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10:13)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Everyday, people who encounter miracles,,,

** 생수의 강

달려갈 길을 마치고(딤후4장 6∼8절 )

Andy1954 2023. 12. 16. 12:35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그의 후계자,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일부입니다. 

디모데 후서는,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서신서들 가운데서 가장 나중에 기록된 것입니다. 

이 때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딤후 4장 16절 말씀이 밝히는 바와 같이 이미 사도 바울은, 로마의 황제 앞에서 자신을 변명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렇지만 그 때 사도 바울을 변호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이 세상의 임금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곧 자신이 로마 황제의 판결로, 참수형을 당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로마 황제가 자기의 목숨을 빼앗는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또 아무도 자기를 변호해주지 않아서 자신이 죽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에게 사로잡힌 후 자신의 삶을 예수님께 산 제물로 드리며 살아왔습니다. 

이제 그는 자기의 생명을 예수님께 드리기를 바랐습니다. 바울 스스로 바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아무에게도 허물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면 모든 가식을 벗고 진실해지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도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바라보면서 진실한 마음으로 자신의 후계자

디모데에게 그가 맡은 직무를 다할 것을 간곡하게 당부했습니다.

 

언젠가는 우리도 우리 일생의 달려갈 길을 모두 마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때는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보여준 것처럼 우리도 승리의 개가를 부를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먼저 자신의 현재를 밝혔습니다. 

그런 후 그는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의 미래를 소망하며 바라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의 현재입니다.

딤후4장 6절의 말씀,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오늘 본문은 “전제”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는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드리던 제사법의 일종입니다. 

 

민수기 15장을 읽어보면,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삼 단계로 이루어졌습니다. 

먼저 짐승을 잡아서 번제로 불태워드렸습니다. 

그런 다음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은 소제를 그 위에 뿌렸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번제물과 소제물 위에 포도주를 부었습니다.

 

이 때 마지막으로 포도주를 붓는 것을 가리켜서 전제라고 칭합니다. 

그러니까 맨 먼저 짐승을 번제로 드리고, 그 다음에 기름을 섞은 곡식 가루를 소제로 드리고,

마지막으로 포도주를 전제로 드렸습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 향기롭게 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약 삼십여 년 전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에게 사로잡혔습니다. 

그 때부터 사도 바울은 자신의 직무를 다하기 위해서 자기의 몸을 아낌없이 불태웠습니다. 

말하자면 사도 바울의 삶은 이미 하나님께 번제로 드려졌던 것입니다.

 

그 동안 사도 바울의 몸에는 예수님의 흔적이 많이도 생겼습니다. 

사도 바울은 옥에 갇히기도 많이 했습니다. 매도 수없이 맞았습니다.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사도 바울의 삶은 이미 고운 가루가 되어 하나님께 소제로 드려졌던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자신을 전제로 하나님께 드리기를 바랐습니다. 

마치 붉은 포도주가 제단에 뿌려짐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완결되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자신의 붉은 피를 뿌림으로서 주를 위한 자신의 사역과 삶을 마무리하기를 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을 갖고 있었기에 그에게는 십자가형이 해당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참수형, 곧 목 베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자기가 목 베임을 받을 날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내가 벌써 부어지고”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미 사도 바울에 대한 심리는 끝이 나고, 이제는 판결과 집행만 기다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자기가 전제와 같이 부음이 되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습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 6절 하반부에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자기의 죽을 때를 가리켜 “떠날 시각”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죽을 때가 이미 다가왔음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공항에 가면 각종 항공편의 출발과 도착의 스케줄이 스크린에 떠오릅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떠남은 스크린 상에 나오는 출발과 같은 것입니다.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서 있던 곳을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곧 목 베임을 당할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견지에서 보면, 이는 참으로 참혹한 죽음입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자기의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고통스럽게 생각하지를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죽음을 떠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본시 그는 장막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그동안 여러 곳을 다니며 장막을 치기도 하고 걷기도 했습니다. 

이제 하늘나라에 영원한 장막을 치기 위하여 이 땅에서의 장막을 걷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빌립보서 1장21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말씀했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또한 빌립보서 1장23절에서는 이와 같이 말씀했습니다. 

“내가....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우리도 언젠가는 전제와 같이 부음이 되고 떠날 시각이 가까워질 것입니다. 

그 때에는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죽는 것도 유익하며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사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잊지 맙시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님을 우리 삶의 주가 되시도록 하며,

예수님을 우리의 삶의 전부가 되시도록 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곧 전제와 같이 부음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곧 떠날 시각이 다가올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깊이 명심하면서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우리 각자에게 맡겨진

직무에 열심을 다해서 늘 충성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의 과거입니다.

딤후 4장7절 말씀에,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여기서 사도 바울은 세 개의 동사를 사용했습니다. 모두 완료형입니다. 

“싸웠다. 마쳤다. 지켰다.” 한 마디로 사도 바울은 자기의 직무를 다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아쉬움이나 뉘우침이 없이 자신의 삶을 기쁘게 마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먼저 사도 바울이 싸웠던 선한 싸움을 생각해봅니다.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 사로잡혔습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삼십여년 동안 사도 바울은 줄곧 선한 싸움을 싸우면서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때때로 운동 경기를 예로 들었습니다. 

예컨대, 고전 9장26절 과 에베소서 6장12절 말씀에서와 같이,

그는 경기장에서 선수가 달음질하는 것처럼 땀을 흘리며 열심히 싸웠습니다.

 

또한 에베소서 6장11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군인들의 전투를 예로 들기도 했습니다. 

전쟁터에서 군인이 전투복을 입고 싸우는 것처럼, 그는 여러 대적들과 필사적으로 싸웠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무엇과 싸웠습니까? 사도 바울은 악한 마귀와 싸웠습니다. 

또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도 싸웠습니다.

그는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과 싸웠으며 하나님의 진리에 반하는 율법주의자들과도 싸웠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과도 싸웠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며 허탄한 이야기를 전하는 자들과도 싸웠습니다. 

그리고 그의 지체 안에서 그를 죄의 법 아래로 끌어내리려는 육체의 소욕과도 싸웠습니다.

 

이같이 사도 바울의 싸움은 내가 잘났고 너는 못났다는 식의 수준 낮은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내가 높고 너는 낮다는 식의 유치한 싸움을 싸우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나타내기 위하여 싸운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위하여 싸웠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하여 싸웠습니다.

그리스도의 바른 일꾼이 되기 위하여 싸웠습니다.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이 싸운 대의명분은 오로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싸움은 선한 싸움이었습니다.

 

빌립보서 1장30절 말씀과 같이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습니다. 

우리도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전제와 같이 우리가 부어지고 우리의 떠날 시각이 점점 가까워짐을 생각하며 끝까지 힘을 다하여

선한 싸움을 싸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되돌아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달려갈 길을 마쳤습니다. 

그는 자기 앞에 있는 푯대만을 바라보면서 잠시도 쉬지 않고 줄곧 달려왔습니다. 

그리해서 이제 그는 드디어 자기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결승점에 이르렀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3∼24절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했던 말씀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결박과 환난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푯대를 바라보며 줄곧 달려갔습니다. 

 

우리도 달려야 합니다. 힘껏 달려야 합니다. 끝까지 달려야 합니다. 

달려갈 길을 마치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면서 상을 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까지 언제나 달려가는 자세로 우리의 직무를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7절 끝 부분에 있는 말씀입니다. “믿음을 지켰으니.” 

아무리 선한 싸움을 싸우고 아무리 달려갈 길을 마쳐도 믿음을 잃어버리면 소용이 없습니다.

구원은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것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을 지키지 않았더라면 율법주의자들의 핍박을 받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로마의 황제 네로 앞에서 믿음을 지키지 않았더라면,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건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언제 어디서나, 그의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믿음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의 믿음은 결코 주관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지킨 믿음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믿음이었습니다. 

 

로마서 10장17절 말씀과 같이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야 합니다. 왜 우리가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달려가야 합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고후2장17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하지 않고 세상의 허탄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기는데, 허탄한 이야기를 들어서 믿음이 생기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람들의 심령을 거듭나게 만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바로 앞에 있는 딤후4장 1∼2절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같이 당부했습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세상의 허탄한 이야기를 들어서는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명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바른 믿음을 갖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 세상을 떠날 시각이 찾아올때 우리의 삶을 뒤돌아 보게 될 것입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노라” 

우리 모두도 기쁨으로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셋째로, 사도 바울의 미래입니다.

딤후 4장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사도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달려갈 길을 마쳤습니다.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말하면 사도 바울은 경기에서 승리한 선수가 된 것입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이제 그는 재판장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재판장은 그의 머리에 면류관을 씌어줄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목에 메달을 걸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자신이 받을 면류관을 “의의 면류관”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면류관은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받을 면류관은 의로운 판결에 따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법정에서는 심리가 이루어지며 변호도 하고 증거물이 제시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판결이 내려지기도 합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로마의 원로원에서 불의한 판결을 받았습니다. 

 

고후5장10절 말씀과 같이 장차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는 결코, 불의한 판결이 내려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기에 그 곳에서는 의로운 판결만 내려집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행위뿐만 아니라, 마음에 숨겨둔 것까지도 완벽하게 다 아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심판에는 잘못이나 실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행한 대로 심판하시며 우리에게 상을 내리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누구에게 의의 면류관이 주어진다고 말씀했습니까?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바울뿐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의의 면류관은 주어질 것입니다.

 

성경에는 세 종류의 심판이 나옵니다. 

첫째, 분리되는 심판입니다. 곡식과 가라지가 분리되고, 양과 염소가 분리됩니다. 

둘째, 벌 받는 심판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가, 받는 심판입니다. 

셋째, 상 받는 심판입니다. 성도들이 충성한 대로, 보상받는 심판입니다.

 

자연히 자기의 직무를 다한 사람은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할 것입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사람은 상받을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부끄럼이 없이 주 앞에 서실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미 지나간 과거는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제부터 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남은 생애가 시작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선한 싸움을 싸웁시다. 힘껏 달려갑시다. 믿음을 지킵시다.

 

그리해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

우리 모두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께서 주시는 의의 면류관을 받아쓰기를 바랍니다. 

아울러서 그 때 하나님의 칭찬과, 예수님의 상과, 성령님의 위로를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