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10:13)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Everyday, people who encounter miracles,,,

**용서·빌레몬서

사랑을 인하여 (빌레몬서 8-14절)

Andy1954 2023. 1. 30. 04:45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저를 돌려 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어떤 여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믿음이 참 깊은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남편은 교회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께 자기의 남편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 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이었습니다. 이른 아침에 남편이 뜻밖에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보, 나 오늘 당신하고 교회나 한 번 가볼까 하는데 괜찮겠소?”

그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아, 이제야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서둘러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교회로 나섰습니다.

가면서도 마음 속에는, 내내 이런 생각만 했습니다.

“오늘 목사님께서 무슨 말씀을 주실까?

이왕이면, 교회에 처음 나오는 남편을 위해서, 좀 적절한 말씀을 주시면 좋겠는데…”

드디어 교회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얼른 주보를 받아서, 본문이 무엇인지 찾아보았습니다.

창세기 5장의 말씀이었습니다. 성경을 펴서, 창세기 5장에 어떤 말씀이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족보 이야기만, 지루하게 반복되어 있었습니다. 

“누가 몇 살에 누구를 낳고, 몇 년을 더 살다가 몇 살에 죽었더라.”

그는 가슴이 덜컹했습니다. 남편이 교회에 처음으로 나왔습니다.

이왕이면, 예수님을 잘 믿으면, 하나님의 복을 받아, 삶이 형통할 수 있다는, 좋은 말씀을 주시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지겨운, 족보 이야기만 잔뜩 써있으니까, 마음에 실망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성령께서 남편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시기를 바라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내내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를 다 마치고 나오면서, 뜻밖에도 남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이왕 왔으니까, 등록을 하고 가야 되겠지. 가서 등록합시다.”

그는 너무나 놀랐습니다. 그래서 바로 등록을 했습니다. 집에 돌아왔습니다.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 듯이 그는 남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여보, 내가 듣기에는 오늘 목사님의 설교에 특별한 내용이 없었던 것 같던데,

어떻게 당신의 마음이 움직여서, 등록할 결심까지 하게 되었어요?”

그러자 남편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목사님 설교를 듣다보니까,

옛날 사람들이 꽤 오래 살기는 살았더구먼. 그러나 결국 그들도 다 죽었잖아. 

그런데 ‘죽었더라,’ ‘죽었더라’고 하는데, 그 말이 내 귀에는 ‘너도 죽어!’라는 말로 들리는 거 있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나는 아직도 죽을 준비가 안되었거든.

그래서 이제라도 믿기로 작정하고, 죽을 준비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등록을 하게 된거야.” 성령께서 남편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늘도, 우리의 마음도 감동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무슨 말씀을 주시든지, 그 말씀에 순종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풍성히 누릴 수 있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히 9:27의 말씀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감히, 피할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우리는 이 세상을 다 떠나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맺힌 것은 다 풀어버리고 가야지, 미결 인생으로 가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빌레몬처럼 용서할 것은 용서하고, 또 오네시모처럼 용서받을 것은

용서받아야 합니다. 풀지 못하고, 맺힌 채 가게 되면, 얼마나 마음이 찜찜하겠습니까?

이 땅에서 풀어야,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예수님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남은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기 위해서, 맺힌 것은, 속히 풀어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인 윤동주의 「서시」를 기억하실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 죽어가는 존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속상하게 했던, 나의 오네시모도, 죽어가고 있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내가 상처를 주고, 마땅히 용서받아야 할, 나의 빌레몬도, 실은 죽어가는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잠시 잠깐후면, 육신의 장막을 벗고서, 하나님 앞에 다 서야 합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억울한 일이, 무엇이 그렇게 많겠습니까?

우리가 용서받지 못할 만큼, 체면 차릴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시인 윤동주의 결심 그대로, 우리도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빌레몬서 8-14절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빌레몬서는, 한 가정의 실제적인 문제를 통해서, 용서의 정신을, 너무나도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묘사해 주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 빌레몬을 사랑하는 마음, 또 오네시모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둘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고, 화평케 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빌레몬을 향한, 사도 바울의 사랑입니다.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우리가 지난 시간에, 빌레몬을 향한 바울의 칭찬을, 6가지로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그에게는 주 예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둘째,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셋째, 그에게는 믿음의 교제가, 있었습니다.

넷째, 그는 선을 실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섯째, 그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여섯째, 그는 성도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빌레몬은, 훌륭할뿐 아니라, 하나님을 잘 섬기는,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러므로 바울은 얼마든지, 사도적인 권위를 가지고, 그에게 명할 수가 있었습니다. 

“오네시모를 용서해라!” 그렇게 명했더라도, 빌레몬은 바울의 명에 순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적인 권위로 빌레몬에게 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했습니까? 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바울은 자기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그리고 빌레몬 앞에서 간구하는 자세를 취했습니다.

“이러므로”가 “도리어”로 바뀌어졌습니다.

“명할 수 있으나”가 “간구하노니”로 바뀌어졌습니다.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그렇게 바뀌어지게 했습니까?

“사랑을 인하여.” 사랑은 교만치 않습니다. 사랑은 겸손한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을 지극히 사랑했기에, 그 앞에서 자기 자신을 낮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빌레몬을 지극히 사랑했기에, 빌레몬도 자기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레몬의 마음에 있는 사랑에 호소하기 위해서, 자기가 지금 처해 있는 입장을

두 가지로 밝히고 있습니다. 9절 하반부입니다.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첫째,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입니다. 자기는 지금 늙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입니다.

지금 자기가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바울의 나이는, 50대 후반이나 60대 초반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실제 나이보다도, 더 들어 보였을 것입니다.

오랜 선교여행과 이런저런 핍박들, 또 오랜 감옥 생활로, 그는 실제적인 나이보다도

더 들어보였을 것입니다. 게다가 노년에 평안히 지내지 못하고,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빌레몬의 눈에서는, 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졌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빌레몬에게 있어, 사도 바울은, 그의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바울 때문에,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지 않습니까?

자기 생명의 은인이, 나이도 많은 가운데, 평안히 거하지 못하고, 지금도 로마의 감옥에 갇혀

고생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그의 마음 속에서 절로, 동정심이 끓어올랐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에게 어떠한 것을 청한다 할지라도, 내가 거절해서는 안되겠구나!”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간구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10절 말씀입니다.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오네시모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래서 “갇힌 중에서”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오늘날의 교도소의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사도행전 28장 30∼31 절을 찾아 보십시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요즘 교도소는 무료로, 먹여주고 재워줍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 돈을 주고 셋집에 유했습니다.

바울에게는 로마의 시민권이 있었습니다. 특혜를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는 감금된 상태입니다. 마음대로 자유롭게 여행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영접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때 오네시모가 찾아온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자기 주인 빌레몬을 통해서, 이미 바울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해서 오네시모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0절에서, 그가 오네시모를 낳았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다 오네시모는 비천한 노예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오네시모를 가리켜서, 자기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오네시모를 위해서, 바울은 빌레몬 앞에서, 자기를 낮추면서 겸손하게,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바울이 빌레몬을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의 마음을 조금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한 마디 한 마디 신중히 이어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생각없이 불쑥 말했다가, 그것 때문에, 남의 마음에 상처를 입힐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가 조금 참았어야 했는데… 왜 저런 말을 했을까?”

뉘우치면서, 우리 자신들이 괴로워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교만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말 한 마디라도,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한 마디 한 마디, 신중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오네시모를 향한, 사도 바울의 사랑입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어떻게 사랑했습니까? 11절 말씀을 보십시다.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가, 전에는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무익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뜻이 공교롭게도 “useful,” 곧 '유익하다' 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전에는 자기 이름 값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빌레몬은 훌륭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가 까닭없이, 자기의 종 오네시모를, 학대하고 괴롭혔다,고는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네시모는 자기의 훌륭한 주인을 배신했습니다. 

을 훔쳐 달아나 버렸습니다. 오네시모는 손해를 끼친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곁에서 충성스럽게, 뒷바라지를 해 주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믿어주었습니다.

“저 놈이 왜 저러지? 전에는 자기 주인 빌레몬의 돈을 훔쳐서 달아나더니, 이제는 내게서

무엇을 훔쳐 달아나려고 저러나?”  바울은 그런 의심의 눈초리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보는 그대로의 오네시모를, 믿어주고 인정해 주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바울은, “오네시모가 내게 유익한 것처럼, 너에게도 유익할 것이다!”라고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칭찬해 주었습니다.

이 전에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유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정으로, 그의 주인 빌레몬을 위해서 충성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는 단순히 종으로서가 아니고, 의 주인 빌레몬에게 유익을 주는,

인물이 될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보십시다. “네게 저를, 돌려 보내노니.”

오네시모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법적으로는, 빌레몬의 종입니다. 빌레몬의 용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용서를 받기 위해,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내 심복이라”고 했습니다. 

“오네시모가 나를, 충성스럽게 잘 섬기고 있는 것처럼, 이제는 너에게도, 심복이 되어서 충성스럽게

잘 섬길 것이다!”라고 칭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대인관계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을 인정해 주고, 믿어주고, 칭찬해 줍니까?

그렇지 않으면, 비난하고, 욕하는 일에, 더 열심을 내지는 않습니까?

바울은 빌레몬도 사랑했습니다. 오네시모도 사랑했습니다.

우리도 이 사람을 생각하면 감사하고, 저 사람을 생각하면 기뻐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만 생각해도 원망스럽고, 저 사람만 생각해도, 분통이 터지지는 않습니까?

그것은 그만큼, 우리의 마음에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오네시모가 전에는 잘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무익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얼마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익한 존재로, 바뀌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믿어주고, 인정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내게 좀 부족한 듯,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어주고, 칭찬해 주고, 격려해 주면, 실제로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피그말리온 효과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피그말리온 효과를 잘 이용하셨습니다. 

수제자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엄벙덤벙하고 실수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에게, 새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베드로,” 곧 반석이라는 뜻의 이름이었습니다. 그의 성격과는 잘 맞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가 실수할 때도, 부족할 때도, 베드로라고 불러주셨습니다. 

과연 베드로는,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부인하기도 하고, 예수님을 떠나서 갈릴리 바다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십자가에서 거꾸로 순교 당하는, 반석과 같은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의 오네시모가 잘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전에는 잘못했지만, 본심은 그렇지 않겠지, 이제는 달라졌겠지,  

바울처럼 넉넉한 마음으로, 인정해 주고, 믿어주고, 격려해 주고, 세워주고, 칭찬해 줄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바울은 선한 일을, 억지로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강요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선한 일이라도, 그 자체가 사랑이 되지는 않습니다. 

억지같이 아니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의로 할 때,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바울에게는, 하나의 소박한 꿈이 있었습니다. 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지금 바울은 나이가 많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누군가가 자기를, 도와주어야 할 형편입니다. 

만일 빌레몬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복음을 위해서, 사도 바울의 뒷바라지를 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빌레몬은, 그 자리에 없습니다. 다행스럽게 빌레몬의 종, 오네시모가 그 자리에 있습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을 대신해서, 지금 바울을 잘 섬기고 있습니다. 

오네시모가 바울을 섬기고 있는 것은, 따지고 보면, 빌레몬을 대신하는 일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니 빌레몬은, 그 소식을 듣더라도, 기뻐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 대신에, 오네시모를 자기 곁에 머물러 두어, 복음을 위해서 시중들게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심복같이, 충성스럽게 섬기고 있는 오네시모를, 주인인 빌레몬에게 되돌려 보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4절 말씀을 보십시다.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빌레몬이, 그의 종 오네시모를 용서하는 선한 일이, 억지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의 선한 일이, 자의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결코 강요하지 않습니다. 억지로 무엇인가 이루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마음에, 상처를 줄 수가 있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올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일 것입니다.

억지로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강요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사랑은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주장을 고집하지 않고,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배려하는 것이 바로 참된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마음 속에 주신 사랑을, 우리에게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도 기꺼이 사랑을 인하여 낮아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러므로”를 “도리어”로 바꿀 수 있고, 

“명할 수 있으나”를 “간구하노니”로 바꿀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오네시모가,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잘못을 저질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젠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전에는 무익했지만, 이제는 유익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믿어주십시다. 인정해 주십시다. 세워주고 칭찬해 줄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결코,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내 유익만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세심하게 배려해 주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셨던, 그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 자신이 너와의 관계를 아름답게 맺고, 

더 나아가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피스메이커(Peacemaker)로서, 화평케 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