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 말씀을 묵상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궁극적인 이유가 베드로전서 1장
9절에 잘 나타나 있는데, 믿음의 결국은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구원받기 위함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영혼이 취해야할 다음 단계가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영화'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와 표적은 '영화' 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가 “함께 영광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영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우리의 몸과 영과 혼이 다함께 구원 받는 것을 의미할 뿐만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완전하고, 영화롭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화롭게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 하기 때문에, 바울은 로마서 5장12-21절
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위대한 교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의 교리'에 대해서 잘 이해해야 하는데, 그것은 '영화'가 우리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 2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되, 자기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서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람은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죄를 짓고 타락했습니다.
타락의 결과는 인간은 자기가 전에 가졌던, 원래의 지위를 상실하고 에덴 동산에서 좆겨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인간세계의 가장 본질적인 비극이며, 인류의 영원한 문제라고 할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런 모양으로 된 것은, 죄를 짓고 타락한 연후에도, 사람은 여전히 자기가 전에 처해
있던 그곳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어떠한 노력으로도 결코 원래의 지위를
회복할 수도 없으며, 전에 있던 그곳으로 돌아갈 수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세상은 야망과 경쟁의식과 질투심과 교만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런것을 통해서 옛날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아직도 착각하고 있는게 오늘의 현실입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5장 41절에서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치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영광을 구하지 아니
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자신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노력으로 '영광'이 성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인간은 원래 '만물의 영장'으로 창조되었으나, 이제는 자기가 다스려야 할 피조물의 희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와같이 아담과 그 후손들에게 불가능했던 그것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물'로서
값없이 주어지게 된 것이라고, 바울이 17절 마지막 부분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그리스도 안에’ 있다 할 지라도 우리는 그것에 대한 맛을 조금 보았을 뿐이지, 아직 '영화롭게'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서 멀리서 그곳을 보고, 그것을 예비하고 있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또한 죄가 우리의 몸에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에,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것이 영원한 '영화의 상태'에 들어가기 위한, 예비 단계인 '성화의 단계'라고 부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현재 위치가 이러하기 때문에,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해 말씀을 통해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14절).
둘째,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양자의 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15절).
셋째,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고 있으며”(16절).
마지막으로, 이제 고난도 함께 받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도들이 '영광'을 말할 때, 동시에 '고난'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17-18절은 '영광'과 '고난'을 연계시켜 말씀을 주고 있음을 잘 알수 있습니다.
“우리의 잠시받는 환난의 경한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것을 이르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바라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이 분명하고 명백한 가르침에도 기독교 역사를 조명해 보면 그리스도인을 넘어지게 하는 가장 큰 거침돌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 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아직도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더 이상의 고난과 시련을 만나지 않을 것이며
현재의 고난과 시련도 머지않아 사라지리,라는 소망과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사탄과 마귀의 모든 궤계와 교활함에 동요하지 않게 하기
위해, 미래에 다가올 영광의 빛에 비추어, 고난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영화와 고난의 문제를 새롭고 놀라운 개념으로 소개하면서, 우리의 영화가 전 우주를 포함하게 될
장엄하고 놀라운 영화의 일부분이라고 하는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온 우주가 그리스도 안에서 영화롭게
되어야 한다,는것이 하나님의 목적임을 인지할수 있다면 그리스도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그것에 참여하게
것이라는 사실 또한 너무나도 자명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한 본질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를 이해하게 되며 특별히 우리
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참고 인내해야 된다,는 권고가 바로 로마서 8장의 주제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영화가 임박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며, 감격과 황홀감을 가지고 그것을 고대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현재의 고난과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한 영광이 서로 관련되어 있음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 들의 복락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행복과 무엇보다도 오늘날과 같은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모습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이 '고난'의 사실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만 되는가?
첫째,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보고 놀라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고난으로 말미암아 동요되지도 말고, 넘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고난 때문에 넘어 지고 요동된다면,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조소하고
비아냥거릴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의 가장 영광적인 삶은 순교라고 여겼으며 ‘순교의 피가 교회의 씨’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고 있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구원의 진리'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고난과 환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의심한다면, 이러한 의심은 우리가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부닥치게 될 것입니다.
사도는 지금 고난과 고통을 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편지의 내용을 살펴볼 때, 상황이 곧 나아지거나 머지 않아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하는 어떠한 암시도
없습니다. 도리어 주님은 자기를 진정으로 따르기를 원한다면, 많은 시련과 고난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보편적인 인류의 위안을 제공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난과 고통을 벗어나 좀 더 행복을 느끼고 소유하고자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24장을 보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여러 모양과 형태의 고난과
환난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고 계심을 알수 있습니다. 또한 디모데후서 3장 1-4절에서의 말씀은 오늘날의
우리 인생들이 어디에다 포커스를 맞추며 살고 있는가를 정확하고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점점 회복되어지기는 커녕 점점 더 죄악과 고통과 악의 처소로 변질되어 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여러 짐승들로 비유될 수 있는 사탄과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탄과 원수들은 이미 활동하고 있으며, 교회는 세속화의 길을 달려가며 진리를 떠나고 있습니다.
교회가 주님의 이름으로 포장된 낙관론과 긍정의 힘을 강조하고 있으나, 이러한 거짓되고 위선된 설교는
성경의 진리를 떠난 것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 기독교에 있어서 중차대한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할수만 있으면, 우리의
고난을 적게하라고 권면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로마서 13장은 그리스도인은 법을 준수하며,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 어떤 방편을 활용해서 고난의 원인들을 제거할 수 있음을 믿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도는 고난을 당했을 때, 그저 체념하라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그것은 체념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우리로 하여금 ‘넉넉히 이기게’ 만드는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도의 가르침을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바울의 가르침은 적극적이며, 승리에 차있는 가르침 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적극적이요, 승리에 차있는 영광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스토아학파나 또는 세상의
다른 종교들이 주장하고 있는 비관주의와 분명한 구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가장 소망 없고 비관적이고 용기를 꺾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뿐입니다.
만일 교회도 자기들의 고통을 잠시 잊기 위한 '도피처'로만 생각한다면 이러한 신앙 또한 그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 바울의 가르침은 성경의 교훈에서부터 나온 것입니다.
“생각하건대”라는 말에 담겨져있는 진리는 “영화에 대한 교리들을 완성하면서 나온 결과로 이러한 필연적인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는 뜻을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고난'을 받음으로 '불행'을 느끼고 있는 그리스도인있다면, 더 깊은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리'로 인해서 주어진 위안은, 그 교리를 깊이 생각함으로 얻어지는 은혜이기 때문에, 설교는 단순히 어떤
위안을 주는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설교는 신자들로 하여금 뭔가를 생각하도록 가르치고, 유도해 주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설교가 혹독한 내용을 담기도 해야 하며, 징책을 해야 하기도 할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거나 틀렸다는 것을 보여 주기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그 교훈이 그리스도인들만을 위한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서, 어떠한 위로도 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교리에 관해서 분명하지 못하면, 사도가 ‘생각하건대’라고 말할 때에, 그 사도의 말을 따라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계신 모든 목적에 관하여, 명백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것들로부터 약속된 위안을 받을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 뿐인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곧 이 말은 앞에서 제시했던 교리들에 비추어서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그것 밖에는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놓여있는 고난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며, 또 어떻게 행동하는가?
사탄, 마귀가 우리를 참소할때 그들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변명만 늘어 논다면 그것은 참된 기독교적인
방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탄, 마귀를 다루는 방식을 생각하고, 이치적으로 따져 보고, 논리적으로 논증해 보고, 믿는 교리들을
꼼꼼히 살펴본 후에, 그리고 ‘생각하건대’ 라고 말해야 할 줄 믿습니다.
그것이 사탄, 마귀를 다루는 방식이며, 고난이나 환난이 주는 시련을 극복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독특한 가르침을 받고 있는데, 그 가르침은 언제나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근본적인 교리'들에 관한, 믿음과 확신의 결과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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