙니다. 

22절에서 밝히고 있듯이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을 향하여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여기서 그들을 “믿음이 없는 자들”이라고 부르시지 않고, “믿음이 작은 자들”

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믿음이 작다고 책망하시는 경우가 모두 다섯 번 등장합니다. 

책망의 대상은 언제나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네 번이 모두 마태복음에 기록되었습니다. 

마태 6장 30절,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의복에 대한 염려)

마태 8장 2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목숨에 대한 염려)

마태 14장 31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목숨에 대한 염려)

마태 16장 8절,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음식에 대한 염려)

 

물론 제자들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해야 죽지않고 그생명을 한자라도 더할까,

염려하며 근심할 때,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이 작은 자”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우리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니까, 염려하지 말고 근심하지도 말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계속해서 염려하고 근심한다면, 이는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셈입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근심하고, 염려하는 말을

내뱉습니다. 그러니 결국은 같은 입으로 두 말을 하는 셈입니다.

 

로마서 8장 32절 말씀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조차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내주셨습니다.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무엇이 아까우셔서,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지

아니하시겠습니까? 이제는 우리 모두 하나님의 돌보심을 굳게 믿고, 세상의 모든 염려와 근심

에서 자유함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해서 예수님에게서 믿음이 작은 자라고 책망을 받지 말고, 믿음이 큰 자라고 칭찬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어야 합니다(29~30절).

세상 사람들은 헛된 신을 섬깁니다.

그들이 믿는 신은 헛되기 때문에 그들의 필요를 알지도 못하며 그들을 돌보지도 못합니다. 

그러기에 세상 사람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스스로 염려하면서 근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염려하거나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창조하신 만물을, 홀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며, 우리를 항상 돌보아주시기 때문입니다.

누가 12장 29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여기서의 “너희”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는 다음절의 “세상 백성들”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세상 백성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하여 구하며 근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달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고전15장 3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세상 백성들에게는 내세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현세가 전부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먹고 마시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세상 백성들은 육신의 일을 추구하느라고, 그들은 늘 염려하고, 근심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12장 30절을 보겠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우선 여기서 예수님이 지칭하신 “너희 아버지”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면 세상 백성들 곧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의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요한 8장 44절을 보면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이와 같이 세상 백성들의 아비는 마귀입니다. 마귀는 어떠한 존재입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거짓말쟁이 입니다. 

마귀는 에덴 동산에서 거짓말로 사람을 속였습니다. 그리고는 사람을 사망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이와같이 마귀는 악한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마귀는 그를 아비로 삼고 살아가는 세상 백성들에게

결코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악을 행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세상 백성들이 망하지 않고 여전히 먹고, 마시며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태 5장 45절에 그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베푸시는 일반은총 때문입니다. 

세상 백성들은 농사가 잘되면, 자기가 믿는 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은 헛됩니다. 그들이 믿는 신은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그 배후에는 마귀가 있을 뿐입니다. 농사가 잘된 것은 그들의 신이 그들을 도왔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반은총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도 해를 비추어주셨고, 하나님이 그들에게도 비를 내려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일반은총만 있을 뿐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도 없고, 하나님의 돌보심도 없고, 하나님의 은혜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스스로 구하면서 늘 근심에 쌓여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백성들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거나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있어야할 것들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백성들이 믿는 신들은 다 헛됩니다. 그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신들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신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세상 백성들이 섬기는 신들은,

그들의 필요를 알지도 못하고 채워줄 수도 없습니다. 

이와는 달리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그 자녀의 필요를 알 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십니다. 

아버지가 그 자녀의 필요를 채워주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다 채워주십니다.

아버지가 그 자녀를 사랑으로 돌보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돌보십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서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세상 백성들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며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세상 백성들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맙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며, 우리를 사랑으로

돌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말씀하신 대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맙시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모든 것을 아뢰시기 바랍니다. 그리해서 세상 백성들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평강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늘 지키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믿어야 합니다(31절).

세상 백성들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입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스스로 염려하고 근심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세상 백성들과는 다른 삶의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분명하게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십니다. 

하나님에게 모든 주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12장 3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기에 “다만”이라는 단어가 맨 앞에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말의 “다만”은 “오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원문에 사용된 단어는, 앞의 말씀과 대조의 뜻을 나타내는, 접속사입니다. 

그 뜻은 “그러나,” 또는 “오히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세상 백성들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입는 것을 구합니다. 그들은 이와 같은 것들을 삶의 목적

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4장 43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이와 같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사역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승천하실 때까지,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마가 1장 15절말씀입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공생애 시작)

누가 8장 1절 말씀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

하시며"....(공생애 중간)

사도행전 1장 3절 말씀입니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증거로 친히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승천하시기 전)

 

이와 같이 예수님은 힘써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를 삶의 목적으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먼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와 세상 백성들과 대조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세상 백성들의 아비는 마귀입니다.

이 지구상에는 수많은 국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단 두 나라뿐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와 마귀가 왕 노릇하는 마귀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백성들은 마귀의 나라에 속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마귀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이되어, 세상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바라십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계속해서 넓혀나가기를 바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으면, 예수님은 우리를 통해서 우리의

가정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바라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를 통하여 우리의 일터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바라십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밖에 있는 사람들, 곧 아직도 영적으로 마귀의 나라에속한

세상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무엇을 대조해서 말씀하고 계십니까? 

세상 백성들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대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14장 17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세상 백성들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구합니다.

이는 육신의 것입니다. 땅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에게 부요하고자, 땅에 재물을 쌓아 둡니다. 

그들은 어리석은 자라는 책망을 받게 될 것이며 삶에도 염려와 근심이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합니다. 이는 영적인 것입니다. 위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부요하고자 하늘에 재물을 쌓아 둡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우리에게는 염려 대신 평강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근심 대신 희락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세상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육신의 것과 땅의 것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과 위의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부요하고자 재물을 땅에 쌓아 두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고자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믿고 힘써, 하나님의 나라를 구합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구하지 않는

것까지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오늘 본문 끝에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기서 “이런 것들”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입는 것, 그리고 우리의 생명을 더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면, 하나님은 구하지 않은 것들까지도 우리에게 더하십니다.

하나님에게 모든 주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기서 예수님은 “더하시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엇에 더하신다는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구한 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거기에 더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지 않은 것들까지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12장 32절 말씀입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할 때 하나님은 마지못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쁨이십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질 때,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도 동시에 주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는 모든 것이 풍성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 풍성한 대로 우리의 모든 쓸 것도 다 채우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구하면서 살아갑니까? 

우리는 지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구하면서 근심하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이와 같이 책망하실 것입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우리는 여기에

속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돌보심과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목적을 믿읍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믿음에 굳게 서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합시다. 

하나님은 기뻐하시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하지 않은 것들까지도 다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9절 말씀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우리의 삶을 부요케 하실 것입니다, 풍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실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와 복이 우리 모두에게 늘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