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10:13)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Everyday, people who encounter miracles,,,

**네가 믿으면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고전 4장 1-5절)

Andy1954 2023. 11. 6. 13:51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 가운데 일부분입니다. 

사도행전 18장에 기록된 대로, 사도 바울은 제 2차 전도 여행 때 고린도 교회를 세웠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세웠다는 사실은, 고린도전서 자체도 밝히고 있습니다.

고전 4장 15절 말씀을 보면 바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바울은 일 년 육 개월 동안, 고린도에 머물면서 사역했습니다. 

그 결과 고린도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후에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이었던 아볼로그곳으로 와서,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볼로는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27절 말씀을보면 이것을 잘 알수 있습니다.,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니 형제들이 저를 장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하여

영접하라 하였더니, 저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그 당시 고린도는 아가야속한 도시였습니다.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에서 능력 있게 사역을 했습니다. 

자연히 그곳 교인들 가운데, 아볼로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평소 바울을 추종하던 사람들과, 그들 사이에 마찰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더니 고린도 교회 안에는 그 외에도 다른 파벌들이 생겼습니다. 

급기야 고린도 교인들은 서로 다투며 서로 간에 분쟁을 일삼기 시작했습니다.

고전1장 11-12절 말씀을 보게 되면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물론 고린도 교회에는, 이외에도 여러 가지 문제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교회 안에 이런저런 파벌이 있어 서로 분쟁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컨대 전투할 때를 생각해봅시다. 총은 적군을 향하여 쏘아야 합니다. 

그런데 아군끼리 총질을 한다면, 누가 가장 좋아하겠습니까? 적군일 것입니다. 

영적 전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분쟁하면, 가장 좋아할 당사자는 바로 우리의 대적 사단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 첫머리부터 이 문제를 먼저 

다루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바른 자세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다음과 같이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사역자의 신분(1절) 둘째, 사역자의 요건(2절) 셋째, 사역자의 평가(3-5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맡겨주신 

일에 충성을 다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셈할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큰 칭찬과 큰상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로, 사역자의 신분입니다(The Identity of the Minister).

먼저, 1절 말씀 입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1)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2)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서의 “사람”은 불특정인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는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의 “우리”는 바로 그 앞에 나오는, 바울과 아볼로와 게바를 가리킵니다. 

고전 3장 5절을 보게되면, 바울은 자신들을 가리켜서 “사역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사람이 사역자의 신분을 바르게 이해할 때, 사역자에 대한 태도를 올바르게 가질 수 있습니다. 

아울러, 그 자신도 올바른 자세로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사역자의 신분을 두 가지로 밝혔습니다. 

“그리스도의 일꾼”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입니다. 

(1) 그리스도의 일꾼(Slaves of Christ)

우리말 성경은 여기서 “일꾼”이라는 말로 점잖게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나 원문이 가진 본래의 뜻은 “노예”(slave)입니다. 노예는 매우 낮고 천한 신분입니다. 

이는 높임을 받을 수 있는 신분이 전연 아닙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바울은, 여기서 하나의 특별한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후페레테스”라는 단어입니다. 

본래, 이 “후페레테스”는 노예선의 가장 밑바닥에서, 노를 젓는 사람을 뜻합니다.

옛날의 노예선은 노를 젓는 곳이 이단 또는 삼단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가운데 가장 밑바닥에서 노를 젓는 노예가 바로 “후페레테스”였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노예선의 가장 밑바닥에서 노를 젓는 노예가, 무엇을 내세우며 무엇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자신을 비롯한 모든 사역자들이 그리스도의 노예일 뿐이라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그들의 삶과 사역의 목적은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높이며 그리스도만을 존귀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을 높이고자 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노예들을

높이려고 했습니다. 바울을 높여서 바울파를 만들었습니다. 

아볼로를 높여서 아볼로파를 만들고, 게바를 높여서 게바파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을 높이지 맙시다. 또한, 우리 자신이, 높임을 받으려고, 들지도 맙시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일꾼, 곧, 그리스도의 노예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이고자 하는 마음가짐으로, 섬기며 봉사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Stewards of God`s Mysteries)

바울과 아볼로와 게바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들 이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들을 대단하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비밀을 자기들에게 전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들에게 하나님의 비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사역자들을,

지나치게 높였습니다. 

그래서, 바울파가 생기고 아볼로파가 생기고 게바파가 생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자기들이 높아져야 할 이유가 전연 없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에 불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 “맡은 자”로 번역된 단어가 원래 뜻하는 바는, 청지기입니다.

청지기를 영어로는 스튜어드(steward)라고 합니다. 

그 여성형 명사가 바로스튜어디스(stewardess)입니다. 비행기를 타면 스튜어디스가 있습니다. 

스튜어디스는, 잠시도 쉬지 않고 손님들을 위해 시중을 듭니다. 

음식을 제공하기도 하고 책이나 담요도 갖다줍니다.

그렇다고 해서, 스튜어디스가 자랑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가 손님들에게 제공하는 것은 자기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비행기 회사의 것입니다. 

스튜어디스는 그저 자기가 맡은 것을 전달해줄 뿐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맡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저 그대로 전할뿐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전한다고 해서 그들이 높아질 이유는 전연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고전 9장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조금 전에 말씀 드렸던 노예, 곧 “후페레테스”를 예로 들어서 설명을 해봅니다. 

배 안에서 노예가 열심히 노를 저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노예는 자기를 자랑하거나, 높일 이유가 전연 없습니다. 

노를 젓는 일은, 노예가 부득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노예가 노 젓는 일을 열심히 하지 않고, 태만히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에게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가차없는 채찍질이 가해질 것입니다. 

따라서, 노예는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일을 열심히 감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고린도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럴지라도 바울은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로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복음을 전하는 일은 바울이 부득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만일, 바울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그에게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열심히 노를 젓지 않는 노예에게 채찍질이 가해지듯이, 복음을 전하지 않는 바울에게도, 

하나님의 심판이 주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은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는 여기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도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맡았기 때문입니다.

벧전 4장 10절말씀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은사를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은사를 사용하여 봉사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각 부서에서 열심히 봉사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봉사를 하더라도 우리 자신을 드러내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교회를 섬기는 일은 우리가 부득불 해야 할 일이지, 자랑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낮은 자리에서, 겸손하게 섬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떠한 사역을 하든지 우리 자신을 드러내지 맙시다. 

오직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만을 높이며,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는 우리의 사역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사역자의 요건입니다(The Requirement of the Minister).

이어서, 2절 말씀입니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것을 맡은 자 곧 하나님의 청지기일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가 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가장 필요한, 

요건은 무엇입니까? 물론, 많이 배우면 좋겠지요. 지혜도 필요할 것입니다. 

말도, 어눌한 것보다는 잘하면 좋을 것입니다. 건강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것들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맡은 자에게 요구하시는, 절대적 요건은 오직 한 가지 '충성' 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비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청지기였습니다. 

그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로서 충성하기 위해서 바울은 어떻게 사역을 했습니까?

사도행전 20장20절을 보면 그의 사역의 모습이 나옵니다,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사도 바울은 많이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디를 가든지 자신의 학문이나, 세상 지식을 전하거나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유익한 것 한 가지, 곧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을 전하며 가르쳤습니다.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순수하고 바르게 전했습니다. 

그런데 고후 2장 17절을 보면, 사도 바울과는 달리 자기가 맡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그대로

전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이런저런 것들을 가미하는 자들도 있었음을 볼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그대로 순전하게 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유치한 자기의 이야기나, 세상의 이런저런 허탄한 이야기를 집어넣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자기들의 유식함을 자랑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사람들에게서 인기도 얻고 싶었을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보다도 사람을 먼저 생각했던 것입니다. 

러나 이는 분명 말씀의 사역자로서 충성스럽지 못한 태도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신실한 마음가짐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충성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인기, 명성, 자기 만족, 물질적 유익 등을 바라보면서 섬기는 것은, 자신의 사역을

혼잡케 만드는 것입니다. 

오직,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면서, 순전한 마음으로 각자가 맡은 일에

충성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사역자의 평가입니다(The Evaluation of the Minister).

이어서, 본문 3-5절까지를 보겠습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방금 읽은 말씀에는 “판단”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말의 '비판'이라는 단어와는, 사뭇 다른 뉘앙스를 주는 단어입니다. 

우리말의 '평가'라는 단어와 같이, 중립적 의미를 지닌 단어라고 볼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세 종류의 평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남들의 평가입니다. 둘째, 자기 자신의 평가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이 가운데 절대적인 평가는, 남들의 평가나 자기 자신의 평가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평가뿐입니다.

 

(1) 남들의 평가(Other`s Evaluation)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서 바울파는 바울을 몹시도 칭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볼로파나 게바파는 거의 맹목적으로 바울을 비난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사역하고 있는 자신의 삶을,

고후 6장 4-9절에서 이렇게 밝힌 적이 있습니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negative)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positive)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바울에 대한 평가)

 

바울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곤고한 삶을 살아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이는 negative한 면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꾼이었기에 그가 얻게 되는 유익도 많았습니다. 

이는 positive한 면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흥미롭게도 자기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어떠한 평가를 받고 있는가를 

설명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 반대로 욕을 들을 때도 있었습니다. 

전자는, 바울파에 속했을 것이고, 후자는, 아볼로파나 게바파에 속했을 것입니다.

바울의 이름을 칭찬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바울의 이름을 악평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참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바울을 속이는 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울을, 잘 아는 사람도 있었지만, 바울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사도 바울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달랐습니다. 

사도 바울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문자 그대로, 극에서 극을 달릴 만큼 정반대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취했습니까?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긍정적인 평가나 부정적인 평가에도 큰 비중을 두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평가는 아무래도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만큼 영적으로 성숙하기를 바랍니다.

 

(2) 자기 자신의 평가(His Own Evaluation)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사도 바울의 영적 성숙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일 사도 바울에게 이러한 태도가 없었더라면 그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어쩌면, 그는 다른 사람들을 아예 무시해버리는 고집불통의 사람 오만불손한 사람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평가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가 온전하지 못한 것처럼, 자기 자신의 평가도 잘못될 수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한 가지 실례를 들었습니다.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과거,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었을 때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자기야말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처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과연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그는 하나님과 원수였을 뿐이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똑같은 실수를 더 이상 반복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후 지금까지 복음의 전파자로서 충성을 다했습니다. 

온갖,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도, 변함없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고전 10장 12절 말씀을 보면, 복음을 전하는 그의 자세를 엿볼수 있습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바울은 자신이 선 줄로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늘 넘어질까 조심했습니다. 

그리고, 고후 10장 18절을 보면 우리가 어떤 칭찬을 기대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바울은 의롭다 함을 얻는 것 또한, 자기 스스로를 칭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칭찬해주셔야 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칭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남들이 칭찬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칭찬해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평가(God`s Evaluation)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충성을 요구하십니다. 

따라서, 누가 우리의 충성을 평가합니까? 다른 사람들이 평가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자신의 충성을 평가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의 충성을 평가하십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남들의 평가나 자기 자신의 평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로지 하나님의 평가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또한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That`s none of our business! That`s God`s business! 

우리를 평가하고 심판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남들을 평가하거나 우리 자신을 평가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함부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려고 들지 맙시다. 

스스로 잘했다고 으스대지도 말고, 힘들다고 낙심하지도 맙시다. 

우리를 평가하실 이는 하나님이심을 명심하면서, 맡은 일에 충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청지기이기에, 장차 하나님 앞에서 셈을 해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시는 요소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에 숨은 뜻 곧, 우리가 사역을 하는 동기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우리의 마음에 숨어있는 뜻을 다른 사람들은 알지를 못합니다. 

그러기에 사람의 평가는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뜻을 다 아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평가는 언제나 의롭고 정확합니다.

장차 하나님이 우리를 평가하실 때, 하나님은 우리의 숨은 동기를 평가의 기준으로 

삼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역을 했는가를 따지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어떠한 동기로 사역했는가를 기준으로 우리를 평가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서 사역을 합니까? 

다른 사람에게 잘 보여 인기와 명성을 얻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만족을 누리기 위해서 입니까? 혹은, 더러운 이를 얻기 위해서 입니까? 

만일 우리가 이러한 동기로 사역을 한다면, 하나님은 기뻐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고전10장 31절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사역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순수한 동기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크게 칭찬하시고 우리에게 큰상을 내리실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다시한번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이러한 말씀으로, 끝맺음을 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하나님의 책망을 듣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8장 1절 말씀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칭찬과 하나님이 주실 상만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 누가 큰 칭찬을 받고 누가 큰상을 받을 것인가를,알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 때의 칭찬과 상은 우리가 얼마나 순수한 동기로 맡겨진 사역에 충성했는 가에 따라서

달라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저런, 귀한 사역을 맡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청지기 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겸손하게 각자가 맡은 일에 충성해야 할 것입니다. 

맡은 자에게 구하시는 것은 충성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사역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일 것입니다. 

또한, 우리 자신도 그 어떤 아쉬움이나 부끄러움이 없이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 때,

이는 정말 감사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우리를 평가하시면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칭찬하실 때, 그 기쁨과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이와 같은 칭찬을 받는, 우리 모두의 사역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