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에는 일곱 가지 표적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은 그가운데서 예수님이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신 일곱 번째에 해당하는 표적을 살펴보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모두 세 번에 걸쳐서, 죽은 자를 살리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누가복음 7장에서,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두번째는, 누가복음 8장에서,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본문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입니다.
첫번째와 두번째의 경우는 죽은 자들이, 아직 무덤에 들어가기 전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반면에, 나사로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죽은 지가 나흘이 지나 이미 부패가 시작되어, 냄새가
날 정도였습니다. 그러한 나사로를 예수님은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와 같은 놀라운 표적을 행하셨을까요?
예수님이 나사로를 너무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의 모습을 한 번 더 보고 싶으셨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마르다와 마리아가 너무 슬퍼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로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까?
예수님이 표적을 행하시는 목적은, 언제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 곧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보리떡 5개와 생선 2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대로 예수님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은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입증하시기 위해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입니다.
이러한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이심을 분명하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도 믿음이 더 성숙해져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수 있는 믿음의 소유자
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요한 11장39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에 가셨습니다.
그 당시 부유한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생긴 굴이나 또는 인공적으로 만든 굴을 가족묘로 사용
했습니다. 무덤 입구에는 도랑처럼 홈을 팠습니다.
그리고는 수레바퀴 모양의 둥글고 큰 돌로 무덤의 입구를 막았습니다.
혹시라도, 들짐승이 들어가서 시신을 훼손하거나 또는 도둑이 들어가서, 부장품을 훔쳐 가버리면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 오신 예수님은 주변에 있는 자에게 “돌을 옮겨 놓으라.” 고 명하셨습니다.
물론 전능하신 예수님은 사람들의 도움이 없어도 능히, 그 돌을 옮겨 놓으실 수가 있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에게 맡기시고,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에만,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이나 권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일은 예수님이 친히 하십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 39절 후반부 말씀입니다.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는 예수님이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습니다.
마르다는 그저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의 모습이라도 한 번 더 보고, 싶어 하시는 줄로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다급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은지 나흘째 되는 날부터는 시신이 썩기 시작한다고 믿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마태 14장 22절이하에 보면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모습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바다 위를 잘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물결을 쳐다 볼 때는, 그만 바다에 빠져버린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마르다도 마찬 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나사로가 죽어 무덤 속에 있다는 사실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죽은지
나흘이 되어 벌써 냄세가 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려운 문제가 생겼습니까?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바라보며 염려해 보아야 변하는게 없습니다.
그땐 시선을 돌려서, 전능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를 돌보시면서, 모든 문제를 깨끗하게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요한 11장40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앞서 말씀하신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는 말쓰믈 상기시켜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가 그의 시선을 죽은 나사로에게 맞추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입니다.
이미 요한 11장4절에서,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이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하자면 나사로가 살아날 때, 마르다가 예수님에게서 찬란하게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예수님
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것은 아닙니다. 요한 12장10∼11절 말씀에서 이와같은 사실을
확인할수 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
이러라.” 이와 같이 유대교의 지도자들도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표적을 보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본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더 큰 표적과 기사를 보아도 예수님에게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 곧,
예수님의 신성을 밝히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르다에게 믿음을 요구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도 요구하십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염려하며 그 문제만 바라보지 맙시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할때 문제도 해결 받고, 예수님에게서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도 볼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둘러선 무리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요한 11장41-42절 말씀입니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르다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마르다가 죽은 나사로를 아무리 쳐다보아도, 죽은 나사로는 살아나지 않습니다.
마르다는 자신에게 믿음이 부족했음을 깨닫고, 예수님만 바라보기로 작정을 했을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무덤의 돌을 옮겨 놓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덤이 열렸는데도 불구하고, 무덤에 있는 나사로를 보려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눈을 들어 우러러 보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셨습니다. 우리들도 눈을 들어 예수님을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다처럼 죽은 나사로를 아무리 쳐다보아도,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지 않은 것처럼,
우리의 문제를 앉고 아무리 세상을 쳐다보아도, 해결 방안이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이 하나님께 기도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 41절 후반부 말씀입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려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는,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시고,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미 천국에 가있는 나사로의 영혼을 다시금 이 땅으로 되돌리는 일에 하나님의
허락을 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시고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인지를 묻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언제나 다 알고 계시기 때문
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기도를 드리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때 예수님은 하나님께 간구의 기도를 드리지 않으시고,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던 것입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 42절 전반부 말씀입니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이 기도를 통하여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라는 사실을 밝히시면서, 다시 한 번 자신의
신성을 명백하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이 소리 내어하신 기도를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오늘 본문 42절, 후반부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 됨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주변에 둘러선 무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내신 자 곧 '메시야' 라는 사실을 믿도록 하려 함이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둘러선 무리 중에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마르다와 마리아와 같이 이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죽은 나사로의 가정에 그저 문상을 온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이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그 믿음이
더욱 깊어지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기를 바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로마서 8장34절 말씀을 보면, 지금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예수님이 간구하시는 대로, 이 시간 믿음이 없는 분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수 있는 믿음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또한, 믿음이 있는 분들에게는 그 믿음이 더욱 성숙해지고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요한 11장43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예수님은 기도를 마치신 후에, 무덤 안에서 사망의 깊은 잠을 자고 있는 나사로를 향하여,
큰 소리로 그를 부르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예수님의 말씀에 사망은 삼켰던 나사로를
다시 토해 내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난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16절 말씀에서 처럼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도, 예수님 안에서 잠자는
우리 모두를 깨우시기 위해 예수님은 큰 소리로 외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5장25절 말씀처럼,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서 무덤 밖으로
나올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으로 우리를 창조하신 것과같이, 마지막 날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를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를 무덤 밖으로 이끌어 내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를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의 생명보다 더 소중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깊이 새기며,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어서 요한 11장44절 말씀입니다. "죽은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나사로는 무덤에 장사될 때의 모습 그대로 나왔습니다. 수족은 베로 동인 채였습니다.
얼굴은 수건에 싸여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시신 전체를 베로 두르지 않고, 얼굴은 수건으로
동이고 수족은 따로따로 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사로는 스스로 걸어서 나올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로 수족을 동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자연스럽게 움직이기는 불편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얼굴은 전체가 수건에 싸여있어서 앞을 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와 같이 명하셨습니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나사로는 무덤에서 나왔다가, 그 자리에서 다시금 무덤으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병들기 이전의 상태가 되어, 건강한 몸으로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55절에서 바울은 사망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예수님은 이미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온전히
살리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 또한 온전히 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망은 우리를 삼킬 수가 없습니다. 사망은 우리 위에서 왕 노릇하지 못합니다.
육체의 죽음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가는 하나의 관문일 뿐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고전 15장 58절 말씀대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돌을 옮겨 놓아라.”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주님의 말씀에 따라 옮겨 놓는 일에,
그리고 풀어 놓는 일에 순종함으로, 그들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귀하게 쓰임 받을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살리는 일을, 천사들에게 맡기지 아니하셨습니다.
천사들에게도 맡겨지지 않은 이 일에, 우리가 쓰임을 받는다는 사실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면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더욱 열심을 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수고는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듯이, 우리 주변에 있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도 새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날, 그들은 우리의 기쁨이요 자랑이요 감사가 될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우리를 칭찬하시면서 의의 면류관을 쒸워 주실 것입니다.
또한 약속하신 상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에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면서, 주의 일 특별히 영혼 구원의 일에, 더욱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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