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10:13)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Everyday, people who encounter miracles,,,

**용서·빌레몬서

나의, 오네시모를 용서하자.( 빌레몬서 1-3절 )

Andy1954 2023. 1. 16. 10:19

 빌레몬서는, 여러 면에서 특이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우선, 바울의 서신서들 가운데서, 가장 짧습니다, 단 한 장, 25절로, 되어 있습니다. 

빌레몬서는, 바울의 옥중서신 가운데서 유일하게, 개인에게 보낸, 서신이기도 합니다. 

또한, 다른 옥중서신들처럼, 교리적인 문제를, 다루지는 않지만, 

빌레몬서는, 매우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인은, 서로 용서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빌레몬서에는 '용서'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지만, 한 가정의 실제적인 문제를 통해서, 

빌레몬서는 '용서의 문제'를, 

너무나도 아름답고도, 감동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교회사적으로 빌레몬서를, 바울이 썼다는 사실에, 도전했던 경우가, 두 번 있었습니다. 

첫째는, 주후 4세기경으로, 빌레몬서에는, 바울의 다른 서신서에서 볼 수 있는, 

교리적인 내용이 없다는 이유로, 바울이 기록했음을, 부인하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교부인, '제롬'이나 '크리소스톰'은 바울을 빌레몬서의 저자로, 입증하였습니다. 

둘째는, 19세기의 튀빙겐 학파에 속하는 학자들인, F. C. Bauer, Van Manen 등에 의해서, 

이의가 제기되었는데, 이들은, 주후 2세기경, 어떤 인물이, 노예 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이 서신을 썼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1절에서, 자신이 발신자임을 밝히고 있으며, 또한, 19절에서도,

그 자신이 친필로, 기록했음도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자기의 신상에 관하여서도, 아래와 같이 소상히 밝히고 있습니다. 

즉, 자기가 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과 (1, 9, 10, 13절), 

빌레몬이 자기에게, 생명의 빚을 진 것이 있다는 사실(19절), 

그리고, 기도를 부탁하고 있는 것(22절), 

그와 함께 하는, 다섯 명의 이름으로 한, 문안 인사(23∼24절) 등을 미루어 볼 때, 

바울만이 말할 수 있는, 내용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서가, 바울에 의하여, 기록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보입니다.

 

2절에는 빌레몬서의 수신자가, 빌레몬, 압비아, 아킵보 및 빌레몬의 집에 모이는,

교회로 되어 있습니다. 압비아가 빌레몬의 부인이며, 아킵보는 아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여튼, 바울은 빌레몬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과, 그리고, 그의 집에서 모이는, 

골로새 교회의, 모든 성도들도 함께 읽고, 그 속에 있는, 교훈을 받기 원했음이, 틀림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빌레몬서도, 다른 옥중서신들(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과 마찬가지로, 

바울이 로마 감옥에, 1차로 연금되어 있을 때, 기록한 것으로, 그 시기는, A.D. 61∼63년경으로,

추산됩니다.

사도행전 28장 30∼31절 말씀을 보게 되면, 바울은 이때, 비교적 자유로운 연금 상태로,

셋집에 유하고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뭇사람의 방문을, 접할 수 있었는데, 

그를 찾아온,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오네시모'였던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으로서, 로마로 도망쳐온, 상태였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오네시모를, 복음으로 감화시켜, 새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네시모를,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오네시모를 위해,

편지를 한 장 써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빌레몬서인 것입니다. 

그런데, 골로새서 4장 9절 말씀을 보면, 두기고가, 오네시모와 함께, 이 편지를 가지고,

빌레몬에게 갔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도망친 노예가 집힐 경우, 그의 생사는 오로지, 주인의 손에, 달려있었습니다. 

노예는, 십자가형에 처해지거나, 살더라도, 그의 이마에는

도망자라는, 라틴어 단어의 첫 문자인 “F”자가, 낙인이 찍혔습니다. 

 

바울은, 예수안에서, 새롭게 변화된 오네시모를,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그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따뜻하게 맞이할 것을,

부탁하기 위해서, 본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바울은 본서를 통해, 모든 기독교인들이, 사랑과 용서의 정신을, 실천하면서 살 것을,

독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바울은 21절에서, “용서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빌레몬이 순종할 것을, 

확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빌레몬서에, 용서와 관련된, 교리가 나오지 않는 것은, 빌레몬이 이미, 용서의 신학적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인들이, 형제를 용서하면서, 살아야 하는, 신학적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1)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도, 상대방을 미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워하는 것은, 곧 살인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마 5: 21∼22).

2) 용서하지 않은 마음으로는,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드릴수 없기, 때문입니다(마 5: 23∼24).

3)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마 6:14∼15). 

4) 우리에게 용서함이 없으면, 우리의 이웃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입니다. (마 18:31)

5)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임을 모르는, 교만한 생각 때문입니다(롬 12: 14, 1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용서는, 우리의 마음을, 자유케 합니다. 또한,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용서받는 사람도, 기쁘고 즐겁지만, 사실은, 용서하는 사람은, 더 기쁘고 즐거운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용서하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은, 우리도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반면에, 마태 18장에 나오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통해, 이미 용서함을 받은 우리가,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신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빌레몬서는, 한 가정의, 실제적인 문제를 통해서, 용서의 정신을,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빌레몬서를 살펴보면서, 

내가 용서해 주어야 할, 나의 오네시모는, 누구인지,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서라도, 나의 오네시모를, 용서해 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은, 빌레몬서의 서두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발신자입니다. 

1절 상반부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빌레몬서를 기록한 사람은, 바울입니다.

빌레몬이, 바울이라는 이름을 보게 되었을 때, 그의 마음에 감격이, 넘쳐흘렀을 것입니다.

바울은, 누구나 인정하는,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그 위대한 사도 바울로부터, 친서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빌레몬의 마음이,

울컥했겠습니까? 말로, 다 나타낼 수 없을 만큼, 감격스럽고, 반가웠을 것입니다. 

 

빌레몬은, 바울로인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빌레몬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준, 믿음의 아버지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에서, 약 3년간 머물렀습니다.

바울은, 그곳에 있는, 두란노 서원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빌레몬의 집은, 에베소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작은 도시인, 골로새에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빌레몬은 부유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따금씩 사업차 큰 도시인 에베소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을 것이며, 그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사도 바울을 만났을 것입니다.

빌레몬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게 되었으며,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빌레몬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사도요, 

또,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 바울로부터, 편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빌레몬의 마음은, 반가운 감격이, 넘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이, 나를 생각할 때, 그 마음속에, 사랑의 정, 따뜻한 마음, 솟구쳐 오를까요?

아니면, 눈살이 찌푸려지는, 모습으로 바뀔까요?

빌레몬이 바울을 생각할 때, 그 마음속에, 엔도르핀이 솟아난 것처럼, 우리도 이제부터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 따뜻함을 주고, 사랑의 정을 불어넣어 주고, 엔도르핀을 솟구치게 하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다른 서신서에 보면, 자신을, 사도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각 교회에, 편지를 할 때마다, 사도적인 권위로서, 말씀을 전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지적하고, 잘못된 것을 책망하고, 또, 그들을 교훈하기 위해서는,

사도적인 권위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자신을 사도라고 칭하고 있지 않습니다.

자신을, 무엇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된 바울.” 

지금 바울은, 로마의 옥중에서, 빌레몬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옥중에서, 네 권의 서신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기록했습니다.

이 네 권을, 우리는 일명 '옥중서신'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바울은 왜, 빌레몬서에서는, 자신을 사도라고 칭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된 바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까?

아마도, 이런 의도가, 숨겨져 있지 않았을까 생각되어집니다.

“빌레몬아! 내가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가 되었다면, 내가 지금, 너에게 부탁하는 것을, 

너도,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들어주리라 믿는다.”

 

지금 바울이, 빌레몬에게, 부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의 종, 오네시모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이 었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는, 자기 주인을 배반했습니다.

주인의 돈을 훔쳐서, 달아났습니다. 골로새를 떠나서, 큰 도시인 로마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사람들이 많이 사니까, 거기서 파묻혀 살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속에, 로마의 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감화를 받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네시모는 옥중에 있는, 사도 바울의 뒷바라지를, 극진히 잘해 주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자기 곁에서, 자기에게 수종 드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레몬의 승낙이 없이,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이 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되돌려 보내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편지를 한 장, 써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빌레몬서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옥에 갇혀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는 순교했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오네시모가, 누구이든지 간에, 나의 오네시모가, 나에게, 어떠한 짓을 했든지 간에,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기꺼이, 용서해 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18장에 있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해 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 형제가, 내게 지고 있는, 일백 데나리온의 작은 빚을 ,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기꺼이, 용서해 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 내게, 어떤 섭섭한 일을 했다 할지라도, 나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사랑,

곧,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우리도,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편 바울은, 자기의 이름과 더불어서, 또 한 사람의 이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및 형제 디모데는.” 사실 지금 바울의 곁에는, 디모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23∼2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 브라와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디모데만, 자기의 이름 곁에 썼겠습니까?

바울은 디모데를,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믿음의 아들이었습니다.

자기의 영적 후계자로, 삼고자 했을 것입니다.

아울러 디모데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할 때, 바울 곁에서, 동행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도, 바울의 곁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빌레몬은 디모데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레몬과 친분이 있는, 디모데의 이름을, 함께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금 바울이, 디모데를, 무엇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형제”라고 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에 비해서, 나이가 훨씬 어린 사람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의 아들이었습니다.

지식과 경험적인 면에서도, 두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자기의 형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 것입니까? 

“내가 디모데를, 나의 형제로, 대하고 있는 것처럼, 너도, 오네시모를, 종처럼 대하지 말고,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형제와 같이, 대해 주기를 바란다.”

이러한 뜻이, 배어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하나입니다.

믿음의 한 가족들입니다.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 용서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아름다운 신앙의 공동체로서, 함께 천국을 향해, 기쁨으로 전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수신자입니다. 1절 하반부부터, 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1차적인 수신자는, 빌레몬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빌레몬을 소개할 때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또 빌레몬보다도, 나이가 많았습니다.

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바울은 빌레몬보다도, 나이가 많았습니다.

또한 빌레몬은 바울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명령을 내릴 수도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레몬에게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받아주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해 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빌레몬을 가리켜서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 곧 나와 디모데는 너를 사랑한다. 너를 믿는다.” 이러한 뜻입니다. 

 

또 “동역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함께 동역하는 자들이 아니냐?

그러니 이제 너도, 오네시모를, 종처럼 취급하지 말고, 그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동역자로 받아주기를 바란다.” 이런 뜻이 내포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은, 너무나도 따뜻합니다.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이었습니다.

우리도 바울과 같이, 넉넉한 마음, 여유로운 마음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2절에 보면, 또 다른 두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아킵보와.”

여기서 압비아는, 빌레몬의 부인, 그리고 아킵보는, 그들의 아들이라,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아킵보를 가리켜서 “우리와 함께 군사 된”이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군사입니다.

 

골로새서 4장 17절을 보면,“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아킵보는, 그의 아버지 빌레몬의 집에서 모이던, 골로새 교회의

목회자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왜, 바울은 빌레몬 이외에, 그의 부인과 아들의 이름을, 함께 수신자 이름에, 올렸겠습니까?

빌레몬뿐만 아니고, 그의 부인을 비롯한, 그의 온 가족이 다 함께, 오네시모를 용서해 주고,

이해해 주고, 따뜻하게, 맞아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2절 끝부분을 보면,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서가, 온 교회의 교우들 앞에서, 읽히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골로새 모든 성도들도, 이 편지를 통해서, 용서의 정신을, 깨닫게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빌레몬뿐만 아니고, 그의 가족들, 또 그의 집에 모여 있는,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도

모두 오네시모를, 따뜻하게 받아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노예가 도망쳤다가 잡히게 되면,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주인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거나, 다른 형벌로도, 그를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만약, 그를 살려주더라도, 그 이마에, 화롯불을 가지고 “F”자를, 크게 새기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도망자”라는 라틴말(Fugitivus)의 첫 글자입니다. 영어의 “Fugitive”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그와 같이 가혹한 처벌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로서, 빌레몬의 가족들을 비롯한, 모든 성도들이, 그를 형제로, 받아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옛날에 서울의 한 근교에서, 푸줏간을 하는, 나이 많은 백정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백정은, 아주 천대받는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정은 나이가 많아도, 사람들은 그들에게 하대를 했습니다.

어린아이들도 백정에게는 반말을 했습니다. 

하루는 젊은 두 손님이, 그 정육점에 고기를 사러 왔습니다.

첫 번째 손님이,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이! 아무개야, 소고기 한 근만 잘라서 팔아라.”

그러자 그는 공손하게 '예'라고 답한 뒤, 소고기 한근을 잘라 건네주었습니다.

이번엔, 두 번째 손님이 말했습니다.

“여보시게, 박서방! 내게도 소고기 한 근을 잘라주게나.”

그는 이번에도, 역시 공손하게 '예'라고 대답하면서, 그에게도 소고기 한 근을 잘라주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첫 번째 손님보다 훨씬 더 많은 고기를 주었습니다.

그러자 첫번째 손님이, 그 백정에게 불평을 했습니다.

“아니, 똑같은 소고기 한 근인데, 왜 이렇게 크기가 서로 다른 거야!”

그때 주인이 당연하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첫번째 손님의 것은, 아무개가 준 것이고,

두 번째 손님의 것은, 박서방이 준 것이니, 어떻게 똑같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약한 존재입니다. 작은 일에, 상처 받기 쉽습니다.

말 한마디에, 상처 받기 쉬운, 연약한 인간들입니다.

옛말에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말 한마디라도, 남을 배려해 줄 줄 아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가리켜 “형제”라고 말했습니다.

자기는 낮추고, 디모데는 높였습니다. 그런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다른 사람이 나를 생각하면, 반가운 정을 느끼게 되고, 마음속에는, 엔도르핀이

솟구치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축복의 말씀입니다.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복의 근원은, 누구입니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이, 나란히 동격으로, 기록되어 있슴을 볼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위대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면,

하나님과 나란히 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성모독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초자연적인 존재라고 하여도, 하나님과 나란히, 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사람이나 천사나,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은, 다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예수님이 나란히 쓰였다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 다시말하면,

예수님의 본체가,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축복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은혜와 평강”입니다.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은혜는 원인이고, 평강은 결과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자동적으로, 평강이 따라옵니다.

평강을 원하십니까? 은혜를,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축복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입니다.

빌레몬과 그의 가족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온 골로새 교우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오네시모의 과거의 잘못을, 용서해 주고, 따뜻하게 형제로 받아줄,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을, 누리기를 원하십니까?

나의 오네시모를, 용서해 주십시다.

나의 오네시모가 누구이든지 간에, 내게 무엇을 행했던지 간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것이 복 받는 길입니다.

그가 나를, 배신했을 수도 있습니다. 물질적인 손해를, 끼쳤을 수도 있습니다.

도망쳤을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만 생각하면, 속이 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오네시모를 용서해 주어야, 하나님의 복이 내게 임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강철 왕,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원수를 용서할 만큼, 성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라도, 우리의 원수를 용서하고 잊어버리기로 하자.”

 

영어로 '용서'라는 말을 “Forgive”라고 합니다. 이 단어와 비슷한, 영어단어 몇 개를 써서,

용서하는 방법을, 재미있고, 알기 쉽게, 설명한 게 있습니다. 

 

첫째로, “Forbear(참으라)”입니다. 속상하다고 해서, 화풀이한다면, 그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용서는, 참는데서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 뺨을 돌려대고,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을 주고,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가줄 수 있는, 마음을 갖는 것이, 용서의 첫걸음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Forget(잊으라)”입니다.

나에게 섭섭한 일을 하고, 손해를 끼쳤다 할지라도, 과감히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웃집에 가서, 낫을 좀 빌려오너라.”

아들이 가더니, 한참 후에, 빈 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왜 그냥 왔느냐?” 고 물었습니다.

아들은 시무룩하게 대답했습니다. “예, 빌려주지 않던데요.” 거절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뒤에, 그 집에서 삽을, 빌리러 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삽을 가져다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항의를 했습니다.

“아버지! 그들은 우리에게, 빌려주지 않았는데, 우리는 왜, 그들에게 빌려줍니까?”

그때 아버지가 아들을, 책망했습니다.

“아들아, 그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도 빌려주지 않으면, 그것은 '복수' 하는 것이다.

‘그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는 빌려준다’라는 마음으로 빌려주면, 그것은 '증오'라는 것이다.

그 집에서 빌려주었든지, 빌려주지 않았든지, 지난 것은 잊어버리고,

지금 그 집에서 필요하니까, 빌려주는 것이, 용서요, 사랑이란다.

그러니 '용서와 사랑'의 마음으로 살아라.”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갑니까? 복수의 마음으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증오의 마음으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용서와 사랑의 정신으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셋째로, “Forever(영원히)”입니다.

용서는, 내 기억 속에서, 영원토록 말끔히, 잊어버려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물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잘못을 범하면, 몇 번까지, 용서해야 되겠습니까?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뿐만 아니고,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

7 × 70=490번만 용서하고, 491번째는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형제가 자기에게 잘못을 범할 때마다,

수첩에 기록을 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한 번, 두 번…490번까지 용서했습니다.

그런데 491번째 가서 ‘더 이상 못 참아. 더 이상 용서하지 못하겠어!’라는 마음을 가진다면,

그는 처음부터, 용서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처음부터, 그의 마음속에, 이미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던 것입니다.

용서는 기억 속에서, 영원히 그리고 깨끗하게, 잊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오네시모를 용서하라.”

우리는 들은 말씀을 기억하며, 말씀을 지켜,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나의 오네시모가 누구이든, 깨끗하게 용서해 줄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함으로, 마음의 천국을 회복하고, 주님 주시는 은혜와 평강을,

마음껏 누릴 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