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10:13)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Everyday, people who encounter miracles,,,

**십자가의 도

[스크랩] 십일조 바른이해

Andy1954 2015. 1. 2. 19:00

 

◈십일조  바른이해

                                         고동엽:http://blog.daum.net/ipssen/17948020

 

 

                         왜 세계 모든 교회는 이 십일조 제도를 폐지 시켜야만 했을까?

 

 

 

 

 

 

 

 

 

 

 

 

 

 

                                

아래의 세계 모든 교회들은 이 십일조 제도가 분명하게도 비 성경적이기 때문에 폐지했다.

*영국..........1688년 폐지.
*프랑스........1789년 폐지.
*독일..........1807년 폐지.
*스페인 .......1841년 폐지.
*아일랜드 .....1869년 폐지.

*스코틀랜드....2000년 폐지.
*스웨덴 .......세금형태로 교회세를 징수 하였으나,  2000년에 공식적으로 폐지.
*이탈리아 .....세금형태로 0.8% 받아 그것을 교회 크기의 비율대로 나눔.
*핀란드 .......시에 따라 다르지만, 세금형태로 교회세를 1%~2.25% 징수.
*스위스 .......공식적으로 십일조를 걷는 곳은 없고, 일부 주에서 2.3%까지 세금형태로 거둠.
*홀랜드 .......십일조 및 각종 헌금을 일절 철폐하고, 교인들의 생활수준에 따라  갹출.
*오스트리아....국가에서 걷는 세금형태(교회세)로 자기 수입의 1%만 냄.
*덴마크 .......시에 따라 차이가 조금 있지만, 국가에서 걷는 세금형태(교회세)로 1%만  냄.
*북미의 연합감리교회, USA침례교, 미국장로교, 아메리카침례교 등 모든 교파........모두 폐지. 
 (다만, 미국의 남침례교회, 오순절교회 등 극히 일부의 교단은 십일조를 하고 있다).
*멕시코 등 라틴아메리카 여러 국가들............................................ 모두 폐지.
*그리스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영국국교회(성공회), 루터교회, 동방정교회 .........모두 폐지.
            (동방교회는 애초부터 십일조란 개념 자체가 없다) 
*전세계의 개신교회들(아시아,중동,중미,아프리카 등의 교회들).....................모두 폐지.
*전세계의 모든 가톨릭교회...................................................... 모두 폐지.
*십일조 원조였던  이스라엘의 유대교조차.........................................모두 폐지.
 

 

 

 

 

 

 

 

 

 

 

 

인간의 영혼구원보다 더 강한 이미지를 브랜드화 한 한국교회 십일조 제도!  이 십일조 제도는 복음과 함께 미국 선교사들로부터 면역력이 약한 한국 교회에 처음 상륙하여 한국교회 전체를 유혹에 빠뜨렸다. 항체가 개발되지 않은 한국교회에 침투하여 지금껏 그 여진은 계속 행진을 거듭하고 있다. 또 이것에 대한 절대 순종도 배워 지금까지 이 '십일조'에 관한 이야기는 비판없는 절대적 성역화로 오늘의 한국 교회 모든 성도들의 뇌리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에 한국교회 권력자들은 이 커튼 넘어에 자신들을 숨기고, 기복(祈福)과 율법의 굴레라는 덫으로 성도들의 영혼을 옥죄며, 실존의 자유를 속박하며, 순수 신앙을 이데올로기로 변질시킨후 자신들은 호화로운 사치와 향락의 탐닉에 심취한다. 영혼의 숨결이 하나의 종교적 의식으로 대체되어가는 서곡이다.

 

이러한 사치와 향락에 도취해 있다보니 이들은 펨토초 세계에서 영원히 사는 걸로 착각들 한다. 자신들의 시간은 펨토초로 흘러 끝이 없다고 하는 오해의 결과이다(펨토초란 1초를 1000조로 나뉜 가장 짧은 단위의 시간을 나타낸다).

 

그러나 찰나로 흘러가는 시간은 반복을 모르고 붙잡을수도 멈출수도 없기에 이것으로 인간을 존재케도 해주지만 또한 죽음을 통해서 다시 거둬간다. 이러한 자신의 위선 ·변덕·광기에만 의존하는 우상의 노예근성은 영적 빈곤함과 진부함의 전형적 모습으로서 존재론적 정신분열증과 영적치매 환자들이다. 이런 영혼 없는 페르소나(mask-가면)를 예수께서는 경고하셨다(마7장15절)."거짖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예수 자신은 가난 자체로 생활 하셨기 때문이다.

 

원래 이 십일조 제도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중동지방 전역에서 행해졌던 고대 관습인 일종의 세금형태로서 당시 모든 국민은 누구나 납세 의무를 지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성경 고대역사지리학, 고고학이나, 고대 근동학, 고문서학, 사회인류학,  즉 그 시대의 인종분포, 경제상태, 국제관계, 또 그들이 먹었던 음식, 길렀던 목축업, 생활습관, 그 지방을 둘러싼 여러 종합적인 자료등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 전문 분야에 대한 전공한 학자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다. 설상 그 전공학자가 있다손 치도래도 한국교회만의 워낙 예민한 사안이라 한국교회의 독특한 풍토상에서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거의 절대 희박하다. 이러한 베일속에 가려져 있는 이 실체들를 속속히 해부해 들춰낸다는 것은 보장받을수 없는 매우 위험스럽고 부담스런 지뢰밭이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가 다 그렇지는 않지만 베일속에 숨겨 있는 것을 벗기고 나면 허상만 남기 마련이다. 이 허상을 잘 포장하여 이용하고 있는 한국교회는 결국 73%의 샤머니즘과 신비주의, 기복신앙만을 양산했다.  이제는 그런 부분적 요소들이 전체적으로 비약된  그 오류가  왜 비성경적인지 그 속살에 매스를 가해  강력한  항체를  한국교회에 나타내 보이려고 한다.


[말라기 3장 10절]"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

 

 

 

 

 

 

 

 

 

 

 

 

 

 

 

 

 

 


                                

הביאו את־כל־המעשר אל־בית  האוצר ויהי  טרף בביתי

    베베티      테레프        비히      하오브차르    뻬이트     엘     함마세르    콜  에트  하비우

 in-house-of-me food that-he-may-be the storage  house-of into the-tithe  whole-of  bring

     나의집에    양식    있게할지니     창고에       나의집           십일조        온전한         들여

 

ובחנוני ארבות השמים נא בזאת אמר יהוה צבאות אם־לא  

  로     임     체바오브트   아도나이   아마르    바조트  나     하샤마임   아루보보트  우베하누니

  not   if     Hosts    Yahweh    he-says   in-this    now - heavens   floodgates   indeed-test-me

만일 그렇지 아니한--만군의-여호와가  -말한다-  그것으로     하늘들       문      나를 시험하여

 

אפתח לכם את והריקתי לכם ברכה עד־בלי־די׃

다이      베리     아드   베라카흐       라켐          바하리코티    에트   라켐    에프타흐

 room-enough not until blessing upon-you and-I-pour-out  **   for-you  I-throw-open 

풍족히 아니하나     까지   복을      너희위에      내가 부은다        너희를 위해      붓다.

 

 

 

 

 

 

 

 

 

 

 


 세계 기독교인 22억 7천만명인  세계교회가 '이 십일조제도'는 분명히 비성경적이기에 모두 폐기 처분했다. 허지만 유독 한국교회만은 물질만능 자본 주의적 정서를  추구하면서부터 이 십일조 제도의 무리수와 자충수로인한  민낯 노출로 빛이 바랬다. 이런 일그러진 트라우마가 한국회의 성장 발목을 잡고 있다. 


망원경을 통해 보아야 할 성경을 특징적인 몇 구절의 현미경적 시야가  프리즘 안에서 굴절되고 채색된 착시 현상때문에, 한국교회는 지금도 네모난 바퀴로 계속 힘들게 굴러가고 있다.

 

처음 이 십일조 제도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그들의 신앙행위 표현으로 삼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고대 근동 지방의 많은 나라 즉 로마, 그리이스, 시리아, 카르타고, 우가리트 셈족 등에서 노동이나 전쟁 전리품으로 10분의 일은 문화적 관습속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종교적 뿐만 아니라 세상의 통치자들도 일종의 세금 형태로 강제적으로 수탈했었다.

 

삼우엘상 8장 5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에게도 왕을 세워달라고 사무엘에게 강한 요구를한다. 그 때 사무엘은 '만일 너희에게 왕을 세우면 너희들이 왕이나 궁정관리에게 십일조를 내야 된다(삼상8장 15절)' 라고 하는 것을 보면 이미 당시에 십일조가 왕에게 십일조를 바쳤음을 알수 있다.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궁정 관리와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너희 양떼의 십분의 일을 가져 갈 것이며 너희는 그 종이 될 것이다".

 

고대 세속 종교에서 그들의 신에게 10분의 일을 바치는 의미는 땅은 신의 소유이며, 인간은 그 땅을 빌어서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라는 사상이 깊게 자리 하면서 십일조 기원을 삼고 있다. 또 그들은 자기들의 왕을 하늘이 내린 신의 아들이라고 인정하고, 신으로 숭배 했기 때문에 왕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이다.

 

창세기 47장 24절에는 애급인들은 바로왕에게 십분의 이를 바쳤다는 기록도 나온다. 이 같이 이 십일조 제도는 율법에 정식으로 명시하기 이전에도 모든 열방에서 보편적인 세금형태로 실시 하고 있었다.

 

다음은 구약 성경중 십일조가 등장하는 구절들이다.

 

먼저 창 14:18-20은 십일조가 성경 처음으로 등장하는 장면이다. 살렘왕 멜기세댁이 빵과 포도주를 갖고 나와서 전쟁에서 승리하여 돌아오는 아브라함에게 축복한다.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전쟁에서 취한 전리품 중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댁에게 드린다. 그래서 어떤이는 이 십일조 제도는 이미 율법이 있기 전부터 존재했다 라고 하면서 이 구절을 들이댄다.

 

허지만 이곳의 십일조는 멜기세댁의 제사장 직분이 레위지파가 아닌 유다 지파로서 영원한 대제사장, 즉 장차 오실 메시야의 모형과 또한 멜기세댁이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것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음이 핵심 내용이다.

 

하나님은 십일조는 모세 율법에 따라 시행하라고 레27장30-33, 신12장5-12 에서 분명하게 못을 밖아 놓았다. 그래서 여기 아브라함의 십일조는 율법 이전 이었을 뿐만 아니라, 더군다나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은 십일조가 절대로 될 수 없다. 오직 십일조는 땅의 소출과 가축 에만 한정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십일조 이야기는 당대 이웃나라 보편화된 문화일 뿐이다. 그래서 율법 전에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십일조가 있었다고 하는 주장은 얼토당치 않다.^

 

두 번째로 창28:20-22 의 십일조 내용은 야곱이 하란으로 피난 도중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시고 나중에 아버지집에 돌아오도록 하신다면 자신의 모든 것 중에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한 조건적 내용일뿐이다. 그러나 그 후 야곱이 맹세한 대로 십일조를 바쳤다는 기록이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조건적 값싼 흥정의 대상이 아니다. 이 곳 야곱의 십일조 이야기도 당대 이웃나라 보편화된 문화의 관습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레위기 27:30-34 에 가서야 정확한 십일조를 완전히 명문화 시키신다(레 27:34).


(레 27:30~34)그리고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 또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십일조를 무르려면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할 것이요, 모든 소나 양의 십일조는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 번째의 것마다 여호와의 성물이 되리라(렘33:13, 겔20:37). 그 우열을 가리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무르지 못하리라. 이것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이니라.

 

이것이 곧 율법이다.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왕상2장3절).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돌릴 것 곧 율법에 정한 대로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를 모든 성읍 밭에서 거두어 이 곳간에 쌓으라"(느12장44절).

 

십일조 제도가 정식 규범과 율례으로서 모세 율법에 등장하고, 많은 지파들중에서 땅의 소산을 얻을수 없는 레위 지파의 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의식법이나 시민법과 함께 십일조제도가 주어지기 시작하였다.

 

그 핵심은  '오직 땅의 곡식과 가축에만 한정한다는데 가장 큰 의미가 담겨있다.'  또 바치는 자들의 의지대로 함부로 하지 못하기 위해 막대기 밑을 통과하는 가축의 열번째를 드리도록 했다. 그것을 어기는 사람에겐 벌금으로 20% 더 내도록도 하였다.오늘의 교회의 돈으로 내는것과는 개념이 전혀 다르다.

 

다음은 종류면에서

제1의 십일조로서 십일조의 십일조이다 (민수기 18:26).

십일조를 받는 레위인도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아론 제사장에게 바쳤다(민18:26-29).

그런데 이것 역시 돈이 아니고 농산물이다(민18:27).

 

제2의 십일조는 축제의 십일조이다(신명기 12:4-19, 신명기 14:22-29, 26:12-15).

하나님이 택하신 그 어떤 장소로 십일조를 가지고 가서 그것으로 잔치를 베푸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고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인 나그네, 고아, 과부, 자기친족, 종들이 그 십일조를 나누어 함께 즐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제3년차와 제6년차(안식년을 기준해서)십일조가 있는데 이것은 자기가 사는 이웃을 위한 구제금으로 사용하는 십일조이다.

 

예를들면

지금도 한국에서 점심을 굶는 초등학생이 60여만명,

기초수급자가 140여만명,

65세 이상 노약자가 613여만명인데 이들중에서 폐지팔아  8만원으로 한달 생계이어가는자가 140여만명 ,

그리고 그외 절대 빈곤층이 500만명인데,

결국 이 절대 빈곤자들중에 심지어 생을 마감하는자들이 하루에 40여명이나 된다.

세계 OECD국가중 '불명예 자살국가 세계 제1위'를 10년간이나 계속 고수하고 있다.   통계청의 시뮬레이션조차 감당 못할 빛의 속도로 빈곤화가 진행 중이다.


세계 70억 인구 가운데 하루세끼 밥을 해결 안되는 인구도 9억 7천만명이나 된다. 하나님은 이들과  서로 나누라는 것이 제3년차와 제6년차 십일조관이다(레14:28). 이렇게 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은 큰 복을 주신다고 했다. 이것은 곧 사회보장 복지의 혜택이기도 하다.


현재 기독교 신앙정신으로 사회복지제도가 가장 잘 되어진나라가 북 구라파이다. 또 우리나라에도 기부천사 연예인 지누션 부부같은 이들이 있다. 지누선의 간증을 보려면  여기클릭참조이다. 이것은 공동체가 나눔을 통해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을 굳게 의미하는것이 십일조의 본질이 담겨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엔 율법에 명시한 십일조제도를 잘 지켜나갔다. 그렇지만 이스라엘도 많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점차적으로 변질 되어 가기 시작함에 따라 결국 아모스 시대에 가서는 형식적인 예배와 십일조가 오늘날의 현대교회가 주장하고 있는 하나의 복의 등식으로 생각하기까지 이르렀다.


십일조를 적극적으로 잘하면 크게복을 받아 아주 부자가 되고, 집안 모두가 건강하고 모든일이 잘되고 잘되어 만사형통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 때 아모스는 하나님께  그 백성들의 망령된 부패신앙 배역행위를 진술하면서 그들의 벧엘제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는 전적으로 자기 자신들을 즐겁기 하기 위한 행동이라고 책망했다.

 

(아모스 4:4)에'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너희가 십일조를 복의 등식개념으로 생각하던 그 십일조를  더 큰 복을 받기 위하여 '매 3년마다 드렸던 그 십일조를 이제는 그 기간을 크게 앞땡겨서 3일에 한 번씩 드려보려므나. 그러면 돈 복이 철철 더 넘칠것이 아니냐? 하면서 그들의 비신앙적 행위를 비꼬았다. 그들이 아무리 특심하게도 더 많은 십일조를 바친다 할지라도 성경에 기록된 율법 대로가 아니기 때문에 허사라는것을 아모스 선지자는 그들의 기복적인 십일조에 대해 몹시 책망했다. 오늘날 현대교회 십일조의 기복신앙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다.

 

원래 구약이 말하는 십일조는 성전 제사를 맡은 레위인, 과부들, 어려운사람들과 함께 나누어먹는 것이었다. 그리고 십일조는 반드시 밭의 소출과 가축만으로 한정 되었다(레27:30, 신12:17, 14:23, 느13:5,12).

 

성전이 너무 먼 경우에는 그것들을 일단 돈으로 바꾸었다가 성전에 가서 다시 음식물로 바꾸어 십일조를 드리게 했다(신14:24-26). 그래서 십일조는 당연히 '먹거리'를 생산해 내는 농민과 목축업자들만이 한정 된다고 하나님께서 분명히 못을 박았다 . 그 외의 다른 직업인들은 십일조가 면제되었다. 그래서 목수였던 예수님도, 어부였던 제자들도 십일조는 해당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성전세는 십일조와는 달리 모든 백성이 납부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출30:12-15) 그래서 당시 통용되는 돈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은 납부 하셨다(마17:27). 십일조는 구약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족인 제사장들의 생계수단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 꼭 필요했었다.

 

그러나 성전과 제사장이 필요없는 신약의 초대교회에서는 이 십일조를 일절 시행하지 않았다.그래서 사도행전에서도 십일조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이 없는것이 그 이유이다.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을 완성 하셨기에 십일조를 폐지시키신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십일조가 성립 되려면 반드시 성전과 제사장이 있어야 한다. 이유는 십일조는 오직 성전에서만 또 제사장을 통해서만 드릴수 있기 때문이다. 성전도 제사장도 없는 초대교회가 이 십일조를 시행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헛되게 하고 무력화 하는것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사도 행전은 이에 대하여 한마디도 언급이 없었고 그 이후 교회는 계속 이어져 오는 동안에도 십일조 제도는 없었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지난후 주후 4세기에 교회가 구체적으로 조직화 되면서, 결국 인간들의 돈 욕심이 발동이 돼 다시 십일조 제도를 도입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거의 중세 1000년 동안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허지만 이때까지도 십일조를 '돈'많큼은 제외시키고 오직 토지소출과 가축에만 거둬들였다. 성경에서 십일조는 언제나 먹거리로 한정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3세기에 이르러 교회의 부패와 타락이 최고조로 변질 되다보니 이 십일조가 먹거리를 포함해서 모든 소득으로 확대 되었다. 그때부터 교회는 적극적으로 돈의 꿀맛을 알게 되었고 그후 시도때도 없이 각종 집회를 열어 돈을 거둬들이니, 교회마다 돈이 넘쳐 심지어 십일조를 보관하는 '십일조 금고' 까지 생기게 되었다.

 

교회는 돈이 넘쳐 교회건물들은 너무 화려했고, 교회지도자들도 사치에 여념이 없고, 심지어 그 교회담임자는 그 돈많은 교회를 놓치기 싫어 자식에까지 변측세습하는 부패가 극에 달해다보니, 결국엔 어쩔수 없이 1079년도에는 신부들에게 아예 세습을 못하도록 자식을 못낳게 하는 독신제도를 만들게되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카톨릭에서는 신부가 독신으로 살고 있는것이 그 이유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후 초대교회에서도 전혀 시행되지 않았던 그 십일조 제도가 중세 카톨릭 시대에 다시 활개를 쳐기 시작해서 얄퍅하고도 아주 교묘한 수법으로 특혜와 특권, 기름진 음식, 그리고 위선이라는 거대한 뱃살을 부풀렸다.

 

허지만 종교개혁 이후에 교회는 국가와 분리 되면서 십일조 왕국인 한국교회만 제외한 대부분 세계 모든 교회가  프랑스 혁명 이후 1789년과 1848년이후 이 십일조 제도를 공식적으로 완전 폐지시켰다. 그 내용이 맨 위의 표이다. 더 이상 그 십일조 가지고 교회가 교인들에게 사기 칠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한국 기독교인은 불과 860만명으로 세계 기독교 인구 22억7000만명의 263분의 1 뿐이 되질 않는다(정부 통계청 발표).그나마 기독교 인구 860만명 가운데 교회와 교회목사들에게 시험당해 교회에 출석치 않는 숫자가 200만명이나 된다.교회에 나아가지 않고 각 가정에서 예배하는자들이 200만명이나 넘는다는것은  그만큼 우리 성도들이 목사들의 도덕적 진실에 목마르다는 반증이다. 교회마다 도처에 진실이라 떠드는 목소리는 넘쳐나는데 진짜 진실은 어디 숨었는지 모르겠다. 조작과 음해, 회유와 협박, 색깔도 다양하다. 유유상종, 거짓은 떼로 다닌다. 거짓의 동행한테서 비슷한 거짓을 발견하는 건 차라리 익숙한 일이다.


나 같은 시력2.0의 눈에는 한국교회의  풍경이 거꾸로 서 있다. 로마제국은 흔들리면서 1000년을 갔다. 한국교회는 거꾸로 서서 얼마나 갈지 궁금하다. 야생 본능과 근육질 몸통을 되찾야 한다. 거짓과 진실의 적절한 배합이 최고라고 그들은 열변을 토한다. 일반교인들이야 처음에는 부정하고 의심하지만, 결국은 이를 따르게 된다. 대중은 작은 거짓말보다 큰 거짓말에 훨씬 쉽게 속는다. 한국교회의 운명을 재촉하는 초침이 빠르게 도는 느낌이다. 판도라의 상자에는 고통과 시련, 수많은 역경이 빠져 나온 뒤에야 희망이 싹이 튼다. 희망은 그렇게 마지막에야 오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신학자들이나 교수들은 대부분 서구나 미국 등에서 신학 공부할 때에 그 각 나라들의 교회예배 참석을 통해서 그 곳 교회들은 '십일조 제도'가 없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생계형 학자들은 지금 한국 십일조 부조리에 대해 입에 자갈을 채우고 한마디도 못한채 침묵으로만 일관하면서  묵언수행하고 있다.  때로는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은 진실을 전하기 때문에 그럴까? 아니다. 입을 뻥끗했다간 당장 교단으로부터 교수와 목회면직을 동시에 바로 퇴출당하기 때문이다. 자기의 굳은 신념을 처참하게 쓰레기 통에 던져버렸다.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알고도 모른척 한다.


분명한 확신이 머리 속에 일어난 천재들이라도 저 똑똑해 보이는 바보들에게 혼자 왕따 당하지 않으려고 입을 다물게 된다. 그러나 당당하고도 용기 있는 몇몇 신학자들이나 교수, 목회자들은 십일조 제도 폐지를 주장하다가 교단 및 신학교, 교회로부터 퇴출 당한자들이 현재에도 적지 않음을 알수있다. 


다수의 학자들이 진리를 공유하는 그러한 확신속에서 어설프게 그들을 공격하다가는 한 시대의 또라이(돌아이)로 낙인찍혀 학자의 인생을 마감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역사 속에는 나 같은 용감한 학문의 돌연변이 혁명가가 가끔 등장하여 거룩한 진리의  성전에서 비둘기나 사고팔고 돈이나 바꾸고 있는 장사꾼들의 판을 뒤집어 없질러버리는 일이 가끔 발생하고 있다.  이익만 챙기는 저 장사치들 자칭 제사장들이라고 고집하는 현대교회의 권력자들이 이 혁명가를 그냥 둘 리 없지만, 한 시대에 왕따당한 선구자의 진리의 기수는 다음 시대의 학자들에 의해 계승되면서 판이 바른진리로 바뀌어지는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 현재 한국교회에서는 교파와 교단을 초월한 모든 교회가 이 십일조 제도를 초교파적으로 정착시키고 있다. 교단과 교단, 교파와 교파 사이에는 교리적으로 조그만 차이가 있어도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싸운다. 내가속한 장로교만 하드래도 300개이상 넘게 싸워 찢어 갈라져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십일조 제도많큼은 모두가 단합하여 한 목소리가 되어 있다. 여기엔 어떤 이의가 없다.

 

이러한 현상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성경 구절이 바로 구약의 말라기 3장8절-10절의 잘못된 해석이다. 본인도 과거에 부흥집회를 통해서 수없이 들었던 말씀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 말씀이 기록될 당시의 사회적인 배경과 그 말씀 전후의 유기적인 문맥관계를 고려해야 되는데도 불구하고, 특정 구절들만 떼어서 자신들의 신앙관에 애써 합리화 시켰다. 아주 무지한 성경 해석의 달인들이다.

 

말라기 3장8절-9절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덕질 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 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라는 구절이다.이 내용에서 그들은 성도들이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한것으로 심하게 매도했다.

 

그러나 이곳의 바른 해석은 느혜미아서 13장이 자세히 설명한다. 왜냐하면 말라기와 느혜미야는 동시대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 내용중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십일조 도둑은 백성들이 십일조를 하지 않아서 도둑이 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제사장들이 십일조를 몰래 훔쳐 빼돌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둑이라고 하셨던 것이다.

 

바벨론포로에서 돌아온 느혜미야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에게 명령했다. 백성들이 십일조와 헌물을 가져오면 제사장들은 그것들을 받아서 성전 옆에 있는 창고에 거둬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당시 제사장 엘리야십과 도비야 라는 두 사람이 서로 공모해서 백성들이 십일조 가져오면 그것들을 성전 창고에 넣는 것이 아니라 성전창고 옆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개인창고로 계속 빼 돌렸다.

 

그래서 결국 그 성전창고에는 식량이 바닥이 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어느교회 목사가 교회돈을 무수히 착복해서 치부하는 것과 같다.그래서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성전 일을 버리고 자기들의 먹고 살길을 찾아 도망가는 일이 발생하였다. 최초로 제사장에 의한 십일조 도둑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내용이 바로 십일조 도둑 사건인 것이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덕질 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 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그런데 오늘의 교회 권력자들은 성도들이 십일조를 한번이라도 못내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했다고 거품을 무니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십일조를 못내서 도둑이 아니라 제사장 엘리야십과 도비야가 백성들이 바친 십일조를 자기 개인 창고로 빼돌렸기 때문에 도둑 사건이 된 것을 교인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다.

 

하나님은 분명하게도 엘리야쉽과 도비야가 도둑이라고 지목하는데 목사들은 그것을 바꾸어 성도들의 가슴에 도둑이라고 주홍글씨를 달아맨다. 그리고 그 내용이 자세히 해석되어 있는 느혜미아 13장을 설명하지도 않는다.오히려 그 내용을 교인들이 알아차릴가봐서 전전긍긍한다. 마치 교회가 1229년 둘러스 대회때  교인들이 성경지식에 대해 무지하도록 성경을 판매 금지한것과 똑같다. 얄팍한 성경 지식의 편협자들, 하나님의 뜻의 착각의 달인들, 진리의 증발, 오직 진실에 대한 목마름이다.

 

중세시대에 막대한 십일조 수입을 가지고 갖은 비리를 저질렀던 카톨릭조차도 이제는 회개하고 그 십일조 제도를 버렸는데, 카톨릭을 개혁한 루터와 칼빈의 교리를 따른다는 한국의 개신교가 이제와서 오희려 그 비성경적인 십일조 강조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한국교회의 현 상황을 들여다 보면 십일조와 막대한 헌금수입으로 교회 목사들은 나날이 사치에 여념이 없다. 해마다 각 교단들의 가을 총회를 가보면 총대급 목사들의 최고급 차량들이 얼마나 가득한지 깜짝 놀란다. 돈 때문에 교회는 변질 되어 간다.카톨릭의 프란체스코 교황은 '교회는 가난해야 된다'라는 생각과 정 반대이다.

 

아모스때 남유다와 북 이스라엘은 모두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크게 번영했다. 남쪽엔 10대 웃시야왕 북쪽엔 13대 여로보암2세때이다. 오늘의 한국이 세계 OECD국가중 13위정도때와 같다.그래서 외적인 번영으로 북 이스라엘은 오직 자신들의 일신상의 안일만을 위하여 사치와 방탕을 일삼고(암6:4-6), 세법을 악용하여(암5;11), 가난한자를 착취하며(암2;6), 의인 학대하기를 그치지 않았다.오늘의 한국 교회와 거의 같다.

 

한국교회는 세계 모든교회가 그렇게 부러워 하는 세계 10대 교회중 1등에서 5등 까지 모두 다 있다. 전체 부동산이 80조원, 연간 헌금 총액이 4조8천억원이나 되는 세계 최고의 메머드급 수준이다.

 

하루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는 노숙자는 별관심 없어도 당회장인 목사자신 부인의 생일잔치 한끼에 1천만원을 용감하게 사용하는 통큰 목사가 있는가 하면. 3억5천만원의 벤틀리 최고급승용차 굴리는 교회목사도 있다. 또 남편목사 1억5천만원의 에쿠스, 그의 마누라는 2억원짜리 벤츠를 굴리는 목사가족도 있다.최고급 호텔에 최고급 요리로만 뱃살찌우며 회의도 한다. 3천억원 가량의 이태리 대리석이 깔린 초 호화판 교회 건물, 수십억원의 파이프 오르간이 있어야만 찬양이 나온다는 영적 포만감에 젖어있는 오늘의 교회들이다.

 

또 가짜 박사학위로  위안삼는 수 많은 목회자들이 있는가 하면, 교단 총회장 선거에 20억을 물쓰듯 쏟아붓는  목사들도 있다.  자신이 말하는 것은 무조건 아멘으로 받아야 한다고 하는 최면술에 능한 목사들도 있고,   또 교회 심령부흥회때는 부흥사가 바람잡이와 협박 공갈로 거둬들인 무수한 헌금을  담임목사와 6:4 비률로 나눠먹기식 꽃놀이패하고, 김일성 김정일에게 뒤질세라 대형교회 만들어 자기 자식들에게   세습들도 서슴없이 저질른다(그들의 입에서는 수시로 반공을 부르짖지만 실지로는  그 두 부자세습 행동을 따라한다). 60~70년대엔 미국비자신청시 직업란에 목사라고  쓰면 신뢰도가 바닥수준이라 미국비자가 아예 나오질 않는때도 있었다. 

 

또 수억원대의 년봉을 받으면서도 세금한푼 안내려고 하는 목사들때문에  기독교의 가치는 상실되고 타락되며 조소와 냉소의 대상이다. 납세의 대상이 훨씬넘는 소득을 누리면서도 납세의무를 통하여 자신들이 숨겨놓은 많은재산소유가 물밑에서 수면으로 올라올까봐 꼼수부리는 행위는 심각한 부도덕성이 아닐수 없다.  다른이들의 세금으로 국방과 교육과 치안과 복지 그리고 모든 공공시설 설치 유지 한다. 그러나 자신들은 세금에 대해 나 몰라라 하면서도 자신들의 자녀들은 학교에 다 보내고 도로위는 그들의 차들로 바람을 가른다.얄미운사람들이다.

 

그리고 또 국회의원 300명중 147명이 자칭 크리스챤이라고 자부하지만 그러나 뇌물없이 제대로 되는일이 없다. 모두가 도덕적 불감증의 고질병들이다. 마지막 초침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정신이 혼미해진다.          

 

마치 사회주의를 주체사상으로 변모시켜 김일성교 신앙으로 만들면서 세습을 정당화하는 이데롤로기로 전락해가는 드라마와 같다.  이들에겐 거짓의 더러운 때가 각질처럼 일어서고, 추잡한 악취가 진동을 한다. 이들에게서 진실은 어둠 속에 꼭꼭 숨어버리고 ‘무늬만 진실’의 탈을 쓴채 모두가 천사의 가면속에서 이속만 탐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한국교회를 물질 만능 불랙홀 속으로 85 가지 이상이나 된 수 많은 헌금들은 계속 빨아들이고 있다. 이들은 모두가 정신나간 사람처럼 물구나무 서 있고, 깊고 긴 턴널속으로 흐느적 거리며, 비만과 동맥경화에 광대 노릇까지 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어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고 돌연변이 유전자만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으니 심판때 예수의 발걸음이 어찌 그들을 정상적으로 사열할 수 있겠는가? 신약 성경에는 우리가 돈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헌신한다고 하는 것을 가르치는 구절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수 많은 헌금들로 한국교회 성도들의 혼을 빼놓고 있다.

한국교회 헌금 종류 85가지 여기클릭

성경은 우리 모두가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라고 하는데도 엉뚱하게 세례요한의 가리키는 손가락만을 물끄럼이 쳐다보고 있다. 이 희대의 블랙 코메디를 언제까지 무대에 올릴작정인가. 산상수훈의 설교들은 넘치도록 쏟아 내면서도 산상수훈의 삶은 왜 그리 보여 주지 못하고 있는가. 성도들의 가슴속에 울림과 감동으로 맑은 공기 한 모금이라도 그렇게 마시게 할수 없다는건가?  교회 본질의 생명은 나 아닌 그 누구에게라도 연탄 한 장 되어 따스함의 온기를 주는것에 있는데 말이다.

 

교회개혁자 칼빈은 말한다. 예배는 손상되고, 부정한 기복신앙들로 왜곡됨에 따라, 하나님의 거룩한 위엄이 모욕당하고 그의 거룩한 이름과 영광이 발아래 짓밟혀 있고 교회들은 자기들의 헛된 돈만을 숭배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교회 지도자들은 율법의 해석자로서 모세의 자리에 앉아 권위만 주장하며, 무리한 실천을 강요하고 스스로 본을 보이지 않으면서 지식만 팔고 있다고 했다. 바로 그러한 삯군이 인도하는 예배가 바로 그릇된 예배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한국교회 일부 목회자들은 수억원대의 연봉, 야구장같은 호화 아파트, 연중 수십차례 선교 여행, 제사장으로 둔갑시킨 자기 우상화로 질주 하면서 끝없는 소유욕으로 어지럽혀 있고, 교회는 교회대로 대형 교회와 구멍가게 같은 작은교회로 양극화 되어 있어 교인들은 예배를 즐기고 정열적이고 감성적이지만, 하나님과의 바른교제는 없고,연극과 음악회에 또한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것과 별 차이가 없다.

 

즉 교회의 예배가 엔터테인먼트화 되어 자기 충족과 축제화의 현상이 넘쳐나고 있다. 목사나 성도들은 스스로 흥분이 되고 열이 오르면 참된 예배가 되는 것 처럼 또 은혜 받은 것으로 착각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먹고 마시고 뛰놀았던때와 다름이 없다. 인간의 축제와 참다운 예배를 혼동하고있는 것이다. 예배를 드려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내겠다는 기복적 결심들도 야심차다. 그러나 결국은 그것이 잘 안될 때 그들은 서 슴없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단계로 들어간다.
 
  이같이 예배가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기호 맞추느라 정신이 없고, 또 예배의 본질이 사실상 헌금으로 이동하여 수많은 헌금들만 발생케 하고 심지어 비성경적인 일천번제나 기복적 감사 헌금들을 범람케 하면서 한국교회의 위험 수위를 넘나들게 하고 있다.

 

아예 헌금을 위한 별도의 집회에 축복을 남발하고, 예배가 헌금자들은 즐겁기 하기 위한 패키지 상품으로 진열하고, 그 부흥회 강사들은 중량급 연기자들로서 교인들의 질 좋은 호주머니를 수시로 엿본다. 교회 암흑기에 루터나 칼빈, 쯔빙글리 등 종교 개혁사의 빛나는 별들이 지금 이 시대에 다시 등장 한다해도 그들의 희대의 블랙 코메디 같은 연출을 그 무대에서 사라지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신앙은 점이 아니라 선이 되어야 한다. 점을 아무리 많이 찍어도 연결이 되지 않으면 선이 되지 못한다. 주일날 아무리 예배를 많이 드려도 형식화 된 예배, 목적이 바르지 못한 예배, 신령과 진리로 삶이 연결이 되지 않으면 점이 되고 만다. 허울 좋은 그리스도 종교인으로만 끝나고 만다.

 

교회 목회자들은 인본주의적 예측불허의 럭비공식 목회로 하나님의 거룩성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무대를 가로 지를때 그들은 하나님의 옷자락이라도 붙잡으려고 애타겠지만 모두가 헛 수고일뿐이다. 심장의 피가 실 핏줄까지 다다르지 못하니 괴사 진행은 불보듯 뻔하다.

 

따라서 이제 교회는 이 비성경적인 십일조를 통한 막대한 돈을 거둬들이는 것을 중단하고 연보개념으로만 이뤄나가야 한다(고전 9장5절).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서 10장8절에 '제사와 예물과 전제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라고 하였다.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것' 이기 때문이다.

 

현재 십일조를 적극적으로 시행하는 교파들을 보면 '한국엔 초 교파적으로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특히 성결교는 교인 의무적으로 되어 있고, 오순절 교단, 여호와 증인, 몰몬교, 안식일교등이 십일조 매우 열성적이다. 비정통교파나 정통교파나 이 십일조 앞에서는 모두가 한 목소리를 낸다. 물론 세계적으로 십일조를 폐지한 나라들의 교회들도 재정적 어려움이 있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러나 십일조는 분명히 성경적이 아니기 때문에 폐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십일조는 교회의 재정적, 현실적인 문제이기전에 성경적으로도 근거가 없고, 세계 기독교 추세와도 역행하는 제도이다. 아니 확실한 성경적 근거가 있다면 처음부터 이런 폐지론이 나올 수도 없었고 전 세계 국가들 역시 아직도 십일조를 시행하고 있었을 것이다.

 

말라기 3장7절-12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실상은 이 '쌓을' 이 단어도 성경 원문에는 없다).

 

본문은 십일조 지지자들과 특히 한국교회를 주름잡았던 부흥사들에 의해 백배, 천배, 만배, 복의 근거 까지 제시하는 성경 구절이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이 구절이 가장 좋은 투자처가 아닌가. 그 누가 골치 아픈 사업을 하겠는가? 자기 재산 십분의 일만 교회에 갖다 내면 돈을 주체 못할정도로 돈 방석에 앉을텐데.... 이같은 매력에 그 누가 눈을 감고 가만히 있겠는가? 돈 불리기 가장 쉬운곳이 교회인데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 십일조를 이야기 할 때마다 항상 등장하는 메뉴가 있는데, 그것은 십일조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돈 복을 쌓을곳이 없을만치 넘치도록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넘치도록 돈 복을 주시나 아니주시나 하나님을 시험 까지 해 보라고 한다.만일 하나님게서 십일조를 했는데도 복을 주시지 않는다면 목사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호언장담까지 한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얼마나 허풍이었는가를 성경을 좀더 자세히 연구하면 금방 알수가 있다.그래서 먼저 그 시험 이란 용어가 대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하겠다. 학문이라는 것이 어려운 전문용어의 옷을 입고 상아탑에 숨어 있으면, 대단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진리의 발견은 평범한 상식에서 시작된다는것도 알아야 할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시험' 이란 단어를 잘못 이해한데서 비롯된다. '시험하다'의 원어에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뜻이 있다. 그것은 히브리어 차라프(צרפ), 나싸(נסה), 빠한(בחנ) 등이다.

 

차라프(צרפ) (Trial)

(헬)굼나시아(gumnasia )

시련을 통한 연단(히 5;14,12;1)

나싸(נסה) (Temptation)

(헬) 페이라조(peirazo)

시험하다(test, tempt)

빠한(בחנ)(Prove)

(헬)도키마조(dokimazw)

마음과 삶으로 증명하다'

그래서 말라기 3장 10절의 '시험'은 차라프(צרפ-Trial)도 아니고, 나싸(נסה-Temptation)도 아니고 오직 빠한(בחנ- "Prove 증명하다")이다. 이같이 시험이란 용어를 잘못 번역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고 까지 부추기는 것은 성경 원어의 무지의 소치이다.

 

성경의 다른 모든 여러 곳에서도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고 할 때 '시험' 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는 나싸(נסה)(test, tempt)이다. 그러나 말라기 3장10절의 본문의 시험(우베하노니-ובחנוני)은 '나를 입증해 보여라' 는 것이다.


히브리어 성경이나 헬라어 성경은 모두 이 두 단어를 명확히 구분하여 번역하고 있지만 우리말 성경은 구분 없이 모두 '시험하다' 라고만 번역함으로서 원어에 대한 무지한자들의 혼란만 가중되면서 교인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시험이란 용어 사용에 있어서 인간은 시험 할 수 있으되 하나님은 시험의 대상이 아니다. 말라기 3장 10절의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는 십일조 많이 바치라는 흥정의 대상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을 시험하면 절대로 안된다.결국 성경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라는 말씀은 모두가 마음과 삶으로 살피고 입증하라는 말씀이지 하나님을 향하여 흥정하고 시험하라고 부추긴 경우는 한번도 없다. 그렇게 하나님을 시험하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 특히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한다면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자초하는 행위가 된다.

 

그리고 말라기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등을 돌렸던 백성이 이젠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와 관계회복과 메시아 오심에 대한 약속이다. 제사장들과 레위인이 흠이 있고 의롭지 못한 예물을 하나님께 가져왔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예물을 받지 않으셨지만 메시야가 오셔서 그들을 깨끗케 하심으로써 의로운 제물을 드리실 것이기 때문이다(말3장3절). 그 때 하나님게서는 이스라엘의 제물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열국의 제물도 받으시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면 그가 바로 바른 헌물과 제물을 드리는 온전한 제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도 십일조를 언급하고 있는 구절이 몇군데 있다.마23:23, 눅11:42, 18:12, 히7:1-10 이다.

 

(마23:23, 눅11:42, 18:12) '너희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들을 행하고 저것들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내용이다.

 

이 말씀도 십일조 열성 지지자들에 의해서 신약시대에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현미경을 들이대는 구절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구약에서와 같이 십일조 실행을 주장하려고 하신 의도가 아니라 형식을 일삼는 바리새인들을 교훈 하려는데 초점이 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십일조 생활을 보이기 위해서 박화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 드렸다. 이것은 향료들인데 보통 이런 것은 밭에 심지 않고 밭으로 사용할 수 없는 땅 한두평이나 혹은 울타리가 있을 때 음식의 향료로 사용하기 위해 거기에 박하와 회향과 근채를 심어서 십일조를 했다.

 

그런데 그들은 이렇게 조그만한것, 별 가치 없는것, 세부적인 것 까지도 십일조는 하면서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공의(公義)[미쉬파트 משפט],   인()=자비(慈悲)[헤쎄드 חסד], 신()=(信仰)[에문 אמנ] 즉 바로 신앙의 본질을 버린 그 모든 외식을 책망하신 것이다.

헬라어 원전을 살펴보면----

ouai umin, grammateiV kai farisaioi upokritai, oti apodekatoute to

우아이 휘민 그람마테이스 카이 파리사이오이 휘포크리타 호티 아포데카투테

Woe to you, scribes and Pharisees hypocrites because ye tithe the

화 있을찐저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이여! 외식하는 십일조를

 

hduosmon kai to anhqon kai to kuminon, kai afh kate ta barutera tou nomou

헤두스몬 카이 토 아네돈 카이 토 쿠미논 카이 아페 카테 타 바루테라 투 노몬

mint and the dill and the cummin and ye{haev}left the heavier things of the law,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버렸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바것들인 율법의

 

thn krisin kai ton eleon kai thn pistin tauta de edei poihsai kakeina mh afienai

텐 크리신 카이 톤 에레오온 카이 텐 피스틴 타우타 데 에데이 포이에사이 카케이나 메 아페이나이.

j udgment and mercy and -- faith but these things it behoved to do and those not to leave

의와 긍휼과 신뢰는 그러나 이것들도 행해야 했으며 저것들도 버리지 말아야 했다.

 

위의 '행하다'의 poihsai(포이에사이) aorist는 계속. 완료. 반복의 뜻을 갖지 않고 단순히

'과거동작의 때' 그 때만을 나타내는 능동형 부정시제 동사로서 원형 포이에오( poiew)에서 유래했다.

 그러니까 계속 반복해서 하라는 것이 아니고 십일조를 시행 했을때의 그 시점만을 지적하고 있는것이다.

 

그리고 afienai(에피에나이) 는 '버리다'의 뜻으로 현재 능동 부정과거 시제인데 원형은 에피에미(afihmi)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저것들 (kakeina-카케이나) 즉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도 행했었어야'했지만, 이것들'(타우타-tauta) 즉 의와 긍휼과 신뢰는 더 중요하게 행했었어야 하는 그 세부지침에 충실의 당위성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이지 꼭 그렇게 앞으로도 계속 행하라는 명령형이 아니다. 왜냐하면 동사가 부정과거 시제로서 그 때 그 행위 동작만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허지만 시기적으로 이 때까지는  예수님도 십일조를 인정하셨다고 볼수 있다.그러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바로 바로 시기와 때이다. 예수님이 십일조를 인정하시고 당위성을 두신것은 아직 예수님께서 율법의 완성인 십자가 사건 전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지시기 전은 예수님께서도 다른 율법인 할례, 안식일, 규례들도 지키셨다. 이 때는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아직 완성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구약의 율법들이 유효한 시기이며, 십일조에 대해 충실 해야함은 마땅하다.이 때엔 성전 예배도 진행 중이었으며, 제사장들과 레위인은 그들의 생활 유지를 위해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 십일조에 필요로 한 시기였다.


율법의 마침인 십자가 사건 전 까지는 예수님도 모든 율법을 지키셨다(갈4장4절). 당연히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십일조를 강조하셔야 마땅하다. 그러나 결단코 십자가 사건이후엔 십일조를 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성전이 헐리고 제사장이 없어 졌기 때문이다. 십일조가 성립되려면 분명하게 성전과 제사장이 필수 요건이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일으키리라' 이 말씀은 십일조 드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스스로 없애 버리신다는 의미이다. 성전이 없으면 레위지파의 제사장 임무도 종결 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십일조 뿐만 아니라 성전도, 안식일도, 제사장도, 할례도, 제물도, 레위인도 모두 끝난버린것이다. 여기의 사흘만에 다시 일으킬 성전은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의미한다. 주님의 몸이 부활했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율법에 속하는 십일조를 지킨다는 말인가? 예수님이 완성하신 율법을 다시 인간들이 미완성으로 만들겠다는 것인가? 십자가 사건을 무력화 시키겠다는건가?

 

초대교회를 보드래도 일반 헌금에 대한것은 언급되어 있지만 십일조 했다는 기록은 전혀 찾아 볼수가 없다. 그래서 바울도 역시 자비량으로 복음을 전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기 때문에 제자들도 사도들도 초대교회 성도들도 십일조 제도가 유대교의 다른 율법과 함께 폐지 된 것이 당연시 하였다. 그래서 신약의 모든이가 침묵하고 있다.

 

율법이 다 그리스도를 목표로 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리스도에게서 성취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함께 십일조가 바로 멈췄다. 율법은 그 자체로는 완결되지 않고, 늘 쉼이 없고, 늘 불안해서 참 안식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향해서 달리고 결국은 그리스도에게 와서 구약의 모든 약속들이 다 성취 되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동일한 하나님이 그 구원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의를 이루셨다. 그래서 율법은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과 함께 종지부를 찍었다. 그래서 지금도 유대교의 유대인 조차 생활의 법으로 삼았던 그 율법의 십일조를 시행할 수도 없고 또 시행하지도 않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믿는자들이 다른제도들은 그대로 놔두고 유독 십일조만을 계속 시행 한단 말인가.

 

따라서 한국교회가 유대교의 율법의 하나였던 그 십일조를 다시 강요하는 행위는 예수의 십자가를 무르고 다시 구약으로 돌아가서 돌성전도 세우고, 안식일도 지키고, 제사도 지내고, 할례도 지키고, 절기도 지키려고 하는 의도와 전혀 다를바 없다.


교회 운영에 대한 돈은 수단이 되어야 하는데도 목적이 되는 경우가 대다수 현재 교회의 실정이다. 그 수단을 정당화 해서 가르치는 목회자들 때문에 오늘의 교회가 바로 서지 못하는 이유중에 하나이다. 인간의 생명과 영혼은 보이지 않고 집회 참석 인원 머릿수에 비춰 돈만 계산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사람들의 머릿수가 아니라 성도들의 가슴속 심장 박동수를 세어야 된다. 막대한 십일조와 헌금에 눈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사람들의 머리 숫자만 계산하고, 정부에서조차도 동네 구멍가게를 살리기 위해 대형마트 버스 돌리는 것을 폐지 시콌는데, 더 모범을 보여야 할 교회가 대형 버스를 이용해 이 동네 저 동에 쑤시고 헤집고 돌아 다니면서 작은 교회교인들까지 집어 삼키고, 또 대형 교회들은 지방 곳곳에 지성전을 만들어 놓고 목회자 개인 목회 성공의 자랑거리로 힘을 쏟고, 대신 성도들은 빈사상태와 식물성도로 전락해 가고 식은 땀을 흘리고 있다. 정 반대의 레일위로 달려가는 열차와 다름없는 교회들로 만들어가고 있다.

 

어느 동네에 대형마트가 들어서면 그 주위의 자그만 가게 40여개가 타격받지만, 그러나 기업형 대형교회가 들어서면 그 주위의 작은교회 수백개가 문을 닫는다.그래서 한국에 자그만 교회들은 그 동네에 대형교회들이 들어 설때마다 공포감과 비명소리만 가득하다. 실지로 서울의 서초동에 어느 S대형교회가 새로 건축해 들어서니 그 주위의 작은교회 200여개가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렸다.

 

지금 한국교회는 르네쌍스가 필요하다. 애초 성도들이 생각하는 교회의 희망은 교회가 성도들의 안식처였다. 그래서 성도들의 가슴은 뛰었고, 성도들의 교회사랑 열정은 폭발하듯해서 비바람과 폭풍이 몰아칠때엔 교회는 언제나 우산이 되어주곤 했다.

 

목회자는 목회를 자기의 생명과도 같은 도덕성과 자기 신앙의 인격을 나이테처럼 쌓아 소중한 가치를 끝까지 지켜야 한다. 화장을 고친다고해서 달라지는건 별로 없겠지만 그래도 한국교회는 부활을 꾀해야 한다. 제도적으로 시스템을 새로운 정비가 필요하다. 하나님이 디자인 하신 성경적 교회 본질이 회복 되어야 한다.순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님은 돈에 대해서 부자가 천국가는 것이 밧줄이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셨다[칼빈은 여기서 낙타가 아니고 밧줄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낙타와 밧줄의 알파벳 발음이 비슷한데서 비롯됐지만 또 실지는 바늘의 실줄에는 굵은 밧줄의 표현이 자연스럽운 타당성이 있기때문이다.  kamilon(카밀론-밧줄)과 kamhlon(카멜론-낙타)] . 바울도 돈은 일만악의 뿌리라고 말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깨끗해지려면 우선 돈줄부터 끊어야 한다. 그래서 천주교는 지금도 연보라고 한다. 연보는 자기 재물을 내어 남을 도와주는 것으로 일종의 구제금에 더 가깝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은 연보를 거둬서 바울에게 내 놓았다. 교인들이 십시일반으로 교회 운영비나 교회일을 하는 자들을 위해 내어 놓는 것이 연보이다.

 

고후 8장13절에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케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케 하려 함이라 했다.

 

한국에는 5만 교회, 15만의 목회자, 860만의 성도(어떤이는 1200만이라고 하지만 이 숫자는 환상의 꿈에서 피어나는 신기루일뿐이다) 가운데 아직도 미자립교회가 36,000개나 된다. 더 나아가 세계70억인구중 하루세끼 식사 해결이 안된숫자가  9억7천만명이나 된다. 하나님이 요구하는것은 율법보다 더 중요한 '의와 긍휼과 신'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된다고 오늘도 말씀하신다.

 

새 언약의 완성이신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포함해서 모든 율법을 완성 하셨다. 은혜 받은 자는 그 은혜를 나누는 차원에서 사랑의 연보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십일조를 부지런히 잘 내서 백배 천배 만배 복받으라고 외쳐댄다. 또 십일조 영웅 록펠러의 허황된 이야기를 들려주며 십일조 했더니 복을 받아 돈 방석에 앉아 누루고 후대 자자손손 복받고 아주 잘 산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록펠러에 대해서 당시 대통령이었던 루즈벨트는 이렇게 혹평했다. '록펠러가  선행을 얼마나 많이  했든지간에 상관없이,  그가 그 수많은 재산을 쌓기 위해 그가 저질렀던 그 악행에 대해서는 절대로 용납할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록펠러! 그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행할 수 없는 악질적인 행동을 했는지 그에 대해 조금만살펴봐도 금방 알수 있다.다음은  록펠러의 그 이면에 숨겨진 악한 행동이다.                               

록펠러의 부정행위 여기 클릭

공개 설교 시간에 십일조를 안하면 저주를 받아 암이 걸리며 구원까지 받지 못한다며 갖은 으름장으로 협박과 맹독성을 품어내는 그런자들은 성도들의 가슴에 비수로 영혼을 파괴한다. 아무리 사람의 혀에는 뼈가 없다고해서 마치 뼈대 없는 집안에서 막 자란 아이처럼 거칠고 못된 막말을 함부로 내뱉는다. 강아지가 귀여운 것은 혀를 흔들지 않고 꼬리를 흔들기 때문이다. 꼬리 대신 혓바닥을 마구놀려 짖어댓다가는  당장 발길질 당하기 십상이다.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교회내의 여러 봉사직분들을 제한하고 제외시키며 믿음 없는 자들이라고 낙인 찍는 교회 갑질의 마피아들, 또 새해 연초 교회 직원 임명시 십일조 시행을 강제적 서명받는자들은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무너뜨리려는 사탄의 앞잡이들이다.어떻게 이들과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야 할지 고민이 깊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향한 의와 인과 신이 십일조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셨음에도(마23:23) 그들은 오희려 반대로 십일조가 더 중요하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예수님은 가난한자들이 복이 있다고 했지만(눅6:20) 오희려 그들은 어떤수단과 목적을 가리지 않고 돈많이 벌어 십일조 잘 내는자들이 복이 있다고 가르친다.예수께서는'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하셨는데 오희려 교회 그들은 십일조와 부담스러운 헌금으로 무거운 멍에로 짐을 씌우고 있다.

 

그래서 현재 오늘의 한국 교회는 그러한자들 때문에 기복신앙으로 심한 중병이 들어있다. 복음을 듣고 교회 등록과 동시에 신자들은 교회 조직에 촘촘히 스며 있는 기복주의적 그물망 속으로 무심코 진입해서 거대한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그 공동체의 멤버가 된 그들'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각종 힘겨운 헌금과 얽어매는 교회제도로 인하여 빛이 바랜다. 교회마다 쏟아내는 정책 메뉴들, 목회자들의 야심 찬 변덕을 감당하면서 오늘까지 지탱왔다는 것이 경이롭다. 신자들은 '신앙의 본질'을 버리고 '기복 전문인' 이 되기로 선회 한지 오래고, 목사들은 돈 생산에 매달릴 따름이다.

 

맘몬이란 배타적 울타리 안에 스스로 갇혀 물량주의의 일그러진 모습으로 진실된 신앙에서 멀리 떠나 있다. 91년전 이 땅의 교회들은 호화로운 대형 건물이 아니라 불타 버린 47개 예배당의 폐허에서 '빛과 소금' 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교회는 처참하게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자꾸 막장으로 치닫는 느낌이다. 임박한 예수 재림의 9회말과 같다.

 

목사들은 자신의 마지막 타석의 무리한 스윙으로 자신들의 목회게임을 승부처로 뒤집으려는 그런 부담스런 행동을 거침없이 오늘도 저질른다. 교회건물 짓는데 제1,2 금융권 은행 빚 10조원, 한달 이자만도 600억원.아프리카 전체 인구 6억8천만명의 절반인 3억4천만명이 한달간 먹을양식을 생명없는 흙속에 던진다. 몸 속에 '분열의 유전자, 왜곡의 DNA, 허영의 염색체' 라도 지니지 않고서야 이렇게 까지 빗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거목은 가만 있는데 바람 소리들만 요란하는 짓들이다. 20세기 교회 문맹자는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말했지만, 21세기 문맹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좀더 긴 호홉을 가질 필요가 있다.개혁은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개혁은 진리의 혁명이다. 한국교회는 진리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오늘의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본인들은 회개하지 않으면서 다른이에게 회개하라고 큰 소리 친다. 요시야왕은 율법책의 말씀을 듣고 애통하며 자기 옷을 찟고 유대민족의 죄과를 통회 했던 것처럼 한국교회에서도 하나님의 바른 진리의 생명의 말씀을 찾아야 한다.

 

나침반은 아무리 돌려도 북쪽을 가리키는 바늘이 언제나 북극성을 향하고 있다.변화를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목회자 자신의 지향점이 바뀌야 한다. 반딧불이 짙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이유가 자기 안에 빛을 간직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온전히 따뜻하게 할 수는 없지만 마음의 눈으로 세상에 온기를 나눌수 있게 해야 한다. 촛불을 세상을 향해 밝히자 하기 보다는 목회자 자신들의 마음속에 켜야 한다. 걸레는 다른 사물에 묻어 있는 더러움을 닦아내게 위해 자신의 살을 헌다. 목회자는 그 비인간화의 속살을 고민 해야된다.

 

성직자라는 직업이 원래 강하다고 하는 것은 오로지 그들에겐 아무것도 잃을게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땅도, 아파트도, 직장 의자도 없다. 신부와 승려에겐 가족도 없다. 스님은 쇠고기도 먹지 않는다. 버릴 것도 없는데 그나마 남은 육신마저 고행으로 가볍게 만든다. 역사적으로 성직자들은 가벼운 몸과 정신으로 세속의 울타리를 훌쩍 뛰어 넘곤 했다. 로마의 사자밥이 되면서도 굴하지 않았다. 카톨릭 신자들은 대원군의 칼날에 목을 바쳤다.

 

그래서 성직자는 그렇게 강하기 때문에 그들이 움직이면 세속이 긴장하고 떤다. 세상이 얼마나 흔들릴지 세상 사람들은 숨 죽인다. 심장이 두근 거린다. 그러나 안락에 빠진 목사, 부패하고 성추행하는 목사, 연봉이 몇억 혹은 몇십억 받는 자들이 이중과세라고 해서 세금도 안내려는 그들, 고상한 깃발 아래 어김없이 광기(狂氣) 에 편승해 오면서 장이 서게 하고 좌판을 깔고 판돈을 챙기는 목사들, 성경적이 아닌 십일조를 성경적인 것처럼 거짓 꾸며대며 겁을 주며 돈 없어 십일조 못하는 성도들을 왕따 시키는 위선적인 목사, 그러한 목사들 앞에는 어느 누구도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부패한 목사들이 생길까바 성경은 목사란 단어를 아예 한마디도 쓰지 않았다. 오로지 '목자'란 단어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악에 대해 비상하게 지능이 발달한 인간들은 엡4장11절 목자(원문 포이멘 poimenaV )란 단어를 '목사'로 슬쩍 둔갑시켜놓고 가진 잘못을 다 저질른다. 

 

마5:18 에서 예수님께서는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하셨고,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그것을 다 이루시었고, 다 성취 하셨다(요19:30).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뤄셨기 때문에 십자가 이후에는 구원의 길로서 십일조 기능은 완전히 종결 되었다. 구약의 피 제사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희생제사에 비하면 그림자요 예표였고 그리스도의 제사는 실체요 그 원형이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구약의 모든 제도들이 그림자 라고 했다.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다. 구약의 모든 제도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므로 없어져 버렸다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하기 때문에 히브리서에서는 모세와 그리스도 관계를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로 묘사 하면서 율법의 기능 종결에 대하여 바울보다 더 과격하게 말했다(히7장19절). 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린 희생이 율법의 모든 일점일획까지도 다 이루셨기 때문에(히7장27절), 또 옛 계명이 무익하므로 율법을 폐하셨고(히7장18절), 바울 역시 갈5:4에서 '율법으로 의롭다 하려는자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다'고 까지 말했다.

 

종말론적인 성취와 폐지,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것이 성취되므로 구약의 모든 제도들이 폐지된 것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영화에서 실제가 됐다. 옛 언약의 약속과 선지자의 증거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되고 종말론적으로 성취됐다. 옛 질서는 해소되고 제거되고 없어져 버려서 전혀 새로운것이 생긴 것이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지막으로서 그리스도가 율법을 다 지키고 성취하므로 십일조까지 폐쇄해 버렸다. 그리스도가 성취 했을 뿐만 아니라 율법의 모든 정죄를 다 담당 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십일조)이 그리스도를 믿는자들에게서 적용되지 않는다.

 

대신 빚을 다 갚아 주었기 때문에 빚쟁이의 빚 메이는데서 끝났음과 마찬가지이다. 모든 율법(십일조)이 종결되고 그 세력이 파괴 돼서 더 이상 그것이 나에게 구속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완전 무력화 돼 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할례도 받을 필요가 없고, 안식일도 지킬필요가 없고, 절기도 지킬 필요가 없고, 십일조까지 해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옛 언약은 새 언약이 옴으로 자동 폐기 되었다. 전자 제품도 신제품이 나오면 옛날 제품은 모두 폐기하기 마련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십일조)의 마침이고(롬10장4절) 완성인데도, 그래도 옛 언약의 백성들은 제사 제도와 십일조등을 계속 할 것을 알고, 하나님은 성전 휘장을 위에서 아래로 찟고 자신의 심장을 내 보이시면서 물리적 방법으로 완전히 폐지 하셨다. 성전이 있는한 레위 제사가 계속 될 것이기 때문에 AD 70년에는 로마의 디도 장군을 들어 성전을 옹호하던 유대인 110만명을 죽여버렸고 예루살렘 성전을 완전히 훼파시켰다.


그 후 성전 재건은 아직도 이뤄지지 못했고 또 시온주의 결과로 유대인들이 2차 대전후 팔레스틴에 귀환하여 이스라엘을 세웠어도 아직도 성전많큼은 세울수가 없다.성전이 있으면 십일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전만 아니라 제사장 가문을 완전히 허물어 버리심으로 지금까지도 사독의 뒤를 이은 제사장의 후예를 확인해 낼 길이 없다. 그들의 성씨가 코헨(כהן) 이란 사람을 찾아 제사장으로 세울 수도 있다. 왜냐하면 코헨은(כהן)히브리어로 제사장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헨(כהן)이라는 성씨를 가진 자도 찾을 길이 없다.

이 십자가 완성 때문에 한국만 제외한 세계 모든 교회가 이 사실을 깨닫고 십일조를 오래전에 완전 폐지하였다. 한국 교회는 속히 개혁과 회복이 필요하다. 가장 시급한 일이 이 십일조 제도를 중단 해야 한다. 그리고 맘몬 우상을 배격해야 할것이다.


어둠이 아무리 길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아침이 오고야 만다.

누군가가 나무에게 물었다.
'가을이 되면 잎파리를 아름답게 물들이는 이유가 무엇이냐?
나무가 대답했다. 우리에게도 그리움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높은 산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도 강물은 저 혼자 길을 만들어 바다에 이른다.


 비록 이제 한국교회는 가시밭에 휩쌓여 상처투성 일지라도 필히 개혁을 이뤄내야 산다. 과거 종교 개혁자들에게도 가시가 있었기에, 그 가시가 종교개혁을 이뤄냈다. 가시에 찔리면 고통스럽지만 그럴수록 교회는 든든히 바르게 서 간다. 동풍이 불면 서쪽 가시에 찔리고, 서풍이 불면 동쪽 가시에 찔리고, 가시에 찔리울수록 교회는 진리의 빛을 더 발하게 되는것은 개혁이라는 치료약을, 우리 영혼에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 교회는 개혁의 묘판이 속이 재 편성 되어야 한다. 훗날 이 세상의 아름다운 소풍을 마치고 하늘나라로 돌아가서 그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라고 할 수 있어야 할것이다.


출처 : `예수 신앙 프리즘`
글쓴이 : 고동엽 블러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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