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교회가 해야 할, 가장 본질적이고도 으뜸이 되는 사명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수년전에 ‘나이아가라 증후군’ (the Niagara Syndrome)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은, 앤서니 로빈스(Anthony Robbins) 이라는 사람이 쓴,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
Awaken the Giant Within」에 나오는 용어입니다.
그는 인생을 강물에 비유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디로 가겠다는 구체적인 목표도 없이, 그냥 인생의 강물에 뛰어듭니다.
때로는 강줄기가 갈라지는 분기점에 이르러서도, 어디로 갈지를 결정하지를 못합니다.
그렇게 우물쭈물 하다가 그냥 물줄기가 흐르는 대로 따라서 흘러갈 뿐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갑자기 물살이 빨라지고 심하게 흔들리며, 귀청을 때리는 소리에, 번쩍
정신이 들게 됩니다. 바로 눈앞에 나이아가라 폭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제야 한탄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때는 어쩔 수 없이 물과 함께 폭포 아래로 추락해
버리고 맙니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무심히 배를 타고 가다가 나이아가라 폭포에 떨어져 죽는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다고 합니다.
이같이 인생을 사는 사람들 곧 나이아가라 증후군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왜 사는지,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 세상에 자신의 삶을 내어 맡긴 채로 살아
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같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사명은 망각해버린 채, 주일이 되면 교회에 와서
예배만 드리면 그것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이며, 우리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의 마지막 부분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 사랑하는 제자들
에게 말씀하신 내용으로 되어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하늘
나라로 함께 데리고 가시지 않을셨을까요?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들을 이 땅에 남겨 두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그들에게는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세상에 남아서 해야 될 사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명이며, 또한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이기도 합니다,
교회의 사명이 무엇이냐? 하는 물음에 대해서 많은 견해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의 사명이, 친교에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로 초신자들이 가질 수 있는
생각입니다. 이들이 즐겨 인용하는 성경 구절은 요한 13장 35절 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교우들 사이에 서로 사랑을 나누면서,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서로 돕는 것이 교회가 해야 할 사명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사명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이것은 첫째 견해보다는 한 단계 위에 있는 견해일 수도 있습니다. 이 견해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 근거로 에베소서 4장 11-13절 말씀을 근거로, 교회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성도들로 하여금 받은 은사대로 섬기는 일에 힘쓰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또 다른 견해로, 교회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사명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이것은 두번째 견해 보다도 한층 수준이 높은 견해라 할수 있습니다.
이 견해는 교회가 해야 할 사명을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데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창세 전에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예배토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들 세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는 다 일리가 있습니다. 또 나름대로의 성경적 근거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고 존재하게 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다른데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복음을 전함으로서 잃은 영혼을 구원함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은 전도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요한 20장 21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왜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까?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그 이유도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라고 보내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의 본질적 사명은 한마디로 복음을 전하는 일 곧 전도에 있습니다.
사랑으로 교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은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이라고 하기보다는, 교회의 사명을 이루기 위한 준비과정 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교회의 존재목적과 그 본질적인 사명은 전도하는 일에 있음을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권세에 대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해야 할 사명을 주시기에 앞서, 예수님께 어떤 권세가 있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제자들에게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문 16절입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가룟 유다는 자기의 갈 길로 갔습니다. 따라서, 그를 제외한 열한 제자는
갈릴리로 갔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명에 따라 되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전에도 또 부활 후에도,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만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 26장 32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예수님의 무덤에 나타난 천사도 여인들에게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마태 28장 7절 말씀입니다.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곧이어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인들에게 나타나셔서 같은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 28장 10절 말씀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열한 제자는 예수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렀습니다. 본문은 그 산이 어느 산인지를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갈릴리에는 예수님의 사역과 관련된 많은 산들이 있었습니다.
마태 5장을 보면,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선포하신 팔복산이 있었습니다.
또, 요한 6장을 보면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던 산도 있었습니다.
또, 마태 14장을 보면 예수님이 기도하러, 올라가셨던 산도 있었습니다.
또한, 마태 17장을 보면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말씀을 나누시던 변화산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이 명하셨던 산은 제자들이 잘 알고 있는 산이었을 것입니다.
아울러 본문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난 때에 대해서도 말씀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마가 16장 9절 말씀에는 부활하신 당일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
에게 먼저 보이시니.”
같은 날, 예수님은 엠마오 마을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마가 16장 12절 말씀입니다. “그 후에 저희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같은 날 저녁 예수님은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셨습니다.
마가 16장 14절 말씀입니다. “그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그로부터 여드레가 지난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또다시 나타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도마의 의심을 깨끗이 제거해 주셨습니다.
요한 20장 26-27절 말씀입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러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후 약 보름정도가 흘렀을때 갈릴리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즉시 예수님이 명하신 산으로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몇몇 제자들은 디베랴 바다로 가서 고기를 잡았습니다.
요한 21장 1-4절 말씀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
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
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제자들이 고기 잡는 일을 준비하며 정리하는데, 또 닷새 정도가 흘러갔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이 예수님의 명하셨던 산에서 제자들을 만나신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약 20일 정도가 지났을 때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이땅에 사십일 동안 계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3절입니다.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감람산에서 승천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갈리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는데 또 다시 닷새 정도가 걸렸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갈릴리에있는 산에서 제자들을 만나신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후 20일에서
35일 사이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곳에는 몇명이나 있었을까요? 우선 그곳에는 열한 제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또 천사와 예수님에게서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실 것이라는 말을 들은 여인들도 그곳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 외에 그곳에는 예수님을 믿는 다른 제자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장인 고전15장 6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은 일시에 오백여 형제들에게 그 모습을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 때가 그 경우였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승천하실 때도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1장을 보면, 감람산에서 내려와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에 힘쓴 무리의
수는 120명 정도였습니다.
사도행전 1장 12-15절 입니다.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가기 알맞은 길이라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있어 여자들과 예수의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일시에 오백여 형제에게 보이신 때는, 바로 오늘 본문의 경우였을
것입니다.
그 당시 예수님의 대적들은 대부분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갈릴리는, 오백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대적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안전하게 모이기에 적합한 장소였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입니다.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그들은 예수님이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명에 따라서 그곳으로 갔기 때문에,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올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뵈옵고 경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던 날 새벽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이 있는 동산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그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열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무덤이 있는 동산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는 은혜를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그들은 그곳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귀한 사명도 받고 귀한 약속의 말씀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명대로 그들이 그곳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
우리도 이사야 선지자처럼 예수님이 명하시고, 보내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십시다.
우리도 그곳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옵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확실하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뵈옵고 경배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세계 4대 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존경의 뜻을 표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 땅의 통치자 가운데 한 명 정도로 생각하고 경의를 표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주요, 자신들의 하나님으로 경배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그들 가운데는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무엇이든지 사실 그대로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꾸며서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일점 일획도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물론 열한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미 몇 차례 뵈었습니다.
여인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모인 오백여 명의 대부분은 지금 부활
하신 예수님을 처음 뵙게 되는 것입니다. 한 곳에 오백 명이나 모였으니까, 뒤편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습이 분명하게 보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또 그들 가운데는 의심많던 도마처럼 혹은 엠마오 마을로 내려가던 두제자처럼 믿기를 더디하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점을 아시고 그들의 의심을 해소시키기 위해 어떻게 하셨습니까?
본문 18절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예수님은 그들 가까이 나아오셨습니다.
제자들은 좀더 분명하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말씀하시던 음성으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된 제자들은 그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던 모든
의심을 떨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의심하던 그들도 이제는 모두 예수님을 경외하는 마음
으로 예수님에게 경배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물위를 걸어오실 때를 생각해 봅시다. 처음에 제자들은 그가 예수님이신 줄을 몰랐습니다.
유령이라고 생각하면서 무서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물위를 걸어오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
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마태 14장 33절입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마찬가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멀리서 보게 될 때, 의심하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의 모습을 분명히 나타내 보이시며, 제자들이 평소에
익히 들었던 그 음성으로 친히 말씀하실 때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들의 주시오, 자신들
의 하나님으로 경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엎드려 경배하는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에게 주신 권세는 절대적 권세
입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에게 주어진 권세는 전적인 권세입니다.
그 권세는 모든 권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절대적이고도 전적인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병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도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도 사하실 권세가 있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인간세계에서 절대적인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물위를 걸으셨으며 바람과 바다도 잠잠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연세계에 대해서도 절대적인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장차 마귀와 그 사자들을 불붙는 유황못으로 던지실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도 절대적인 권세를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세계, 자연세계, 영적인 세계의 모든 분야에서 절대적이고도 전적인 권세를 가지신
것입니다. 따라서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 했던 말 곧, 자기에게 경배하면 천하를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고 한 말은 참으로, 사악하고 거짓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는 이미, 성부 하나님에 의해서 성자 예수님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명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자신에게 주어진 권세에 대한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곧, 우리들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무런 권세도 없는 자가 명령을 하면 그 명령을 받는 사람이 복종을 하겠습니까?
쉽게 무시해버리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시기 위해 먼저 자신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 곧,
절대적이고도 전적인 권세가 있음을 먼저 밝히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명하시는 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람을 죽이라고 명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을 살리라고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일을 하라고 우리를 명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예수님의 명에 절대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딤전2장 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3장9절 하반부의 말씀입니다.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아무도 멸망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요한 3장16절 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20장 21절 하반부 말씀입니다.“..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명령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마태 28장 19~20절의 상반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것을 가르쳐 지키게하라.”
이 말씀을 “the Great Commission,” 곧 예수님의 “지상대명령”이라고 부릅니다.
본문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지금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서 우리에게 명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 19장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젊고도 부유한 관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영생을 얻는 길이 있다고 보고 예수님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 젊은 관원이 익히 알고 있는 계명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이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러자 그 청년은 어떻게 했습니까? 마태 19장 22절입니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청년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그리스도요 자신을 구원해 주실 자신의 Savior로는 믿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를 거부함으로서 예수님을 자신의 주(主) 곧 자신의 Lord 로,
모시는 일에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혹시 이부자 청년처럼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만을 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참제자가 될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만 바란다면 우리도 부자 청년처럼 이런 저런 사정과 형편 때문에 결국은 예수님을
떠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가 되셔야 합니다.
그리할 때 예수님은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서 우리에게 무엇을 명하셨습니까?
예수님의 지상대명령 속에는 여러 개의 동사가 나옵니다.
그 가운데 주 동사는 “제자를 삼아”입니다. 이것만 명령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외의 동사들 곧 ‘가서’라든지, ‘세례를 주고’라든지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동사는, 모두
분사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들은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을 달성하기 위해 요구되는 조건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내리신 지상명령의 핵심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해야할 본질적인 사명입니다. 물론 교회가 해야할 사명들은 여러 가지입니다.
교회에서는 예배도 드려져야 하고 말씀도 가르쳐야 하고, 사랑의 교제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명들은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가면 더 잘 완벽하게 이루어 질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교회를 이 땅에 존재하게 하시고 우리를 하늘 나라로 불러가시지 않고, 아직도
이 땅에 남겨두신 것은 우리가 해야 할 또 다른 사명, 가장 본질적인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족속으로 예수님의 제자를 삼는 복음 전파의 사명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아니면 그 어떤 족속이라도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따라서 복음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떠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구원을 얻을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고 명하셨습니다.
제자를 삼는다는 것이 무든 뜻입니까? 언뜻 생각하면 “제자”라고 하면 예수님을 처음 믿는 초신자
보다는 좀더 수준이 높은 개념처럼 여겨지기 쉽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실시하는 어떤 특별한 제자훈련이나 양육과정을 거쳐야 예수님의 제자라고
불릴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면 그 순간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 4장 1절 입니다.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님이 자기를 믿고 따르는 자들을 일정기간 훈련시키시고 난뒤에 비로소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
로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구원함을 받으면 그는 그 길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사역에서도 우리는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0~41절 말씀입니다.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그들이 특별한 제자훈련을 받고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된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믿고 구원함을
받으면 그 시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신 말씀의 뜻은 누구에게든지 복음을 전해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함을 얻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은 내용이 마가 16장 15~16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또 누가 24장 47~48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면 그순간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신경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외아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주요, 그리스도로 고백하기 때문에 이미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그 순간 그에게는 귀중한 사명이 주어집니다.
바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야하는 사명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를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 4장 19절 입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우리에게는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사명, 곧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로 삼으신 목적이요, 하나님이 우리를 하늘 나라로
데리고 가시지 않고 아직도 우리를 이 땅에 남겨 두신 목적입니다.
이것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지상명령이기 때문에, 여기에
우리의 이견이 들어가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저 절대적으로 복종할 따름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모든 족속으로 예수님의 제자를 삼기 위해서 해야 할 일들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본문에서 세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마태 28장 19~20절 상반부를 다시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세 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첫째는 가라(go)입니다. 둘째는 세례를 주라(baptize)입니다. 셋째는 가르치라(teach)입니다.
차례대로 살펴봅니다.
첫째는 “너희는 가서(go)”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오는 사람을 기다리지 말고,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아다니는 심정으로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3장 10~11절입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그렇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서 타락했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저희가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니 어서 오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면서 그들이 하나님을 찾았습니까? 아닙니다. 정반대였습니다. 창세기 3장 8~9절입니다.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
시되 네가 어디있느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찾지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의 이름을 부르시며 그를 찾으신 것입니다.
성경의 마지막 장에 있는 계시록 22장 17절입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이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죄인들을 부르시고 찾으시는 분은 언제나 하나님이십니다.
죄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찾아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기도로 찾아갑시다. 전화로 찾아갑시다. 편지로 찾아갑시다. 두 발로 찾아갑시다.
이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입니다.
세례는 예수님과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6장 3~4절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세례를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고, 예수님의 장사되심과 합하며 아울러 예수님의 다시
사심과도 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형편상 세례를 받지 못할 경우도 있습니다.
예컨대 십자가상의 한 강도를 생각해봅시다. 그는 세례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이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명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태 10장 32~3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생각해 봅시다. 믿는 형제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세례를 받지않는 사람이 어찌 불신자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담대하게 고백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례를 받지 않으면 그의 믿음의 순수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례는 교회가 임으로 제정해서 베푸는 예식이 결코 아닙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셨기에, 우리가 그 명령에 순종해서
베푸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복음을 듣고 믿기로 작정한 사람은 그 즉시 세례를 받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몇 곳만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 41절입니다.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행8장38절 말씀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행9장18절 말씀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행10장48절 말씀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행16장33절 말씀 “밤 그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행18장8절 말씀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행19장5절 말씀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행22장16절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죄를 씻으라 하더라”
세례는 우리 믿음의 외적인 표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주님의 제자라면 누구라도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례와 관련해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줄때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이름”이란 단어를 세 번 사용하시지 않고 단 한 번만 사용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과 “아들의 이름”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말씀
하지 않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이름”이라는 단어를 복수형으로 쓰지 않고 단수형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삼위 하나님은 한 이름, 곧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삼위 하나님은 언제나 일체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삼위 하나님이 언제나 일체가 되어 역사 하시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우리들도
언제나 마음과 뜻을 같이해서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인 영혼 구원의 일에 모든 것을 다 바쳐 헌신
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는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번역이 되어있어 “지키게 하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헬라어 원문대로 번역하면 “지키도록 가르치라”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르치라”는 단어에 강조점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요한 14장 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
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성경의 기자들은 성령님의 감동에 따라 예수님이 분부하신 모든 것을
성경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딤후 3장 16~17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이 우리에게 분부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을 부지런히 가르치며 배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본질적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의 모든 시선은 언제나 제자를 삼는 일, 곧 복음을 전함으로서 영혼을 구원
하는 일에 촛점이 맞추어져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약속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마태 28장 20절에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약속임과 동시에 분명한 사실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마태 1장23절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은 임마누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태 18장 20절에서 예수님은 같은 내용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도 또다시 같은 내용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볼지어다”라는 말은 무엇인가 중요한
말씀이 주어질 때,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쓰이는 감탄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중요한 말씀을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는 “내가”라는 일인칭 대명사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명에 순종해서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하늘 보좌에 앉으신 채로 가만히 지켜보고만 계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천사 가운데 하나를 우리에게 붙여주십니까? 아닙니다.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 세세토록
영광과 존귀를 받으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자신의 힘만으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야한다면 우리는 매우 곤혹스러울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친히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은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이제는 땅 끝까지 전파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날은 예수님이 구름을 타시고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시는 날입니다.
옛 하늘과 옛 땅은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는 날입니다.
그날까지 예수님은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과 함께 계십니다.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옵고 경배했던 500여 제자들은 이미 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들과도 함께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그뒤에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든 제자들과도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와도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세상 끝날까지 예수님의 명에 순종해서 복음을 전하는 이들과 함께 하시는 것
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를 통해서 아름다운 전도의 열매가 맺히도록
역사 하십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였던 D. L. 무디는 대규모의 전도집회를 통해서 수십 만 명을 예수님의 제자로
삼은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으로 전도하는 일에도 소홀함이 없었습니다.
그는 하루에 한 사람에게 반드시 복음을 전한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런저런 일을 하느라고 아무에게도 전도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날 밤 그는 잠자리에 들었지만, 그날 해야할 책임을 완수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때문에 잠이
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디는 다시 옷을 입고 거리로 나갔습니다.
그는 밤중에 길거리에 서서 전도해야 할 대상자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앞으로 어슬렁거리면서 다가왔습니다.
그의 입에서는 술 냄새가 역하게 풍겨왔습니다. 그는 술 주정꾼이었습니다.
무디는 그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아시나요?” 그러자 그 술 주정꾼은 화를 내면서 시비를 걸려고 했습니다.
무디는 어쩔 수없이 쫓기다시피 집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로부터 약 3개월 정도가 흘렀습니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무디가 나가보니 예전의 그 술 주정꾼이었습니다. 그 술 주정꾼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날 밤 선생님이 제게 예수님을 아느냐고 물으셨지요?
제가 그 당시에는 술에 취해서 무턱대고 화를 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그 말이 내 귓전에서
계속 맴돌며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선생님, 제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무디는 그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를 교회로 인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복음의 씨를 뿌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 나머지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어떤 불신자가 있습니다. 그는 분명 우리가 전도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음으로 전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 주님,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지금 저는 주님의 명에 순종해서
이 분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합니다. 제가 이 분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보다 주님이 이 분을
더 사랑하시지 않습니까? 저는 단지 주님의 도구로 쓰일 뿐입니다.
그러하오니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께서 이 분의 마음을 여시고, 이 분을 감동시켜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시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변에는 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들이 교회가 해야 할 본질적인 사명은 잊어버리고, 그저 자신들끼리만 모이는
일에 만족을 삼고 있습니다. 우리도 교회가 해야 할 본질적인 사명을 잊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의 본질적 사명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구원하는 일, 곧 전도하는 일임을 잊지 맙시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전도하는 일,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충실할 때,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통해서 반드시 아름답고도 풍성한 전도의 열매를 맺게 하시며 믿고 구원을 받는
자의 수가 날마다 더해 가는 은혜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덧입어 날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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