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을 가진 사람은,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에 비하여, 여러가지 다른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무신론자보다는, 뭔가, 좀 더 희생적이고, 생활도 모범적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간혹, 신앙은 좋은것 같은데, 개성이 너무 강해서, 납득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써, 이런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가 아는대로, 과학은 반드시 납득할 수 있는, 검증과정을 거쳐서 정립이 됩니다.
반면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한, 종교적인 열심을, 자신의 신앙으로 믿어버립니다.
이러한 결과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기도를 받으셨는지, 안받으셨는지,
이 예배가 바른 예배인지, 거짓 예배인지를,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런 생각을 아시고, 신앙에 안전장치를 해두셨습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자신을 다른 사람의 권위아래, 기꺼이 둔다는 사실입니다.
제1계명이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외에, 다른 신을, 네 앞에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첫번째 윤리계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제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부모를 거역하지 않고, 오히려, 기쁨으로 복종하고, 공경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이렇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그리고 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21절에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성령충만하다는 것은,
자기 만족을 구하지 않고, 자신을 기꺼이 다른 사람의 통제아래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성령충만하다고 하면서, 자식이 부모를 무시하거나, 아내가 남편을 업신여긴다면
이것은 진정으로 성령충만한 것이 아니라,
자기 기분에 취한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 안에는, 종교적인 본능이나 감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지거나, 자기를 덮고 있는 위선적인 탈을 벗을 때,
종교적인 희열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인지는, 겸손의 영을 통하여 검증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후, 시내산 언약을 맺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를, 명령한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하여, 또 새로운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공경한다면, 하나님이 세운 목자인 다윗을,
인정하고, 그의 인도를 따르게 된다는, 안전장치 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다윗의 정당한 통치를 거부하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신앙이 아니요, 거짓이라는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너무나도 은혜를 많이 받은 나머지, 아무도 그를 도울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 적응하지를 못합니다.
그럴때 자신이 받은 은혜를 검증하는 안전장치가 있는데,
그것은 스스로를 낮추며, 자신을 기꺼이 다른 사람의 통제아래 두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되지 않는다면,
그의 기쁨이나 은혜는, 본능적인 종교성의 표출이지,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얼마든지 자기 안에 있는 종교적인 본성을 표출하면서
마치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은혜받은 것을, 정당한 가르침에,
얼마나 잘 복종하고, 받아들이느냐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장치를 주셨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종교적인 열심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더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통제할 수가 없으며, 진정한 겸손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1. 거짓된 마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무성한 포도나무, 라고 부르십니다.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아름다울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귀한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였습니다.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다.
더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잔가지를 치고, 불필요한 것들을 다 버려서, 오직 열매맺는 일에, 열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것은, 제단을 많이 만들고, 주상을 아름답게 장식한 것입니다.
여기서 '열매'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삶을 말합니다.
그들은 계속, 이런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런 노력은 하지 않고, 엉뚱하게 종교적인 열심으로,
열매맺는 것을, 대신해 버렸습니다.
이어서,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저희가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죄를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치시며, 그 주상을 헐으시리라."
여기서 '두 마음'이라는 것은, 의역된 것입니다.
원문에는, '거짓된 마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 거짓된 마음이나 두 마음이나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한 것은, 종교행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희망을 주는, 아름다운 삶의 실천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은 실천하지 않으면서, 제단만 많이 만들고, 주상만 아름답게 꾸몄습니다.
물론 이런 열심이,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일로 보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신앙의 본질이, 실천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화려한 성전 건물을 보면서, 그들의 종교적인 열심을, 부러워합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신앙의 본질임을, 알지 못합니다.
단지 눈에 보이는, 신앙심만 보고, 감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을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것은, 이런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그들이, 참된 실천은 하지 않으면서, 제단을 많이 만들고, 기둥만 꾸밉니까?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와 같은 줄로 알기 때문입니다.
가장 이기적인 사람이, 종교적인 지식이나, 열심으로 , 자신의 욕심을 숨깁니다.
다른 사람이 물으면, 이처럼 대답할 것입니다.
“요즘 저는, 기도하느라고, 다른데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 중에서, 말 못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남모르는 세계에 대하여, 들어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거짓된 마음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신앙이 어려서, 아직 실천할 능력이 없고, 진리를 받아먹어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신앙은 받아먹는 만큼, 남에게 나눠주어야 하고,
하나님께 바치는 만큼, 가이사에게도 바쳐야 하는, 이중적인 과제가 있습니다.
가이사없이, 하나님만 섬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전공 공부는 하지 않고, 성경만 읽고, 신학만 공부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두 가지를, 모두 다 해야 합니다. 하나님도 믿고, 이 세상 삶도, 살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해낼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내 삶에 찾아오셔야 합니다.
2. 이스라엘의 변하지 않는 기질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원하신 것은,
그들이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들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기질이,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확인할 수 있는, 안전장치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누구의 통제나 간섭도, 받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
계속해서 3절 말씀입니다,
“저희가 이제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를 두려워 아니하므로,
우리에게 왕이 없거니와, 왕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리요?' 하리로다."
이스라엘에는, 왕이 있었습니다, 오히려, 왕이 없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왕이 없거니와'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참된 목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단순한 통치자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갈 길을 알지 못해서, 방황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도하는 목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그들이 잘못되었을 때, 바른 길로 이끌 수 있는, 목자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바른 목자들을, 모두 거부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들판에서, 위험한 지경에 있지만,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는 목자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바른 목자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목자를 원하지 않았나요? 왜냐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늘 그들의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힘없고, 가난할 때에는, 그런 말씀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포도나무가, 무성하게 되면, 죄 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마음 속으로 ‘하나님도 별 수 없어' 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 이유는, 죄를 지어도 부자가 되며,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도, 모든 것이 잘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너무나도 똑똑하기 때문에, 왕의 도움을 받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왕이, 자기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지경입니다.
사람들은 돈이 좀 있으면, 교회에서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도우려고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기질을 꺾고, 자기 자신을 기꺼이 다른 사람의 권위아래 둘 때, 진정으로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풍성한 삶이,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사실 율법의 멍에는, 애굽에서, 노예생활하던 멍에에 비하면, 너무나도 가벼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멍에를 거부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 11절 말씀입니다.
“에브라임은, 마치 길들인 암소같아서, 곡식밟기를 좋아하나,
그가 그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메우고, 그의 위에, 사람을 태우리니,
유다가 밭을 갈고, 야곱이 흙덩이를 깨뜨리리라."
이스라엘은 농사를 짓는, 농경 사회였습니다.
그들은 암소를, 다르게 대우했습니다. 잘 길들여져 있는 암소는, 곡식밟는 것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전혀 길들여져 있지 않은 암소는,
목에 멍에를 메워서, 밭을 갈고, 흙덩이를 부수는, 일을 시켰습니다.
곡식을 밟는 암소는, 암소에 대한 대접 중에서, 최고의 대접입니다.
왜냐하면, 곡식을 밟으면서, 먹고 싶은대로, 실컷 먹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곡식을 밟는 암소와, 목에 멍에를 메고, 밭갈고, 흙덩이를 부수는 암소는,
서로 비교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노예였습니다.
목에 무거운 멍에를 메고, 밭갈고, 흙덩이를 부수는,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율법의 가벼운 멍에를 주시고, 서로 사랑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율법의 멍에마저, 귀찮다고 팽개치고, 완전히 자기들의 욕심대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복음은, 사랑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사랑의 멍에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행하지 않고, 사랑의 짐을 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에게, 곡식을 밟는 암소처럼, 귀하게 대접하십니다.
그러나 믿는다는 모양만 가진 채,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고,
자기 욕심과 고집대로 사는 자는, 결국, 다시 노예상태로 돌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복음은,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유를 주셨지만, 이 자유를, 사용하지 않고, 스스로 종이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어서, 4절 말씀입니다,
“저희가 헛된 말을 내며, 거짓 맹세를 발하여, 언약을 세우니,
그 재판이, 밭이랑에 돋는, 독한 인진같으리로다."
'인진'이라는 것은, 밭이랑에 돋는, 독초를 말합니다.
모르고 지나가다가, 인진에 한 번 접촉되면, 정말 고생하게 됩니다.
온 몸에, 부스럼이 돋고, 가려워서, 견딜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의 옻나무를,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옻나무에 한 번 접촉하면, 온 몸에 부스럼이 돋습니다.
이스라엘의 재판은, 공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차라리, 재판을 하지 않는 것이, 나았습니다.
왜냐하면, 괜히 재판을 청구했다가는, 멀쩡한 사람만, 오라 가라 하면서,
여러가지로 괴롭혀서, 견딜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결국 욕심많은 사람이, 어떻게 해서든지, 그 땅을 빼앗고 맙니다.
이스라엘 사회는, 공의나 정직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괜히, 땅을 지키려고 하다가는, 더 큰 곤욕을 치렀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나봇입니다.
아합이 포도원을 달라고 했을 때, 빼앗겨 버렸으면 되는데,
하나님의 기업이라고 지키려다가, 결국, 거짓 증인들의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삶은,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이 멍에는,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욕심을, 다른 사람의 행복과 축복을 위하여,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들을 다시, 노예 상태로 돌려 보내는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하여,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 안됩니다.
자신의 자유를 다 사용하는 자는, 다시 멍에를 메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에 멍에를 씌워서, 자유를 마음대로 쓰지 않는 것이, 참된 자유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를, 귀하게 대접하십니다.
그러나 자유가 주어졌다고 해서,
자기 정욕을 위하여, 마음대로 사는 자는, 노예상태로 돌아가야 합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요.
“이스라엘아, 네가 기브아의 시대로부터, 범죄하였거늘,
무리가 기브아에 서서, 흉악한 족속을 치는 전쟁을, 거기서 면하였도다."
이스라엘의 죄는, 기브아 시대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때는, 이스라엘이 완전한 왕국이 되기 전의 일입니다.
기브아 사람들은, 동성 연애자들이었습니다.
레위인을 겁탈하려고 하다가, 대신 그의 아내를 겁탈하여, 죽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의 정당한 통치를, 거부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이 동성 연애자들을 내어주지 않고, 오히려 두둔하는 어리섞음 범한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그렇습니다.
죄를 범했을 뿐 아니라, 정당한 가르침이나 ,통치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존심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어느 누구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의 고집이 시작되었습니다.
죄를 두둔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길이 무엇입니까?
지식적으로, 열심히 하나님을 찾고,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자신의 교만을 버리고, 자기를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복종하는 자세로, 낮추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에 대한, 안전장치이며, 자신의 기질을 신앙이라고 오해하는 것을 막아줍니다.
가정생활이나 직장생활이 중요하듯이, 교회생활 역시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바로 직행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아내가 남편 앞에, 자신을 낮추어 보십시오.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직장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상관에게, 한 번 기꺼이 복종해 보십시오.
내 자존심은 좀 상할지 몰라도,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막는 것은, 열심이 부족해서라기 보다는, 우리의 교만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나를 높은 위치에 두려고 하는 교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막습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혼자 열심을 내는 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3. 이스라엘의 교만한 결과
이스라엘의 고집은, 벧엘에 있는, 송아지만큼이나 완고했습니다.
계속해서, 5-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사마리아 거민이, 벧아웬의 송아지를 인하여, 두려워할 것이라.
그 백성이 슬퍼하며, 그것을 기뻐하던, 제사장들도 슬퍼하리니,
이는 그 영광이 떠나감이며, 그 송아지는 앗수르로 옮겨다가,
예물로 야렙왕에게 드리리니, 에브라임은 수치를 받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계의를, 부끄러워 할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집스럽게 붙들었던 신앙은, 벧엘의 송아지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이 이 송아지를 좋아했던 이유는,
자기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완강한 송아지가,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왜 그들이, 벧아웬의 송아지를 인하여, 두려워하게 됩니까?
그것은 이 송아지가 편할 때는 좋은데, 어려울 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송아지를, 정말 여호와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전지전능한 신이요, 자기들이 어려울 때 도울,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송아지는, 그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송아지때문에 더 두려워하고, 이 송아지때문에 더 슬퍼하게 됩니다.
이 송아지는,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바쳐지게 됩니다.
이 벧엘의 송아지는, 앗수르에게 빼앗깁니다.
왜냐하면, 전쟁에서 졌기 때문입니다.
송아지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냥 쇠로 된, 덩어리에 불과했습니다.
이 당시의 전쟁은, 모두 신들의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지면, 자기 신을 바쳐야 하고, 신이 잡혀 있는 이상, 다시 힘을 쓸 수 없습니다.
마치, 일제시대에,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기를 빼앗기 위하여,
명당 자리에, 쇠말뚝을 박은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통 수치를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극도의 수치를 느껴서, 차라리 당장 죽는 것을 원할 정도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송아지를, 너무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송아지가, 모든 것이었습니다. 모든 일에 '이 송아지 여호와' 였습니다.
절대적으로, 이 송아지를 믿었고, 송아지를 의지했으며, 송아지를 자랑했습니다.
이 송아지때문에, 너무나도, 교만하게 행했습니다.
그 결과가, 8절 말씀에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죄된, 아웬의 산당은 패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그 단 위에 날 것이니,
그때에 저희가 산더러‘ 우리를 가리우라' 할 것이요,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산이 우리를 가리우라'고 하는 것은,
이대로 끌려 가는 것 보다는, 산에 깔려 죽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교만하고, 자존심이 센 사람이, 하루 아침에, 거지가 되거나 죄인이 되어서, 끌려 가야 한다면,
차라리, 산에 깔려서, 바로 죽는 길을 택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앞으로 그들이 이처럼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을 믿었지만, 이 성이 무너졌을 때,
그들은 너무나도 수치스러워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6장 15-16절 말씀을 보면,
모든 왕들과 장군들과 부자들이, 그리스도의 영광 앞에서, 이런 말을 할 것이라고 합니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이 모든 것이, 헛된 것을 믿은, 결과입니다.
신이 아닌 것을 신으로 믿는 자들, 점의 결과를 믿는 자들, 사람의 말을 믿는 자들,
자기 생각을 절대적으로 믿는 자들의 결과가, 바로 이처럼, 무섭고, 수치스러운,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뭔가를, 한가지 믿고 삽니다.
점을 믿든지, 자기 생각을 믿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말을 믿든지,
무엇이든지 하나를 믿고 삽니다.
이런 믿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죄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다 무서운 심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기 나름대로는, 다 이유가 있고, 타당한 근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믿은 결과가 여지없이 깨어지는 것을 볼 때, 그 수치를 견디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 기질을, 신앙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있는, 종교적인 본능을, 신앙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신앙은, 하나님 한 분을 의지하는 것이며, 그 영은 철저한 겸손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겸손하게 하지 않는 은혜는, 은혜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를, 속이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4.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오래 묵은 땅을, 기경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한 번도 쟁기질을 하지 않아서, 단단해질대로 단단해진 부분을, 갈아서 엎는 것입니다.
이어서, 12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여기서, 여호와를 찾는 것과 묵은 땅을 기경하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묵은 땅'이라는 것은, 아직까지, 한 번도 갈아본 적이 없는, 단단한 땅입니다.
그야말로, 완고하고, 자기 자신들에게는, 절대적인 영역입니다.
거의 신성시해서,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으려고 하지 않는, 절대적인 영역입니다.
그 부분을, 갈아 엎으라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지금도 늦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심판을 작정하셨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순간,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십니다.
‘너희가 아직 살아있지 않느냐?' 는 것입니다.
이미 늦었다고 생각할 때, 사실은 그때가, 하나님을 찾을, 바로 그 순간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까?
지금까지, 자기가 절대적으로 생각하고, 이것만큼은, 하나님 앞에서도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완고하게 붙들고 있는 그 부분을, 갈아 엎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틀릴 수 있으며, 지금까지, 내가 절대적으로 생각하던 것이,
하나님 앞에서, 아닐 수도 있다.'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땅에 대한, 욕심입니다.
그들이 잘살 수 있는 길은, 땅을 더 차지하는 수 밖에 없고, 땅을 더 차지하는 방법은,
가난한 자들을, 무자비하게, 그 땅에서 쫓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는 것입니다.
땅 욕심만 버리면 됩니다.
‘의를 심고'라는 것은, 가질 것만 가지고, 남의 것을 가지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긍휼을, 거두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되며, 그들에게 무자비하게 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이처럼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위하여,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나 교인들에게, 묵은 땅이 무엇이겠습니까?
제 생각으로는,‘교회는 무조건 커져야 한다'는 생각이 가장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장 큰 성전을 짓고, 거기서 군림해 보고 싶어합니다.
물론, 교회는 자라고 또 자라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순수성을 포기하면서, 무조건 크게 만들려고 하는 것은,
가장 무서운 욕심입니다.
이것이 묵은 땅입니다. 이것은 거의 성역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갈아엎기 전에는, 교회가, 참 사랑을 회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묵은 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서, 잘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되고, 형통한 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난을, 싫어합니다. 죄에 대한 책망을 듣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기들의 귀에, 듣기 좋은, 설교자를 찾고, 아첨하는 자를 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벧아웬의 송아지요, 사마리아의 왕입니다.
우리가 절대시하는, 이 묵은 땅을 갈아엎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12절하)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십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임재하십니다.
다시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십니까?
의를 비같이 쏟으십니다.
이것은 분명히 억수같이 쏟아지는 늦은 비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의를, 억수같이 쏟아주십니다.
나는 조금 순종했는데, 나타는 결과는, 엄청난 의의 열매입니다.
마치, 봇물이 터지듯이,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 온 나라 가운데 쏟아집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의를, 비처럼 쏟으시는 분은, 성령님입니다.
엄청난 성령의 역사가, 온 이스라엘 땅 위에, 쏟아집니다.
우리 안에 있는, 딱딱한 부분들, 그렇게 주님이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었던, 우리의 고집들,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도, 내 마음대로, 하나님의 뜻으로 만들어서, 송아지처럼 추구했던,
그 모든 우리의 욕심들, 그것의 무가치함을 깨닫아, 인정하고,
그 부분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갈아엎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억수같이 임하게 됩니다.
이것은 먼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도,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고집스럽게 교인들을 끌고 갔던,
교역자들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이 고백되어지기만 하면,
지금도 하나님은, 성령의 뜨거운 역사를, 이 땅의 교회들 위에, 내리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막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고집입니다. 우리가 만든, 송아지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우리 마음대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여러가지 헛된 송아지들을, 만들어 온 것입니다.
이 고집스러운 교만이 깨어지고, 고백되어지고, 갈아엎어진다면,
지금도, 하나님은 의를, 비같이, 이 땅에 쏟으실 것입니다.
참으로 이 땅이 공정하고, 의로우며, 사랑이 있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이,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드리는, 아름다운 나라가 될 것입니다.
복음은,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우리는, 둘 중의 하나의 멍에를, 메어야 합니다. 하나는, 사랑의 멍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멍에를 거부하고, 십자가로 죄 용서받았기 때문에, 더 두려움없이,
내 욕심대로 살려고 할 때에는, 어쩔 수 없이, 무자비한 인간의 멍에를, 멜 수 밖에 없습니다.
13절 말씀을 통하여, 지금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습을, 살펴 볼수 있습니다.
“너희는 악을 밭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
그들은, 거짓 열매를 먹었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이 자기 것이 아닌 것을, 먹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신 것으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 선을 넘어서서 무한히 부요하려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기 위해서는, 악을 밭갈고, 죄를 거둘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직 자기들에게는, 길도 많고, 용사도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는, 하나님외에도, 가능성이 많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자신이 있었습니다.
14절 말씀은, 얼마전에, 앗수르왕 가운데, 살만이라는 자가 와서, 벧아벨이라는 곳을,
크게 파괴시킨 것을, 상기시킵니다.
아마 그때 잔인한 살륙이 행해졌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하나의 표본이 되어, 그런 살륙이, 이스라엘 전체에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번에는 벧엘이 그 차례이고,
이스라엘 왕이, 새벽에 갑자기, 멸망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중심이 변하지 않는, 종교적인, 열심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얼마든지, 스스로 속이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위치에 두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하나의 티끌에 불과하며, 나는 목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목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것으로, 진정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내 마음대로,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 성장의 욕심은, 분명히 송아지입니다.
교인들이, 이 세상의 번성을, 하나님께서 주신 복과, 동일시하는 것도 송아지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갈아엎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진정으로, 우리 가운데 회복될 것입니다.
이와같은 은혜와 복을 통하여,하나님의 의가, 비처럼 쏟아지는, 성령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나타나고, 보여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