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는 분명히 비성경적이다. 이 십일조 제도는 처음 미국 선교사들로부터 우리 한국 교회에 들어 왔다. 그러면서 또한 그들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절대 순종도 함께 배웠다.그래서 지금도 역시 '십일조'에 관한 이야기는 비판없는 성역화로 어느 누구도 감히 접근하지 못하는 절대적 우상화로 변모되어 있다. 하나의 지식의 파편이 대한민국 교회 모든 성도들의 뇌리에 절대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권한을 쥐고 있는 교회 목사들의 권위와 수입에 직결 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래 이 십일조 제도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중동지방 전역에서 행해졌던 고대 관습인 일종의 세금형태로서 당시 모든 국민은 누구나 납세 의무를 지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고대 근동학이나, 고문서학, 사회인류학, 고대지리학, 고대역사학등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 전문 분야를 전공한 학자가 거의 전무 하다. 설상 그것이 있다손 치도래도 한국 교회 풍토상 에서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희박하다. 이러한 베일속에 가려져 있는 이 분야를 속속히 해부해 들춰낸다는 것은 어느면에서도 보장받을수 없는 매우 위험스런 부담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가 다 그렇지는 않지만 베일속에 숨겨 있는 것을 벗기고 나면 허상만 남기 마련이다. 이 허상을 포장하여 이용하는 기독교계의 지도자들은 73%의 샤머니즘과 신비주의, 기복신앙만을 양산하고 있다. 이제는 그런 요소들을 도려내는 대 수술이 필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말라기 3장 10절]"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
[본문에 히브리어 및 헬라어 원문이 안보이고 네모로만 나타나면 여기를 클릭 해서 폰트를 설치해야 원문을이 나타난다.] (히브리어 음성듣기 클릭)
세계 기독교인구는 22억 7천만명이다. 이 많은 기독교인들이 '십일조제도'는 분명히 성경적이 아니기 때문에 과거 시행하였던것 조차도 모두 폐지시켜 버렸는데도, 유독 한국교회에서 많큼은 이 십일조 제도 시행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는데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망원경을 통해서 넓게 보아야 할 구속사적인 성경을 특징적인 몇 구절의 현미경적 관찰때문에 하나의 프리즘 안에서 굴절되고 채색된 해석에 가늠 한다는 것이 매우 우려된다. 좀더 심도 있고 깊이 있는 해석의 갈증을 느끼져지만, 사람은 저마다의 빛깔과 향기로 피어난 자신들만의 지식의 완성작품들이라고 포장한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교회는 성경 말씀 착시 이 현상을 자신의 평가 방정식에 집어 넣고 해석 하기 때문에, 네모난 바퀴로 굴러가는 힘든 교회가 되지 않을수가 없다.
원래 십일조 제도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그들의 신앙행위 표현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 십일조는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고대 근동 지방의 많은 나라 즉 로마, 그리이스, 시리아, 카르타고, 우가리트 셈족 등에서 노동이나 전쟁 전리품으로 10분의 일 바치는 것을 문화적 관습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종교적뿐만 아니라 세상의 통치자들도 일종의 세금의 형태로서도 강제적 수탈했다.
삼상8장 5절 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에게도 왕을 세워달라고 사무엘에게 요구했다. 그 때 사무엘은 '만일 너희에게 왕을 세우면 너희들이 왕이나 궁정관리에게 십일조를 바쳐야 된다(삼상8장 15절)' 라고 하는 것을 보면 당시에 십일조가 왕에게 십일조를 바쳤음을 알수 있다(삼상8장15절-17절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궁정 관리와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너희 양떼의 십분의 일을 가져 갈 것이며 너희는 그 종이 될 것이다').
고대 세속 종교에서 그들의 신에게 10분의 일을 바치는 의미는 신은 땅의 소유자이며, 인간은 그 땅을 빌어서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라는 사상이 깊게 자리 하면서 십일조 기원을 삼고 있다. 또 그들은 자기들의 왕을 하늘이 내린 신의 아들이라고 인정하고, 신으로 숭배 했기 때문에 왕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이다.
창세기 47장 24절에 보면 애급인들은 바로왕에게 십분의 이를 바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같이 이 십일조 제도는 율법에 정식으로 명시하기 이전에도 모든 열방에서 보편적으로 실시 하고 있었다.
다음은 구약 성경중 십일조가 등장하는 구절들이다.
먼저 (창 14:18-20) 은 십일조가 성경 처음으로 등장하는 곳으로서, 살렘왕 멜기세댁이 빵과 포도주를 갖고 나와서 전쟁에서 승리하여 돌아오는 아브라함에게 축복한다.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전쟁에서 취한 전리품 중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댁에게 드리는 장면이다. 그래서 어떤이는 이 십일조 제도는 이미 율법이 있기 전부터 존재했다 라고 하면서 이 구절을 들이댄다.
그러나 이곳의 십일조는 멜기세댁의 제사장 직분이 레위지파가 아닌 유다 지파로서 영원한 대제사장, 즉 장차 오실 메시야의 모형과 또한 멜기세댁이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것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십일조는 분명하게도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적용돼야 된다(레27장30-33, 신12장5-12절). 그런데 여기 아브라함의 십일조는 하나님의 율법을 받기 전 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 하나님께서 완전한 규례로서의 십일조는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이나, 상업 혹은 경제적으로 얻은 이윤에서도 될 수 없다는데 있다.
오직 하나님 규례의 십일조는 땅의 소출과 가축 에만 한정 되어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은 어떤 이유든 간에 오늘날 교회가 주장하는 그러한 십일조가 될 수가 없고 또 하나님 율법의 십일조와는 하등의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이 곳 아브라함의 십일조 이야기는 당대 이웃나라 보편화된 문화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는 개인적 차원의 십일조일 뿐이다. 그래서 율법 전에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십일조가 있었다고 하는 주장은 맞지 않다.^
두 번째로 (창28:20-22)의 십일조 내용은 야곱이 하란으로 피난 도중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시고 나중에 아버지집에 돌아오도록 하시면 자신의 모든 것 중에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한 조건적 내용이다. 그러나 그 후 야곱이 전에 맹세한 대로 십일조를 바쳤다는 기록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하나님은 조건적 값싼 흥정의 대상이 아니다. 이 곳 야곱의 십일조 이야기도 당대 이웃나라 문화의 관습이다
세 번째로 (레위기 27:30-33)에서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이곳에서 십일조 개념을 완전히 명문화 시킨다(레 27:34). 이것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율법=왕상2장3절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개역개정>)이다.(느 12:44)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돌릴 것 곧 율법에 정한 대로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를 모든 성읍 밭에서 거두어 이 곳간에 쌓게 하였노니<개정개역>....
십일조 제도가 정식 규범과 율례으로서 모세 율법에 등장하고, 많은 지파들이 땅의 소산을 얻을수 없는 레위 지파의 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의식법이나 시민법과 함께 십일조가 주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핵심은 십일조는 돈이 아니고 '오직 땅에서 나는 곡식과 가축에 대해서만 한정한다' 라고 세부적으로 아예 못을 박는다. 또 바치는 자들의 맘대로 이러쿵 저러쿵 하지 못하기 위해 막대기 밑을 통과하는 가축의 열번째를 뽑아서 드리도록 한다. 그것을 어기는 사람에겐 벌금으로 20%인 가축 두 마리를 더 내도록 하였다.
네 번째로 (민수기 18:26) 는 십일조의 십일조인데 이것은 제1의 십일조이다. 십일조를 받는 레위인도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아론 제사장에게 바친다(민18:26-29). 이것도 역시 돈이 아니고 농산물이다(민18:27).
다섯 번째로 (신명기 12:4-19, 신명기 14:22-29, 26:12-15) 에서는 백성들이 하나님이 택하신 그 장소로 십일조를 가져가서 잔치를 베푸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고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인 나그네, 고아, 과부들 뿐만 아니라 자기친족, 종들까지도 그 십일조를 나누어 함께 즐거워 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제2의 축제의 십일조라고 할수 있다.
그리고 안식년을 기준으로해서 제3년차와 제6년차에는 자기가 사는 동네에서 이웃을 위한 구제금으로도 사용했다. 예를들면, 현재 한국에 점심을 굶는 초등학생만 60만명, 절대 빈곤층은 500만명이 넘는다. 오늘날로 말하면 십일조를 교회에만 집중하지 말고 이같이 가난한 이들에게 함께 하라는 그러한 내용이다(레14:28).
더 시야를 널펴보면 세계 65억 인구 가운데 하루세끼 밥을 해결 안되는 인구가 9억 7천만명이나 된다. 이런이들과도 같이 서로 나누라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에 하나님은 복을 주신다고 했다. 이것은 곧 사회보장 복지의 혜택이다. 기부의 천사 지누션 부부와 같이 말이다. 여기클릭참조
이것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나눔을 통해 더불어 사는 것을 의미한다. 허지만 세월이 많이 지남에 따라 이 십일조는 점차적으로 변질 되어 갔다.아모스는 사마리아인들의 하나님께 대한 배역행위를 진술하면서 그들의 벧엘제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는 전적으로 자기 자신들은 즐겁기 하기 위한 행동이라고 꼬집는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하면서 아모스는 십일조와 관련된 그들의 잘못된 신앙을 꼬집는다(아모스 4:4). 그들은 율법 의식법에 명시된 십일조를 통해서 복을 받을수 있다고 생각하고 더 많은 복을 받기 위해 '매 3년마다 드렸던 십일조를 3일에 한 번씩으로 앞당겨 더 많이 시행했던 것이다. 더 많은 복을 받아 쌓을곳 없을 정도로 돈 뭉치를 내려 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특심하게 하나님께 더 많은 십일조를 바쳤을지라도 성경대로 바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허사라는것을 아모스는 사람들의 기복적인 십일조를 비웃었다.
원래 구약이 말하는 십일조는 성전 제사를 맡은 레위인이나, 과부들이나, 어려운사람들과 함께 나누어먹는 것이었다. 또 십일조 대상은 반드시 밭의 소출과 가축만으로 한정 되었다(레27:30, 신12:17, 14:23, 느13:5,12). 그러나 성전이 너무 먼 경우에는 일단 돈으로 바꾸어 가지고 성전에 가서 다시 음식물로 바꾸어 십일조를 드리게 했다(신14:24-26). 따라서 십일조를 내는 사람들은 당연히 '먹거리'를 생산해 내는 농민과 목축업자들만이 한정 되었다. 그 외의 다른 직업인들은 십일조가 면제되었다. 그래서 목수였던 예수님도, 어부였던 제자들도 십일조는 해당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성전세는 십일조와는 달리 모든 백성이 납부 의무가 있었다(출30:12-15).그래서 당시 통용되는 돈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은 납부 하셨다(마17:27). 십일조는 구약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족인 제사장들의 생계수단이었기 때문에 필요했지만, 그러나 성전과 제사장이 없는 초대교회에서는 십일조를 일절 시행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십일조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이 없는것이 그 이유이다.
어째든 십일조는 성경대로 하자면 반드시 성전과 제사장이 있어야 있어야한다. 왜냐하면 십일조는 분명히 성전에서만 또 제사장을 통해서만 드릴수 있기 때문이다. 성전도 제사장도 없는 초대교회가 이 십일조를 시행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헛되게 하고 무력화 하는것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사도 행전은 이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지나 주후 4세기에는 교회가 구체적으로 조직화 되면서, 결국 인간들의 돈 욕심이 발동이 돼, 다시 십일조 제도를 도입했다. 그후 거의 중세 1000년 동안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허지만 이때까지도 십일조를 '돈'많큼은 제외시키고 오직 토지소출과 가축에만 거둬들였다. 십일조 대상은 언제나 먹거리로 한정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3세기에 이르러서 교회의 부패와 타락이 최고조로 달해갔고 엄청난 변질이 되어 이 십일조가 먹거리를 포함해서 모든 소득으로 확대 되었다. 그때부터 교회는 적극적으로 돈의 꿀맛을 알게 되었고 이제는 시도때도 없이 각종 집회를 열어 돈을 거둬들이니, 돈이 교회마다 넘쳐 심지어 십일조를 보관하는 '십일조 금고' 까지 만들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후 초대교회에서도 완전 폐지 되었던 그 십일조 제도가 중세 카톨릭 시대에 다시 활개를 쳐기 시작해서 얄퍅하고도 아주 교묘한 수법으로 특혜와 특권, 기름진 음식, 그리고 위선이라는 거대한 뱃살을 부풀렸다.
허지만 종교개혁 이후에 교회는 국가와 분리 되면서 십일조 왕국인 한국교회만 제외한 대부분 세계 모든 교회가 이 십일조 제도를 공식적으로 완전 폐지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 이후(1789)와 나머지는 1848년에 이 십일조 제도를 모두 철폐하였다. 더 이상 그 십일조 가지고 교회가 교인들에게 사기 칠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 폐지한 나라들이 아래와 같다.
여기서 중요한 한가지는 이들 나라들의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은 이 십일조 제도가 신약 교회에서는 비성경적이라는 그 진리를 교리에까지 합의에 도출해 냈다는 것이다. 이들 나라들의 교단과 신학들이 한국교단과 한국신학보다 뒤떨어져서 이같은 합의에 도달했느냐는 것이다. 세계 기독교 인구 22억7000만명 가운데 한국 기독교인은 불과 860만명으로서 263분의 1 뿐이 되질 않는다(정부 통계청 발표).
특히 한국의 신학자 및 신학교 교수들이나, 목회자들은 대부분 서구나 미국 등에서 신학 공부할 때에 그 각 나라들의 교회예배 참석을 통해서 그 곳 교회들은 '십일조 제도'가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한국 십일조 부조리에 대해 입을 열지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끙끙 앓고만 있다. 입을 열었다간 당장 교단으로부터 교수 면직과 목회면직을 동시에 바로 퇴출당하기 때문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알고도 모른척 한다. 그러나 당당하고도 용기 있는 몇몇 신학자들이나 교수, 목회자들은 십일조 제도 폐지를 주장하다가 교단 및 신학교, 교회로부터 퇴출 당한자들이 현재에도 적지 않음을 알수있다.
지금 현재 한국교회에서는 교파와 교단을 초월한 모든 교회가 이 십일조 제도가 초교파적으로 정착되어 있다. 교단과 교단, 교파와 교파 사이에는 교리적으로 조그만 차이가 있어도 피투성이가 될정도로 싸운다. 내가속한 장로교만 하드래도 300개교단으로 싸워 찢어 갈라져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십일조 제도많큼은 모두가 단합하여 한 목소리가 되어 있다. 여기엔 어떤 이의가 없다.
이러한 현상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성경 구절이 바로 구약의 말라기 3장8절-10절이다. 본인도 과거에 부흥집회를 통해서 수없이 들었던 말씀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 말씀이 기록될 당시의 사회적인 배경과 그 말씀 전후의 유기적인 문맥관계를 고려해서 해석 해야 되는데도 불구하고, 특정 구절들만 떼어서 자신들의 신앙관에 애써 합리화 시켰다.
말라기 3장8절-9절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덕질 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 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곧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한것으로 몰아부쳤다. 이것 때문에 콧물 눈물 흘리며 회개한적이 수없이 많다.
그러나 이곳 말3:8-10 절의 바른 해석은 느혜미아서 13장이 자세히 설명한다. 왜냐하면 말라기와 느혜미야는 동시대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 내용중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십일조 도둑은 백성들이 십일조를 하지 않아서 도둑이 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제사장들이 십일조를 몰래 훔쳐 빼돌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둑이라고 하셨던 것이다.
바벨론포로에서 돌아온 느혜미야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에게 명령했다. 백성들이 십일조와 헌물을 가져오면 제사장들은 그것들을 받아서 성전옆에 있는 성전 창고에 거둬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당시 제사장 엘리야십과 도비야라는 사람 둘이 서로 공모해서 그 성전 창고 바로 옆에 또 다른 자기들의 개인 창고를 만들어 놓고 백성들이 십일조 및 각종 식량과 예물들을 가져오면 그것들을 성전 창고에 넣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개인창고로 계속 빼 돌렸다.
그래서 결국 그 성전창고에는 식량이 바닥이 나게 된 것이다. 오늘날 현대 어느교회의 목사가 교회돈을 무수히 착복해서 치부하는 것과 같다.그래서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성전 일을 버리고 자기들의 먹고 살길을 찾아 도망가는 일이 발생하였다. 최초로 제사장에 의한 십일조 도둑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내용이 바로 십일조 도둑 사건이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에서는 성도들이 십일조를 한번이라도 못내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했다고 몰아 세우니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십일조를 못내서 도둑이 아니라 제사장 엘리야십과 도비야가 백성들이 바친 십일조를 자기 개인 창고로 빼돌렸기 때문에 도둑 사건이 된 것을 교인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다.하나님은 분명하게도 엘리야쉽과 도비야가 도둑이라고 하는데 목사들은 그것을 바꾸어 교인들을 도둑이라고 몰아세운다. 그리고 그 내용이 자세히 해석되어 있는 느혜미아 13장을 설명하지도 않는다.오히려 그 내용을 교인들이 알아차릴가봐서 전전긍긍한다.얄팍한 성경 지식의 편협자들이다. 하나님의 뜻의 착각의 달인들이다.
중세시대에 막대한 십일조 수입을 가지고 갖은 비리를 저질렀던 카톨릭조차도 이제는 회개하고 그 십일조 제도를 버렸는데, 카톨릭을 개혁한 루터와 칼빈의 교리를 따른다는 한국의 개신교가 이제와서 오희려 그 비성경적인 십일조 강조 하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한국교회의 현 상황을 들여다 본다면 십일조와 막대한 헌금수입으로 교회 지도자들은 나날이 사치에 여념이 없다. 교회는 변질되어 간다.
아모스때 남유다와 북 이스라엘은 모두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크게 번영했다. 남쪽엔 10대 웃시야왕 북쪽엔 13대 여로보암2세때이다. 특히 외적인 번영으로 북 이스라엘은 오직 자신들의 일신상의 안일만을 위하여 사치와 방탕을 일삼고(암6:4-6), 세법을 악용하여(암5;11), 가난한자를 착취하며(암2;6), 의인 학대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한국교회는 세계 모든교회가 그렇게 부러워 하는 세계 10대 교회중 1등에서 5등 까지 모두 다 있다. 또 세계에서 유일하게 새벽기도를 통하여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자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다.전체 부동산이 80조원, 연간 헌금 총액이 4조8천억원이나 되는 메머드급 한국 교회이다. 하루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는 노숙자는 별관심 없어도 당회장 목사 부인의 생일잔치 한끼에 1천만원을 용감하게 사용하는 통큰 목사. 3억5천만원의 벤틀리 최고급승용차, 으리 으리한 최고급호텔에 최고급 요리로 식사하면서 회의하는 목사들, 3천억원 가량의 이태리 대리석으로 짓는 초 호화로운 교회 건물. 수십억원짜리 파이프 오르간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영적 포만감에 젖어있는 교회들이다.
마치 사회주의 사상을 주체사상으로 변모시켜 김일성교 신앙으로 만들면서부터 세습을 정당화하는 이데롤로기로 전락해가는 드라마와 같다. 이들은 모두가 천사의 가면속에서 속이고 속고, 자기의 이속만 탐하는 자들이다.이들은 한국교회를 물질 만능 불랙홀 속으로 85가지 이상이나 된 수 많은 헌금들은 계속 빨아들이고 있다. 이들은 모두가 정신나간 사람처럼 물구나무 서 있고, 깊고 긴 턴널속으로 흐느적 거리며, 비만과 동맥경화에 광대 노릇까지 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어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고 돌연변이 유전자만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으니 예수의 발걸음이 어찌 그들은 정상적으로 사열할 수 있겠는가. 신약 성경에는 우리가 돈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헌신한다고 하는 것을 가르치는 구절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수 많은 헌금들이 한국교회 성도들의 혼을 빼놓고 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라고 하는데 엉뚱하게도 세례요한의 가리키는 손가락만을 물끄럼이 쳐다보고 있다. 이 희대의 블랙 코메디를 언제까지 무대에 올릴작정인가. 산상수훈의 설교들은 넘치도록 쏟아 내면서도 산상수훈의 삶은 왜 그리 보여 주지 못하고 있는가. 그렇게도 성도들의 가슴속에 울림과 감동으로 맑은 공기를 언제까지 조금이라도 마시울수 없게 만들작정들인가. 교회 본질의 생명은 나 아닌 그 누구에게라도 연탄 한 장 되어 따스함의 온기를 주는데 말이다.
교회개혁자 칼빈은 그의 책에서 예배는 손상되고, 부정한 기복신앙들로 왜곡됨에 따라, 하나님의 거룩한 위엄이 모욕당하고 그의 거룩한 이름이 더렵혀졌으며, 그의 영광이 발아래 짓밟혀 있고 사람들은 자기들의 허구를 숭배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그 시대 지도자들은 율법의 해석자로서 모세의 자리에 앉아 권위만 주장하며, 무리한 실천을 강요하고 스스로 본을 보이지 않으면서 지식만 팔고 있다고 했다.바로 그러한 삯군이 인도하는 예배가 바로 그릇된 예배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한국교회 일부 목회자들은 수억원대의 연봉, 야구장같은 호화 아파트, 연중 수십차례 선교 여행, 제사장으로 둔갑시킨 자기 우상화로 질주 하면서 끝없는 소유욕으로 자기 자신을 어지럽히고 신음하고 있다. 교회는 교회대로 도시형 대형 교회와 시골동네 구멍가게 같은 작은교회로 양극화 되어 있고, 교인들은 예배를 즐기기는 하지만 하나님과의 만남은 없고, 정열적이고 감성적인 예배이지만, 연극을 관람하거나 음악회에 참석하거나 감동적인 영화나 드라마를 보거나 강의를 듣는것과 별 차이가 없다.
교회 성장 위주와 개 교회 주의가 출혈 경쟁적으로 확산되면서 예배가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기호 맞추느라 정신이 없고, 예배의 본질이 사실상 헌금으로 이동하여 수많은 헌금들만 발생케 하고 심지어 비성경적인 일천번제나 기복적 감사 헌금들을 범람케 하면서 위험 수위를 넘나들고 있다.
아예 헌금을 위한 별도의 집회에 축복을 남발하고, 예배가 헌금자들은 즐겁기 하기 위한 패키지 상품으로 진열하고, 그 부흥회 강사들은 중량급 연기자들로서 교인들의 질 좋은 호주머니를 수시로 엿본다. 교회 암흑기에 루터나 칼빈, 쯔빙글리 등 종교 개혁사의 빛나는 별들이 지금 이 시대에 다시 등장 한들 그들의 희대의 블랙 코메디 같은 연출을 그 무대에서 사라지게 할 수 없을 것 같다.
신앙은 점이 아니라 선이 되어야 한다. 점을 아무리 많이 찍어도 연결이 되지 않으면 선이 되지 못한다. 주일날 아무리 예배를 많이 드려도 형식화 된 예배, 목적이 바르지 못한 예배, 신령과 진리로 삶이 연결이 되지 않으면 점이 되고 만다. 허울 좋은 그리스도 종교인으로만 끝나고 만다.
교회 목회자들은 인본주의적 예측불허의 럭비공식 목회로 하나님의 거룩성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무대를 가로 지를때 그들은 하나님의 옷자락이라도 붙잡으려고 애타겠지만 모두가 헛 수고일뿐이다. 심장의 피가 실 핏줄까지 다다르지 못하니 괴사 진행은 불보듯 뻔하다.
따라서 이제 교회는 이 비성경적인 십일조를 통한 막대한 돈을 거둬들이는 것을 중단하고 연보개념으로만 이뤄나가야 한다(고전 9장5절).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서 10장8절에 '제사와 예물과 전제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라고 하였다.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것' 이기 때문이다.
현재 십일조를 적극적으로 시행하는 교파들을 보면 '한국엔 초 교파적으로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특히 성결교는 교인 의무적으로 되어 있고, 오순절 교단, 여호와 증인, 몰몬교, 안식일교등이 십일조 매우 열성적이다. 비정통교파나 정통교파나 이 십일조 앞에서는 모두가 한 목소리를 낸다. 물론 세계적으로 십일조를 폐지한 나라들의 교회들도 재정적 어려움이 있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러나 십일조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폐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십일조는 교회의 재정적, 현실적인 문제이기전에 성경적으로도 근거가 없고, 세계 기독교 추세와도 역행하는 제도이다. 아니 확실한 성경적 근거가 있다면 처음부터 이런 폐지론이 나올 수도 없었고 전 세계 국가들 역시 아직도 십일조를 시행하고 있었을 것이다.
말라기 3장7절-12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실상은 이 '쌓을' 이 단어도 성경 원문에는 없다).
본문은 십일조 지지자들과 특히 한국교회를 주름잡았던 부흥사들에 의해 백배, 천배, 만배, 복의 근거 까지 제시하는 성경 구절이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이 구절이 가장 좋은 투자처가 아닌가. 그 누가 골치 아픈 사업을 하겠는가? 자기 재산 십분의 일만 교회에 갖다 내면 돈을 주체 못할정도로 돈 방석에 앉을텐데.... 이같은 매력에 그 누가 눈을 감고 가만히 있겠는가? 돈 불리기 가장 쉬운곳이 교회인데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 십일조를 이야기 할 때마다 항상 등장하는 메뉴가 있는데, 그것은 십일조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돈 복을 쌓을곳이 없을만치 넘치도록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넘치도록 돈 복을 주시나 아니주시나 하나님을 시험 까지 해 보라고 한다.만일 하나님게서 십일조를 했는데도 복을 주시지 않는다면 목사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호언장담까지 한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얼마나 허풍이었는가를 성경을 좀더 자세히 연구하면 금방 알수가 있다.그래서 먼저 그 시험 이란 용어가 대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하겠다.
이러한 발상은 '시험' 이란 단어를 잘못 이해한데서 비롯된다. '시험하다'의 원어에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뜻이 있다. 그것은 히브리어 차라프(צרפ), 나싸(נסה), 빠한(בחנ) 등이다.
{차라프(צרפ)는 (Trial)(헬)(gumnasia )(히 5;14,12;1) 시련을 통한 연단} 나타내고, {나싸(נסה)는 Temptation (헬) 페이라조(peirazo) 즉 '시험하다(test, tempt)'} 의 뜻이지만, {빠한(בחנ)은(Prove) (헬)도키마조(dokimazw) 즉'마음과 삶으로 증명하다'} 로 구분된다.
그래서 말라기 3장 10절의 '시험'은 차라프(צרפ-Trial)도 아니고, 나싸(נסה-Temptation)도 아니고 오직 빠한(בחנ- "Prove 증명하다")이다. 이같이 시험이란 용어를 잘못 번역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고 까지 부추기는 것은 성경 원어의 무지의 소치이다.
성경의 다른 모든 여러 곳에서도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고 할 때 '시험' 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는 나싸(נסה)(test, tempt)이다. 그러나 말라기 3장10절의 본문의 시험(우베하노니-ובחנוני)은 '나를 입증해 보여라' 는 것이다. 히브리어 성경이나 헬라어 성경은 모두 이 두 단어를 명확히 구분하여 번역하고 있지만 우리말 성경은 구분 없이 모두 '시험하다' 라고만 번역함으로서 혼란만 가중되고 있다.
그러나 같은 예로 고후 13장5절에서는,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나쑤-נַסּו) 너희 자신을 살펴보라(위하바하누-וְהִבָּחֵנוּ)' 즉 '페이라제테(peirazete)' 와 '도키마제테(dokimazete)' 가 구별되어 사용되고 있다. נַסּוּ אֶת־נַפְשְׁכֶם אִם־בֶּאֱמוּנָה אַתֶּם עֹמְדִים וְהִבָּחֵנוּ 위하바하누 이메딤 아템 베에므나 임 나파쉐켐 에트 나쑤 eautouV peirazete ei este en th pistei eautouV dokimazete yourselves, Test if you are in the belief ! yourselves ! Prove
인간은 시험 할 수 있으되 하나님은 시험의 대상이 아니다. 말라기 3장 10절의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는 십일조 많이 바치라는 흥정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을 시험하면 절대로 안된다.결국 성경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라는 말씀은 모두가 마음과 삶으로 살피고 입증하라는 말씀이지 하나님을 향하여 흥정하고 시험하라고 부추긴 경우는 한번도 없다. 그렇게 하나님을 시험하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 특히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한다면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자초하는 행위가 된다.
그리고 말라기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등을 돌렸던 백성이 이젠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와 관계회복과 메시아 오심에 대한 약속이다. 제사장들과 레위인이 흠이 있고 의롭지 못한 예물을 하나님께 가져왔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예물을 받지 않으셨지만 메시야가 오셔서 그들을 깨끗케 하심으로써 의로운 제물을 드리실 것이기 때문이다(말3장3절). 그 때 하나님게서는 이스라엘의 제물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열국의 제물도 받으시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면 그가 바로 바른 헌물과 제물을 드리는 온전한 제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도 십일조를 언급하고 있는 구절이 몇군데 있다.마23:23, 눅11:42, 18:12, 히7:1-10 이다.
(마23:23, 눅11:42, 18:12) '너희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들을 행하고 저것들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이 말씀도 십일조 열성 지지자들에 의해서 신약시대에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구절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구약에서와 같이 십일조 실행을 주장하려고 하신 의도가 아니라 형식을 일삼는 바리새인들을 교훈 하려는데 초점이 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십일조 생활을 보이기 위해서 박화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 드렸다. 이것은 향료들인데 보통 이런 것은 밭에 심지 않고 밭으로 사용할 수 없는 땅 한두평이나 혹은 울타리가 있을 때 음식의 향료로 사용하기 위해 거기에 박하와 회향과 근채를 심었다.
그런데 그들은 이렇게 조그만한것, 별 가치 없는것, 세부적인 것 까지도 십일조는 하면서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의(義)=공의(公義)[미쉬파트 משפט], 인(仁)=자비(慈悲)[헤쎄드 חסד], 신(信)=(信仰)[에문 אמנ] 즉 바로 종교의 본질을 버린 그 모든 외식을 책망하신 것이다.
헬라어 원전을 살펴보면---- ouai umin, grammateiV kai farisaioi upokritai, oti apodekatoute to 우아이 휘민 그람마테이스 카이 파리사이오이 휘포크리타 호티 아포데카투테 토 Woe to you, scribes and Pharisees hypocrites because ye tithe the 화 있을찐저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이여! 외식하는 십일조를
hduosmon kai to anhqon kai to kuminon, kai afh kate ta barutera tou nomou 헤두스몬 카이 토 아네돈 카이 토 쿠미논 카이 아페 카테 타 바루테라 투 노몬 mint and the dill and the cummin and ye{haev}left the heavier things of the law,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버렸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바것들인 율법의
thn krisin kai ton eleon kai thn pistin tauta de edei poihsai kakeina mh afienai 텐 크리신 카이 톤 에레오온 카이 텐 피스틴 타우타 데 에데이 포이에사이 카케이나 메 아페이나이. j udgment and mercy and -- faith but these things it behoved to do and those not to leave 의와 긍휼과 신뢰는 그러나 이것들도 행해야 했으며 저것들도 버리지 말아야 했다.
위의 구절에서 '행하다'의 포이에 사이(poihsai) aorist는 계속. 완료. 반복의 뜻을 갖지 않고 단순히 '과거동작의 때' 그 때만을 나타내는 능동형 부정시제 동사로서 원형 포이에오(poiew)에서 유래했다. 그러니까 계속 반복해서 하라는 것이 아니고 십일조를 시행 했을때의 그 시점만을 지적해서 말씀하고 있는것이다.
그리고 에피에나이(afiena)는 '버리다'의 뜻으로 현재 능동 부정과거 시제인데 원형은 에피에미(afihmi)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저것들(카케이나-kakeina)도 즉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도 행했었어야'했지만, 이것들'(타우타-tauta) 즉 의와 긍휼과 신뢰는 행하되 더 중요하게 행했었어야 하는 그 세부지침에 충실의 당위성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이지 꼭 그렇게 앞으로도 계속 십일조를 행하라는 명령형이 아니다. 왜냐하면 동사가 부정과거 시제로서 그 때 그 행위 동작만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허지만 시기적으로 이 때까지는 예수님도 십일조를 인정하셨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 '시기' 이다. 예수님이 십일조를 인정하시고 당위성을 두신것도 아직 예수님께서 율법의 완성인 십자가 사건 전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십일조 제도의 핵심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지시기 전은 예수님께서도 다른 율법인 할례, 안식일, 규례들도 지키셨다. 이 때는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아직 완성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구약의 율법들이 유효한 시기이며, 십일조에 대해 충실 해야함은 사실이다. 십일조는 의식법(신12:6, 민18:26)적인 문제이고, 성전 예배도 진행 중이었으며, 제사장들과 레위인은 그들의 생활 유지를 위해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 십일조에 필요로 한 시기 였다.
율법의 마침인 십자가 사건 전 까지는 예수님도 모든 율법을 지키셨다(갈4장4절). 당연히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십일조를 강조하셔야 마땅하다. 그러나 결단코 십자가 사건이후엔 십일조를 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성전이 헐리고 제사장이 없어 졌기 때문이다. 십일조가 성립되려면 분명하게 성전과 제사장이 필수 요건이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일으키리라' 이 말씀은 십일조 드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스스로 없애 버리신다는 의미이다. 성전이 없으면 레위지파의 제사장 임무도 종결 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십일조 뿐만 아니라 성전도 안식일도 제사장도, 할례도, 제물도, 레위인도 모두 끝난버린것이다. 여기의 사흘만에 다시 일으킬 성전은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의미한다. 주님의 몸이 부활했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율법의 의식법에 속하는 십일조를 지킨다는 말인가? 예수님이 완성하신 율법을 다시 인간들이 미완성으로 만들겠다는 것인가? 십자가 사건을 무력화 시키겠다는건가?
초대교회를 보드래도 일반 헌금에 대한것은 언급되어 있지만 십일조 했다는 기록은 전혀 찾아 볼수가 없다. 그래서 바울도 역시 자비량으로 복음을 전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기 때문에 제자들도 사도들도 초대교회 성도들도 십일조 제도가 유대교의 다른 율법과 함께 폐지 된 것이 당연시 하였다. 그래서 신약의 모든이가 침묵하고 있다.
율법이 다 그리스도를 목표로 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리스도에게서 성취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함께 십일조가 바로 멈췄다. 율법은 그 자체로는 완결되지 않고, 늘 쉼이 없고, 늘 불안해서 참 안식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목표로 늘 나아가고, 그리스도를 향해서 달리고 결국은 그리스도에게 와서 구약의 모든 약속들이 다 성취 되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동일한 하나님이 그 구원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의를 이루셨다. 그래서 율법은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과 함께 종지부를 찍었다. 그래서 지금도 유대교의 유대인 조차 생활의 법으로 삼았던 그 율법의 십일조를 시행할 수도 없고 또 시행하지도 않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믿는자들이 다른제도들은 그대로 놔두고 유독 십일조만을 계속 시행 한단 말인가.
따라서 한국교회가 유대교의 율법의 하나였던 그 십일조를 다시 강요하는 행위는 예수의 십자가를 무르고 다시 구약으로 돌아가서 돌성전도 세우고, 안식일도 지키고, 제사도 지내고, 할례도 지키고, 절기도 지키려고 하는 의도와 전혀 다를바 없다. 교회 운영에 대한 돈은 수단이 되어야 하는데도 목적이 되는 경우가 대다수 현재 교회의 실정이다. 그 수단을 정당화 해서 가르치는 목회자들 때문에 오늘의 교회가 바로 서지 못하는 이유중에 하나이다. 인간의 생명과 영혼은 보이지 않고 집회 참석 인원 머릿수에 비춰 돈만 계산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사람들의 머릿수가 아니라 성도들의 가슴속 심장 박동수를 세어야 된다. 막대한 십일조와 헌금에 눈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사람들의 숫자만 계산하고, 정부에서조차도 동네 구멍가게를 살리기 위해 대형마트 버스 돌리는 것을 폐지 시콌는데, 더 모범을 보여야 할 교회가 대형 버스를 이용해 이 동네 저 동에 쑤시고 헤집고 돌아 다니면서 작은 교회교인들까지 집어 삼키고, 또 대형 교회들은 지방 곳곳에 지성전을 만들어 놓고 목회자 개인 목회 성공의 자랑거리로 힘을 쏟고, 대신 성도들은 빈사상태와 식물성도로 전락해 가고 식은 땀을 흘리고 있다. 정 반대의 레일위로 달려가는 열차와 다름없는 교회들로 만들어가고 있다.
한국에 자그만 교회들은 자기 동네에 대형교회들이 들어 설때마다 공포감과 비명소리만 가득하다. 서울의 서초동에 어느 S대형교회가 새로 건축해 들어서니 그 주위의 작은교회 수백개나 무너져 내린다.지금 한국교회는 르네쌍스가 필요하다. 애초 성도들이 생각하는 교회의 희망은 교회가 성도들의 안식처였다. 그래서 성도들의 가슴은 뛰었고, 성도들의 교회사랑 열정은 폭발하듯해서 비바람과 폭풍이 몰아칠때엔 교회는 언제나 우산이 되어주곤 했다.
목회자는 목회를 자기의 생명과도 같은 가치와 도덕성과 자기 신앙의 인격을 나이테처럼 쌓아 소중한 가치를 끝까지 지켜야 한다. 화장을 고친다고해서 달라지는건 별로 없겠지만 그래도 한국교회는 부활을 꾀해야 한다. 제도적으로 시스템을 새로운 정비가 필요하다. 하나님이 디자인 하신 성경적 교회 본질이 회복 되어야 한다.순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님은 돈에 대해서 부자가 천국가는 것이 밧줄(낙타가 아니고-칼빈의 말)이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바울도 돈은 일만악의 뿌리라고 말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깨끗해지려면 우선 돈줄부터 끊어야 한다. 그래서 천주교는 지금도 연보라고 한다. 연보는 자기 재물을 내어 남을 도와주는 것으로 일종의 구제금에 더 가깝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은 연보를 거둬서 바울에게 내 놓았다. 교인들이 십시일반으로 교회 운영비나 교회일을 하는 자들을 위해 내어 놓는 것이 연보이다.
고후 8장13절에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케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케 하려 함이라 했다. 한국에는 5만 교회, 15만의 목회자, 860만의 성도(어떤이는 1200만이라고 하지만 이 숫자는 환상의 꿈에서 피어나는 신기루일뿐이다) 가운데 아직도 미자립교회가 36,000개나 된다. 더 나아가 세계인구중 하루세끼 식사 해결이 안된숫자가 65억 가운데 9억7천만명이나 된다. 하나님이 요구하는것은 율법보다 더 중요한 '의와 긍휼과 신'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된고 오늘도 말씀하신다.
새 언약의 완성이신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의 의식법인 십일조를 포함해서 모두 완성 하셨다. 은혜 받은 자는 그 은혜를 나누는 차원에서 사랑의 연보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십일조를 부지런히 잘 내서 백배 천배 만배 복받으라고 하는 자, 또 십일조 영웅 록펠러의 허황된 이야기를 들려주며 십일조 했더니 복을 받아 돈 방석에 앉아 누루고 후대 자자손손 복받고 아주 잘 산다고 가르치는 자, 그런데 록펠러 그가 얼마나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행할 수 없는 악질적인 행동을 했는지 그에 대해 조금만 살펴봐도 금방 알수 있다. 록펠러 그 이면에 숨겨진 악한 행동에 대해서 본인이 연구한 자료이다.
십일조를 안하면 저주를 받는다며 겁을 주는 자들이나, 심지어 공개 설교 시간에 십일조를 하지 않는 자는 구원까지 받지 못한다며 으름장을 놓는 자들, 또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교회 내의 봉사직인 직분을 제한하고 제외시키며 믿음 없는 자들이라고 낙인 찍는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무너뜨리려는 사탄적 행위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향한 의와 인과 신이 십일조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셨음에도(마23:23) 목회자들은 오희려 반대로 십일조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 예수께서는'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하셨는데 오희려 교회 목회자들은 십일조와 부담스러운 헌금으로 무거운 멍에로 짐을 씌우고 있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기복신앙으로 중병이 들어있다. 복음을 듣고 교회 등록과 동시에 신자들은 교회 조직에 촘촘히 스며 있는 기복주의적 그물망 속으로 무심코 진입해서 거대한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그 공동체의 멤버가 된 그들'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각종 힘겨운 헌금과 얽어매는 교회제도로 인하여 빛이 바랜다. 교회마다 쏟아내는 정책 메뉴들, 목회자들의 야심 찬 변덕을 감당하면서 오늘까지 지탱왔다는 것이 경이롭다. 신자들은 '신앙의 본질'을 버리고 '기복 전문인' 이 되기로 선회 한지 오래고, 목사들은 돈 생산에 매달릴 따름이다. 맘몬이란 배타적 울타리 안에 스스로 갇혀 물량주의의 일그러진 모습으로 진실된 신앙에서 멀리 떠나 있다. 91년전 이 땅의 교회들은 호화로운 대형 건물이 아니라 불타 버린 47개 예배당의 폐허에서 '빛과 소금' 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는 임박한 예수 재림의 9회말과 다름이 없다. 목회자들은 자신의 마지막 타석의 무리한 스윙으로 자신들의 목회게임을 승부처로 뒤집으려는 그런 부담스런 행동을 거침없이 오늘도 저질른다. 교회건물 짓는데 제1,2 금융권 은행 빚 10조원, 한달 이자만도 600억원.아프리카 전체 인구 6억8천만명중 1/2인 3억4천만명이 한달간 먹을양식을 생명없는 흙속에 던진다. 몸 속에 '분열의 유전자, 왜곡의 DNA, 허영의 염색체' 라도 지니지 않고서야 이렇게 까지 빗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거목은 가만 있는데 바람 소리만 요란하는 짓들이다. 20세기 교회 문맹자는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말했지만, 21세기 문맹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좀더 긴 호홉을 가질 필요가 있다.개혁은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개혁은 진리의 혁명이다. 한국교회는 진리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오늘의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본인들은 회개하지 않으면서 다른이에게 회개하라고 큰 소리 친다. 요시야왕은 율법책의 말씀을 듣고 애통하며 자기 옷을 찟고 유대민족의 죄과를 통회 했던 것처럼 한국교회에서도 하나님의 바른 진리의 생명의 말씀을 찾아야 한다. 나침반은 아무리 돌려도 북쪽을 가리키는 바늘이 언제나 북극성을 향하고 있다.변화를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목회자 자신의 지향점이 바뀌야 한다. 반딧불이 짙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이유가 자기 안에 빛을 간직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온전히 따뜻하게 할 수는 없지만 마음의 눈으로 세상에 온기를 나눌수 있게 해야 한다. 촛불을 세상을 향해 밝히자 하기 보다는 목회자 자신들의 마음속에 켜야 한다. 걸레는 다른 사물에 묻어 있는 더러움을 닦아내게 위해 자신의 살을 헌다. 목회자는 그 비인간화의 속살을 고민 해야된다. 바른 성직자는 원래 강하다. 그들이 강한 것은 잃을게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땅도, 아파트도, 직장 의자도 없다. 신부와 승려에겐 가족도 없다. 스님은 쇠고기도 먹지 않는다. 버릴 것도 없는데 그나마 남은 육신마저 고행으로 가볍게 만든다. 역사적으로 성직자들은 가벼운 몸과 정신으로 세속의 울타리를 훌쩍 뛰어 넘곤 했다. 로마의 사자밥이 되면서도 굴하지 않았다. 카톨릭 신자들은 대원군의 칼날에 목을 바쳤다. 그래서 성직자는 그렇게 강하기 때문에 그들이 움직이면 세속이 긴장하고 떤다. 세상이 얼마나 흔들릴지 세상 사람들은 숨 죽인다. 심장이 두근 거린다. 그러나 안락에 빠진 목회자, 성추행하는 목회자, 부패한 목회자, 연봉이 몇억 혹은 몇십억 받는 자들이 이중과세라고 해서 세금도 안내려는 목회자, 고상한 깃발 아래 어김없이 광기(狂氣) 에 편승해 오면서 장이 서게 하고 좌판을 깔고 판돈을 챙기는 목회자, 성경적이 아닌 십일조를 성경적인 것처럼 꾸며대며 겁을 주며 돈 없어 십일조 못하는 성도들을 왕따 시키는 위선적인 목회자, 그러한 목회자들 앞에는 어느 누구도 미동도 하지 않는다. 마5:18 에서 예수님께서는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하셨고,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그것을 다 이루시었고, 다 성취 하셨다(요19:30).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뤄셨기 때문에 십자가 이후에는 구원의 길로서 의식법인 십일조 기능은 완전히 종결 되었다. 구약의 피 제사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희생제사에 비하면 그림자요 예표였고 그리스도의 제사는 실체요 그 원형이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구약의 모든 제도들이 그림자 라고 했다.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다. 구약의 모든 제도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므로 없어져 버렸다 또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하기 때문에 히브리서에서는 모세와 그리스도 관계를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로 묘사 하면서 율법의 기능 종결에 대하여 바울보다 더 과격하게 말한다(히7장19절). 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린 희생이 율법의 모든 일점일획까지도 다 이루셨기 때문에(히7장27절), 또 옛 계명이 무익하므로 율법을 폐하셨고(히7장18절), 바울 역시 갈5:4에서 '율법으로 의롭다 하려는자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다'고 까지 말했다. 종말론적인 성취와 폐지,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것이 성취되므로 구약의 모든 제도들이 폐지된 것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영화에서 실제가 됐다.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영화로서 교회가 이루어지면서 실제가 된 것이다. 옛 언약의 약속과 선지자의 증거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되고 종말론적으로 성취됐다. 옛 질서는 해소되고 제거되고 없어져 버려서 전혀 새로운것이 생긴 것이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지막으로서 그리스도가 율법을 다 지키고 성취하므로 십일조까지 폐쇄해 버렸다. 그리스도가 성취 했을 뿐만 아니라 율법의 모든 정죄를 다 담당 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십일조)이 그리스도를 믿는자들에게서 적용되지 않는다. 대신 빚을 다 갚아 주었기 때문에 빚쟁이의 빚 메이는데서 끝났음과 마찬가지이다. 모든 율법(십일조)이 종결되고 그 세력이 파괴 돼서 더 이상 그것이 나에게 구속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완전 무력화 돼 버렸다. 그래서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할례받을 필요가 없고, 안식일 지킬필요가 없고, 절기를 지킬 필요가 없고, 의식법에 포함된 십일조까지 지킬필요가 없는 것이다. 옛 언약은 새 언약이 옴으로 자동 폐기 되었다. 전자 제품도 신제품이 나오면 옛날 제품은 모두 폐기하기 마련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십일조)의 마침이고(롬10장4절) 완성인데도, 옛언약의 백성들은 제사 제도를 즉 의식법인 십일조등을 한국교회처럼 계속 할 것이기 때문에 이 제도를 하나님은 성전 휘장을 위에서 아래로 찟고 자신의 심장을 내 보이셔서 물리적 방법으로 폐지 하셨다.그래도 성전이 있는한 레위 제사가 계속 될 것이기 때문에 AD 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을 들어 성전을 옹호하던 유대인 110만명 이상을 죽여버렸고 예루살렘 성전을 완전히 훼파시켰다. 그 후 성전 재건은 아직도 이뤄지지 못했고 또 시온주의 결과로 유대인들이 2차 대전후 팔레스틴에 귀환하여 이스라엘을 세웠어도 아직도 성전많큼은 세울수가 없다. 성전만 아니라 제사장 가문을 완전히 허물어 버리심으로 지금까지도 사독의 뒤를 이은 제사장의 후예를 확인해 낼 길이 없다. 그들의 성씨가 코헨(כהן) 이란 사람을 찾아 제사장으로 세울 수도 있다. 왜냐하면 코헨은(כהן)히브리어로 제사장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헨(כהן)이라는 성씨를 가진 자도 찾을 길이 없다.이 십자가 완성 때문에 한국만 제외한 세계 모든 교회가 이 사실을 깨닫고 십일조를 오래전에 완전 폐지하였다. 한국 교회는 속히 개혁과 회복이 필요하다. 가장 시급한 일이 이 십일조제도를 중단 해야 한다. 그리고 맘몬 우상을 배격해야 한다. 신앙은 언제나 윤리와 어깨를 같이 한다. 한국 교회 모든 성도들이 세상과 말씀에 정직하여야 한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가시밭에 휩쌓여 상처투성 일지라도 필히 개혁을 이뤄내야 산다. 과거 종교 개혁자들에게도 가시가 있었기에, 그 가시가 종교개혁을 이뤄냈다. 가시에 찔리면 고통스럽지만 그럴수록 교회는 든든히 바르게 서 간다. 동풍이 불면 서쪽 가시에 찔리고, 서풍이 불면 동쪽 가시에 찔리고, 가시에 찔리울수록 교회가 진리의 빛을 더 발하게 되는 것은 개혁이라는 치료약을, 우리 영혼에 흘러 들어오게 하는 짧은 주사 바늘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 교회는 개혁의 묘판이 속이 재 편성 되어야 한다. 훗날 이 세상의 아름다운 소풍을 마치고 하늘나라로 돌아가서 그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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